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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바닷사람들 밥심 단디 채워준 50년, 부두 노동자들의 ‘할매집’

by한겨레

⑫부산 부두 노동자들의 밥상

어시장 골목의 간판 없는 판잣집

고등어 운반선 타는 박씨가 오자

할매는 집처럼 익숙한 아침밥을

꽃무늬 쟁반에 소담히 담아낸다

그냥 ‘할매집’ 주인장인 이분이씨

“아들들은 일 고만하라 카지만…”

동도 트기 전에 불 피운지 50년째

한겨레

“할매, 밥 돼요? 근데 내 고등어는 주지 마라.”


지난달 21일 아침 7시, 박한용(가명·55)이 나무 판잣집 문을 불쑥 열고 들어서면서 말했다. 부산 서구 충무동 새벽시장과 남부민동 공동어시장 사이 골목에 있는 13㎡(4평) 남짓한 이곳에는 간판이 없다. 지도에도, 전화번호부에도 나오지 않는다. 판잣집은 진초록색 군용 천으로 덮여 있고, 안에는 직사각형 나무 밥상이 가로로 놓여 있으며, 의자가 5개 있다. 천장에는 불이 난 적 있는지 그을음이 묻어 있다. 냉장고엔 맥주와 소주, 사이다와 함께 새벽 졸음을 쫓기위해 가져다 놓은 듯한 박카스 병이 줄지어 서 있다. 이곳은 50여년째 ‘부두 노동자’들의 새벽 공복을 채워온 무허가 밥집이다. 그냥 ‘할매집’으로 불린다.


박한용은 25년째 배 타기 전이면 꼭 이 집을 찾아 아침을 먹는다. 박한용이 타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잡아둔 생선을 바다 위에서 옮겨 싣고 공동어시장에 가져와 파는 운반선이다. 주로 고등어를 취급하기에, 고등어는 갑판 위 밥상으로도 신물이 날 정도다. 1시간 뒤면 꼬박 닷새 동안 배를 타야 하는 박한용은 두부와 애호박이 잔뜩 들어간 된장국과 김치, 무생채, 미역줄기볶음, 시금치무침, 박나물볶음, 달걀프라이가 소담하게 담긴 낡은 꽃무늬 양은 쟁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 한공기를 더해 10분 만에 후루룩 비워냈다. “여기서 밥 묵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아요. 배에서 먹는 밥은 아무리 먹어도 익숙해지지가 않는데, 할매 밥은 25년 동안 익숙해진 ‘할매 손맛’이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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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용이 한끼를 비우고 배를 두드리던 그때, 박웅진(70)도 판잣집 문을 벌컥 열었다. 배 위에서 요리하는 선박 조리사 박웅진은 아침 7시30분이 퇴근 시간이다. 새벽 6시에 하역하는 고기잡이배 선원들에게 된장국을 찬 삼아 아침 밥상을 차려주고 할매집으로 왔다. 뱃사람들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 오전 11시까지는 오롯이 박웅진의 시간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갈 수 있겠나.” 싱글거리며 밥상 앞에 앉은 박웅진에게 할매집 주인장 이분이(87)는 말없이 소주잔을 놓고 매실액을 탄 소주를 부어주었다. 그러자 박웅진이 “할매, 내가 소주 한잔 묵었으니까 그냥 가믄 안 되지”라고 구시렁대더니 바다에서 잡은 은갈치 2마리를 이분이 얼굴 앞에 쑥 내밀었다. “할매, 구워 자시라고. 서로 상부상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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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덕에 구운 고등어 밥상

