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다르크·나이팅게일의 자신감 앗아간 ‘가면 증후군’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37. 베르트 모리조, ‘어머니와 언니’


자기 실력에 의구심, 불안에 떨어


애써 작업한 좋은 작품 다 버리고


자신의 능력 체념하고 내려놔


“당신이 거기 있어선 안 돼”


유능한 여성들 괴롭혀온 증후군


신의 힘 빌려 최면 걸었던 중세


지금은 완벽주의 함정 조심해야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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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1841~1895)의 전기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1864년부터 1873년까지 거의 매년 살롱전에 전시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지만, 정작 자신의 실력에 의구심을 가지고 늘 불안에 시달린 걸 알았기 때문이다. 모리조의 화실을 방문한 화가 자크에밀 블랑슈가 남긴 기록에서도 그런 모습이 엿보인다. “모리조는 내게 보여줄 만한 작품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그린 것들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절망에 빠진 나머지 보트에서 작업 중이던 백조 그림을 불로뉴 숲의 호수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내게 작은 선물이라도 주려고 수채화를 뒤졌지만,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작품 고치는 마네 옆에서 체념만


이렇게 자기 확신이 부족한 여성 옆에는 늘 ‘자아 비대증’ 남성이 있기 마련. 모리조에게 그 사람은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였다. 마네는 “내가 없었더라면 모리조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모리조가 한 일이라고는 나의 예술을 베낀 것뿐이다”라며 대놓고 무시하더니, 급기야 모리조가 1870년 살롱전에 제출하기 위해 완성한 <어머니와 언니>에 자신의 붓을 대는 무례까지 저질렀다. 작품을 본 마네는 미친 듯이 웃으며 모리조의 팔레트를 빼앗아 멋대로 수정하기 시작했고, 모리조는 당황하며 제지했지만 결국 마네의 행동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모리조의 다음 행동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분노하는 대신 체념하듯 자신의 능력을 폄하하는 편지를 언니에게 남긴 것이다. “일단 (수정을) 시작하고 보니 아무것도 마네를 막을 수 없더라고. 치마에서 시작해서 가슴으로, 거기서 머리로 올라가더니, 다시 머리에서 배경으로까지 올라가는 거야. (…) 결국 오후 5시에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예쁜 인물화가 나왔지.” 한평생을 그림을 그리며 살아온 모리조였지만 공식적인 서류엔 자신의 직업을 화가라고 표기한 적이 없었던 점, 사망증서 직업란에 무직으로 기록된 점, 묘비에도 화가라는 명칭이 빠져 있었던 점. 이 모든 게 사실 같은 이유, 자신감 부족에서 비롯된 셈이다.


모리조의 증상은 ‘가면 증후군’으로 보인다. 가면 증후군은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닌 우연이라고 생각하며 불안해하는 심리로, 자신이 유능해 보이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믿는 증상을 일컫는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심리학자 폴린 클랜스와 수잰 임스는 “성공한 여성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 배우 내털리 포트먼, 에마 왓슨도 가면 증후군에 시달렸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역시 가면 증후군의 피해자였던 미셸 오바마의 말에 해답이 있다. “사회가 ‘당신은 거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면 증후군’을 느끼곤 합니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전통에서 여성은 태생부터 열등해 남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가 은연중 통용돼왔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아무리 특출난 여성이라도 자신이 남성의 지위와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을 애써 강변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태도가 체화되어 모리조처럼 재능이 있음에도 자신감 결여와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의 압력을 ‘신의 이름’을 빌려 뛰어넘은 중세의 여성이 있었다. 예술, 과학, 철학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수녀 힐데가르트 폰 빙엔(1098~1179)이 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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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종종 신의 계시를 받는 환상을 봤던 힐데가르트는 42살 때 극심한 두통과 사지가 마비될 지경의 격통을 동반한 강렬한 환상을 경험한다. 그렇게 수주 후, 힐데가르트는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신이 본 환시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신이 숨기지 말고 자신이 본 것을 세상에 알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책 <스키비아스>였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이 계시를 받은 순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하늘이 열리고 더할 나위 없이 찬란한 빛이 열린 하늘에서 내려와 내 머리로 쏟아졌으며, 내 마음과 가슴에 불을 지폈다. 갑자기 나는 시편과 복음서, 신구약의 여러 설명을 알고 이해하게 되었다.”


