외모 평가도 모자라 화가로서의 존재마저 지우다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40.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 ‘줄리아 라마의 초상’
여성 화가 외모는 항상 평가 대상
‘총명하다’며 라마의 외모 지적
동료가 그린 초상화도 심술궂어
미모를 갖추면 그것도 스캔들
에너지 갉아먹는 외모 평가
언제쯤 여성 삶에서 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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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예술가의 삶과 예술세계를 다룬 자료를 읽다가 이마를 여러 번 짚었다. 한참 그들의 재능에 대해 언급하다가 뜬금없이 외모 평가가 끼어드는 기록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리 크래스너에 대해 미술사학자 게일 레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크래스너가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 없지만, 그의 사망 후 몇몇 지인과 작가들은 크래스너의 외모가 아름답지 않았다고 강조하곤 했다. 크래스너의 학창 시절 동료는 크래스너가 지독하게 못생겼지만 스타일은 우아했다고 말했다.” 크래스너의 남편이자 ‘액션 페인팅’의 대가였던 잭슨 폴록을 언급할 때는 “탈모가 있었지만 야성적인 매력이 넘쳤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남성’ 예술가의 외모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18세기 베네치아에서 활동한 줄리아 라마(1681~1747)도 외모 지적을 받는 굴욕을 감내한 화가다. 20세기 초까지 완전히 잊혔던 라마가 다시 미술사에 등장하게 된 과정도 극적이다. 라마의 자취가 사라진 이유는 그의 그림이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프란시스코 수르바란 등 남성 화가의 그림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1773년에 발간된 베네치아 여행 안내서가 1933년에 재발견되면서 라마의 이름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안내서에 기록된 내용에 따르면, 베네치아 산비달 성당, 산타마리아 포르모사 성당에 걸려 있는 제단화는 라마의 작품이었다.
외모로 굴욕당했던 실력파 화가
이를 계기로 줄리아 라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1728년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콘티가 프랑스 작가 마담 드 켈뤼스에게 보낸 편지도 새로 발굴되었다. 이 편지에 라마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콘티는 “대형 그림에 관한 한 로살바 카리에라(파스텔 초상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한 베네치아 여성 화가)보다 훨씬 탁월한 그림을 그리는 여성 화가를 발견했다”고 감격한 투로 쓰고 있다. 콘티는 라마가 창작한 시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칭찬을 늘어놓다가 난데없이 라마가 아름다움과는 매우 동떨어진 여성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라마가 매우 총명했고, 매우 수준 높은 언어를 구사했기 때문에 그녀의 못생긴 얼굴은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칭찬인가, 모욕인가.
라마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스승이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피아체타(1682~1754)는 라마의 ‘못생긴’ 얼굴을 캔버스에 남기기도 했다. 이 초상화에서도 라마의 외모에 대한 심술궂은 시선을 감지할 수 있다. 팔레트와 붓을 손에 든 채, 라마는 캔버스 밖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라마의 눈빛은 또렷하지 않다. 부어오른 눈꺼풀 아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모습이다. 입술에도 표정이 없다. 그저 두툼하게 그려졌을 뿐이다. 푸르딩딩하게 표현한 오른쪽 손은 이유 없이 뒤틀려 있다. 재능이 넘치는 라마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봐온 피아체타였지만, 라마가 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두드러지게 표현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나 보다.
실제로도 외모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18세기 귀족들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릴 여성 화가의 외모를 많이 따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힘든 작업 과정을 이왕이면 매력적인 외모의 여성과 함께하기를 바랐다. 줄리아 라마는 재능 부족이 아니라 밋밋한 외모 때문에, 남성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초상화가로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그 상처가 컸던 것일까. 라마는 말년에 세상과 접촉을 끊고 은둔하며 살았다. 그 결과 라마는 예술계에서 오랜 기간 이름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반대로 미모의 여성 화가에게는 비단길이 펼쳐졌을까. 그렇지만도 않다. 여성의 괜찮은 외모가 오히려 약점이 되기도 했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오래전부터 여성의 성공을 재능과 열정에서 비롯되기보다는 힘 있는 남성을 잘 유혹한 결과로 보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화가 앙겔리카 카우프만(1741~1807)이 그 피해 당사자다.
못생겨도 안 되고 예뻐도 안 된다?
카우프만은 12살 때부터 신동으로 소문나 20대에 자신의 집을 마련할 정도로 돈을 번 인기 화가였다. 재능에 미모까지 갖췄기에 그의 그림은 숭배 수준으로 인기를 얻었고 그 때문에 ‘angelicamad’(앙겔리카를 미치도록 좋아하는)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다. 이렇게 이름이 알려지다 보니 카우프만의 행보는 연예인처럼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젊은 남성 예술가가 누리는 ‘보헤미안적인 질풍노도’ 같은 것은 꿈도 못 꿨다. 그렇게 주의를 했는데도 소문의 늪은 늘 카우프만의 발목을 낚아채곤 했다. 프랑스의 혁명가 장 폴 마라가 카우프만을 정복(?)했다고 온 유럽에 거짓 소문을 내고 다녀 곤욕을 치르기도 했고, 카우프만 그림 속의 남성은 화가 자신이 결혼하고 싶었으나 결국 하지 못한 인물을 묘사했다는 얘기가 돌았다. 작가 미상의 악의적인 시도 유포됐다. “그러나 카우프만이 자신이 그린 이야기 속 인물처럼 유순한 남성과 결혼한다면 어리석은 신혼 첫날밤을 얻게 될까 두렵다네.” 시뿐이랴. 악랄한 그림도 있었다. 아일랜드 화가 너새니얼 혼(1718~1784)이 1775년에 그린 <마술사>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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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에 힘입어 영국으로 이주해 활동하던 카우프만은 1768년 영국 왕립미술아카데미의 창립회원이 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아카데미의 초대 회장 조슈아 레이놀즈도 카우프만의 재능을 높이 사 앞길을 적극 도왔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였다. 카우프만은 레이놀즈의 숨겨둔 애인이며, 카우프만의 그림 아이디어를 레이놀즈가 남몰래 제공한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자신 또한 왕립미술아카데미의 회원이었던 너새니얼 혼은 이 악소문을 그림으로 옮겼다.
나이 지긋한 마술사가 마술봉을 휘두르며 연신 그림을 만들고 있다. 그의 무릎에 기댄 어린 소녀는 흡족한 미소로 마술사의 마법을 지켜보고 있다. 이 그림은 아카데미의 연례 전시회에 걸렸는데, 당시 관람객들은 마술사가 레이놀즈이며 소녀는 카우프만을 의미한다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림이 나를 조롱하고 있다”는 카우프만의 항의로 <마술사>는 전시회 벽에서 즉각 내려졌지만, 이 스캔들은 내내 카우프만을 따라다녔고, 결국 카우프만은 넌더리 내며 1781년 영국을 떠났다. 뛰어난 외모가 카우프만의 앞길에 걸림돌이 됐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줄리아 라마처럼 너무 못생겨도 안 되고, 앙겔리카 카우프만처럼 원치 않는 관심을 받을 정도로 너무 예뻐서도 안 된다. 이 어려운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여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해왔다. 남성들은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문제인데 말이다. 요즘에도 ‘예쁜 여자는 멍청하고 똑똑한 여자는 못생겼다’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소비된다. ‘여성의 미모와 지능은 양립할 수 없다’는 오래된 편견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방증이다. 실력은 두뇌에서 나오지 이목구비와는 상관없다. 에너지를 갉아먹는 외모 평가는 언제쯤 여성의 인생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다. ‘여자 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본다. 아울러 미술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호출해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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