3시간 앞선 새벽 3시50분.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등지고 이분이가 굽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밥집에 출근했다. 고무줄 바지에 털고무신을 신었는데, 두꺼운 양말과 덧신, 무릎 밑까지 올라오는 발토시까지 겹겹이 덧입었다. 파란색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르더니, 낡은 숯불화덕을 밥집 앞으로 가지고 나와 숯과 망치로 조각낸 나무판자를 집어넣었다. 신문지 한장을 구겨넣고 라이터로 불을 피우니 곧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이분이는 부채질을 하며 매운 연기를 밀어냈다. 15분 정도 화덕을 두고 끙끙대더니 다시 밥집에 들어가 얼음장처럼 찬물에 쌀을 씻어 가스 불에 안치고, 냉장고에서 고등어 두마리를 꺼내 도마에 놓고 비늘을 훑어냈다. 새벽시장에 들러 싸 들고 온 두부와 파, 고추와 무를 넣고 언 조갯살을 풀어 넣은 된장국과 화덕에 구운 고등어가 오늘의 5천원 밥상 주메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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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부산 자갈치 부두는 매일 아침 밥상을 사이에 두고 여러명의 노동이 교차한다. 밥집 인근에는 새벽시장과 냉동창고, 냉동수산물 도매시장과 냉동수산물 직판장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누군가는 사람들의 밥상에 올리기 위해 바다에서 고등어를 실어나르고, 누군가는 선원의 밥상을 차려놓고 자신은 정작 할매집 밥상에서 배를 채우고, 누군가는 이들의 공복을 걱정해 동도 트기 전 쌀밥을 짓고 된장국을 끓이고 고등어를 굽는다. 때로는 새벽 하역을 마친 부두 노동자들이 아침부터 술판을 벌이고, 때로는 생선 담는 상자 만드는 일꾼이 된장국에 소주 반병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때로는 하루 종일 찬 바닥에 앉아 생선을 파는 장사치들이 시래기와 부추, 고사리와 전갱이, 산초를 멸치 육수에 넣고 끓인 시래깃국에 뜨거운 밥을 말아 후루룩 마시며 속을 뜨끈하게 데운다. “작은 딸이 37살인데, 가 6살 때부터 이 일을 했다. 가를 두고 일 나가는데, 막 우는 거라. 할매, 그 딸이 나를 그리 생각한다. 매일 밤 8시30분이면 전화해. 4살 먹은 손녀도 있는데 변호사 저리가라 칸다. 아가 아 같아야 되는데 말을 너무 잘해. 할매, 나도 마이 울었다. 나도 서울에서 직장생활 했어요. 부산 온 건 오래 됐지, 결혼 전에 왔으니까. 할매, 내 갈 시간 됐다. 우리 할매.” 공동어시장에서 고등어 선별하는 일을 한다는 67살 여성은 넋두린지 뭔지 모를 말을 쏟아내며 밥을 욱여넣더니 총총 시장 쪽으로 걸어나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밥상

경남 거제가 고향인 이분이는 4살 때 부산으로 넘어왔다. 아버지는 “가시내는 공부시키면 건방져진다”며 오빠 셋, 남동생과 달리 언니와 이분이에겐 국민학교도 못 가게 했다. 속옷공장에서 일하던 17살 때 4살 많은 남편을 만나 이듬해 결혼했다. 남편은 툭하면 술을 마시고 이분이와 아들들에게 손찌검을 했다. 남편이 던진 도마에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가 찢어졌다. 결국 막내아들이 걸음마를 할 무렵, 이분이는 다섯 아들을 데리고 남편을 떠났다. 그때부터 전쟁같은 밥벌이가 시작됐다. 공사장 막노동부터 술집 주방일, 호텔 요정 주방일, 식당 보조를 전전했다. “옛날에는 묵을 기 없어도 아들 뭐라도 해묵일라꼬 시래기밥도 해 묵고, 무시밥(무채를 섞어 지은 밥)도 해묵고, 죽도 끼리고 했는데, 없을 때는 콩국시 2천원어치 사서 여섯 식구가 묵었지. 콩나물 사다 국 한 냄비 끼려서 건더기는 아들들 떠주고 국물 남은 거는 내 차지인기라.”


그러니 이분이에게 밥상은 삶을 위한 분투 그 자체다. 그래서일까. 매일 저녁 8시께 잠자리에 들고, 같은 시간에 일어나 새벽 4시면 출근해 밥을 짓는다. 할매집을 찾는 이들의 밥상만큼은 부족하거나 가난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밥과 국, 여섯 가지 밑반찬에 매일 다른 요리까지 양은 쟁반에 가지런히 올린다. 구걸하는 이가 오면 국수라도 한그릇 말아 먹여서 보냈다. 무허가 밥집이다 보니 단속도 수십번 나왔고, 누가 질렀는지도 모르는 불도 다섯번이나 났으며, 동네 건달들이 셀 수 없이 돈을 뜯어갔다. 구청에서 단속 나와선 “할매요, 이거 엔간히 씨게도(단단히도) 지어놨네”라고 말하면 “아저씨요, 우리도 묵고 살아야 안 되겠나. 나는 남편도 없이 아들들 데꼬 살라카이”라고 사정해 돌려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여러 번 바뀐 50년 동안 똑같은 하루들이 이어졌고, 그 사이에 오빠 셋과 남동생, 언니는 모두 세상을 등졌다. 막내아들이 61살이 됐다. 그리고 이분이의 몸에는 뇌졸중이 숨어들었다. “심하면 중풍이 온대요. 사람이 말도 이상해지고 그런다대. 의사가 ‘할매는 나이가 들어가 수술도 몬하고 약 가지고 한번 해보입시다’ 캅디다. 아들들은 일 고만하라꼬 말리는데, 내는 이게 낙이다. 말리지 마라칸다. 일 안하고 집에 있으면 병들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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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일터, 배가 직장