<스키비아스>에 수록된 첫번째 세밀화에 그 순간이 묘사되어 있다. 빨갛고 둥근 지붕이 있는 수도원에 힐데가르트, 그리고 필경사인 볼마르 수도사가 있다. 이때 환영이 붉고 커다란 빛줄기 형태로 하늘에서 내려와 힐데가르트의 눈과 머리를 관통하기 시작한다. 힐데가르트는 이 계시를 놓칠세라 밀랍판에 받아 적고 있다. 이렇게 완성된 <스키비아스>는 힐데가르트의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었다. 자칫 이단으로 몰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당시 교황이었던 에우제니오 3세는 <스키비아스>가 문제없음을 인정했고, 이때부터 힐데가르트는 눈치 보지 않고 자신의 창조력을 풀어놓을 수 있었다. 이후 힐데가르트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작곡가, 최초의 약학자, 최초의 건축가, 최초의 여성 철학자 등 최초라는 수식어가 끝없이 붙는 천재로 살았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남성 창작자들과는 달리,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지혜가 스스로의 것이 아니라 신이 자신의 몸을 악기처럼 연주해 그 뜻을 현현하는 것임을 거듭 강조했다는 점이다. 여성인 입장에서 ‘보신 전략’일 수도 있겠지만, 좀 더 나아가 그가 실제 그렇게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힐데가르트도 가면 증후군에 발목을 잡혔을지 누가 알겠는가.


“내가 아닌 신이 한 일”로 버텨


힐데가르트뿐만이 아니다. 16살 되던 해, ‘프랑스를 영국의 침략으로부터 구하라’는 천사의 음성을 듣고 전장에 나섰다는 잔 다르크, 네차례나 “세상의 명예를 얻지 못해도 나를 위해 일하겠느냐?”는 신의 부름을 듣고 안락한 저택을 나와 ‘간호학의 대모’가 된 나이팅게일도 그랬다. 퍼트리샤 스팩스 버지니아대 교수는 <숨어 있는 자아>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성은 신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만 자신의 ‘보잘것없는 자아’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 이상의 정신적 대의명분에 자신을 바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영적 부름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는 절대 여성 자아에 허용될 수 없었을 업적과 성취에 권위가 부여된다.” 감히 여성이 가정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시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신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는 그 자체가 강력한 자기최면 효과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자신의 능력을 ‘신의 계시’로 설명할 수 없는 시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베르트 모리조가 빠졌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여자는 왜 자신의 성공을 우연이라 말할까>의 저자 밸러리 영은 “모든 것이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여성들을 가면 증후군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실제로 사회는 남성에 비해 여성의 실수에 대해 더욱 엄격하고, 그렇기에 여성들은 자신이 여성 일반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할까 봐 불안감이 크다. 그러나 불안으로 인한 완벽주의가 역설적이게도 일의 성공을 방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한다. 이 당연한 말을 이제 여성에게도 적용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가 ‘당신은 거기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얘기할 때, 페미니스트 운동가 벨라 앱저그의 말로 응수해주자. “오늘날 우리 투쟁의 목표는 여성 아인슈타인을 조교수로 임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멍청한 여자들이 멍청한 남자들과 똑같은 속도로 승진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이유리 작가. <화가의 출세작> <화가의 마지막 그림> 등 예술 분야의 책을 썼다. ‘여자 사람’으로서 세상과 부딪치며 깨달았던 것들, 두 딸을 키우는 엄마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풀어본다. 아울러 미술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을 호출해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sempre8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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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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