박한용도 16살 때 고향 거제를 떠나 이듬해부터 배를 탔다. 가난 탓에 중학교만 졸업하고 일을 찾았는데, 부산에서는 바다가 일터였고 배가 직장이었다. “그때는 가정 형편이 다 너무 어려버서 배만 타면 됐지 다른 꿈을 꿀 수도 없었어요.” 그렇게 서툰 손으로 ‘그물질’하며 월 6만원 손에 쥐던 소년은, 40년 세월이 지난 지금 월 350만원을 버는 선박 기관사가 됐다. 하지만 그는 취업을 준비하는 아들에게 이 일을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아들이 이제 막 대학 졸업했는데, 배 타는 게 뭐가 좋다꼬 대학 나와가지고 배 타게 하나. 직장 취업 준비하게 해야지.” 박한용은 1천원짜리 다섯장을 이분이에게 건넨 뒤 서둘러 배를 타러 떠났다.


선박 조리사 박웅진이 태어난 곳은 통영의 섬 욕지도다. 10살 되던 해 아버지를 따라 처음 배를 탔다. “욕지도에서 태어나믄요. 국민학교 4~5학년이 되믄 아버지 따라 뱃일을 해야 합니다. 믿기지 않지요? 그 어린아가 그물 가지고 고기도 잡고, 낚시도 하고, 그런 게 아직도 생생해요.”


배운 게 뱃일뿐이라 박웅진은 배를 타고 돈을 벌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 29살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콜롬비아로 가 10년 동안 ‘새우 트롤선’을 탔다. 콜롬비아를 시작으로 25년 동안 13개국을 떠돌았다. “우리 친구들이 지금 외국 가자카면 나는 비행기 타는 게 언서시러버(지겨워)갖고 가자캐도 안 갑니다. 진짜 부끄러운 거는, 내가 에이비시(ABC)도 모르고 콜롬비아에 갔거든. 말이 안 통해가 진짜 답답했지요. 그런데 더 답답한 건 낯선 밥이었어요. 한국 부식이 없으니까 애로사항이 많았지. 밥을 해묵는데, 쌀도 완전 밭에서 나는 쌀, 뭐라캐야 되노. 날라다니는 쌀, 팔팔팔 날리는 쌀. 김치 간장 고추장 된장도 없고. 양념이 없으니까 그 맛이 안 나는 거지. 고춧가루 만들라꼬 외국 고추를 따다 빻았는데, 그 나라는 고추나무가 커요. 고추가 이리 집(깁)니다. 그거 하나 넣었다가 매워가 음식 하나도 못 묵었지.”


그러다 16년 전 시력이 나빠져 더는 배를 몰지 못할 것 같았고, 안경을 맞추는 동시에 기관사 직책을 내려놓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래도 여전히 배가 직장이라, 3년 전부터 뱃사람 밥상 차려주는 일을 한다. 타국에서의 낯선 밥상을 떠올리며, 뱃사람 밥상만큼은 누구보다 정성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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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웅진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천금남(62)이 판잣집 문을 열었다. 천금남은 할매집 바로 옆에서 20년째 커피 노점을 하고 있다. 천금남 역시 부지런한 부두 노동자들의 일과에 맞추기 위해 새벽 4시면 출근해 어선 선원들과 어시장 상인들에게 500원짜리 봉지커피와 1천원짜리 생강차, 꿀차, 유자차를 판다. 된장국에 밥을 적시듯 대충 섞어 겨우 한숟갈 뜬 이분이가 천금남에게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말했다.


“나는 손님들 하나씩 와 가지고 돈 주고 팔고 이라는 게 제일 기쁘다. 아들들한테 손 벌리면 그것도 안 되고. 먼데 있는 자슥들보담도 가까운 데 있는 손님이 낫지. 할매 아프면 안 된다고 약 주는 사람도 있고.”


글 부산/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사진 부산/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