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여서 가능했던 ‘고려거란전쟁’…영웅담 아닌 반전평화 메시지

[연예]by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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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한국방송)의 최고 시청률이 10%에 도달했다. 연말 시상식에서 주요 부문 상을 휩쓸었다. 사극은 주로 중장년층이 본다는 통념을 깨고 2030 시청자들의 인기를 끌고 있다. 이유가 뭘까.



드라마는 전쟁을 타이틀로 내세운다. 본래 전쟁은 사극의 스펙터클을 가장 키우는 요소다. 높아진 시청자들의 눈높이를 충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우려를 인트로를 통해 확실하게 불식했다. 귀주대첩의 대규모 전투 장면을 구현한 컴퓨터그래픽(CG)이 외국 판타지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에 밀리지 않았다. 또한 흥화진 전투에서 적의 불화살이 하늘에서 폭격처럼 쏟아지고 병사들이 성벽을 기어오르는 장면, 삼수채 전투에서 고려 검차와 거란의 기마군이 맞붙는 장면 등은 모두 화려한 볼거리와 실감 나는 공포를 선사했다.





성 개방·남녀평등…성리학 이전 세상 ‘문화적 쾌감’





하지만 드라마는 전쟁을 그저 볼거리로 소비하진 않았다. 고려거란전쟁은 26년에 걸친 전쟁이었고, 고려가 거의 망할 뻔한 위기였으며, 결국 강대국과 싸워 승리한 전쟁이다. 하지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강감찬의 귀주대첩’이란 한마디가 전부다. 수년 전부터 이 전쟁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일었는데, 2019년 제이티비시(JTBC)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 2부작이 방송되었다. 당시 동아시아 최대 강국으로 부상한 거란의 황제가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19살 현종과 고려 백성이 느끼는 공포가 어떠했을지 다큐멘터리는 잘 짚어준다. 다큐멘터리가 방송되던 2019년만 해도 전쟁에 대한 감이 멀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쟁이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는가 싶더니, 이스라엘-하마스도 전쟁 중이다. 미-중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항시적 전쟁 위협에 놓여 있는 한국인으로서 당연히 전쟁이란 무엇이며,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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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강하게 담는다. 강감찬(최수종), 양규(지승현), 현종(김동준)을 단순한 전쟁 영웅으로 그리지 않는다. 첫 등장부터 이들이 전쟁을 막기 위해 얼마나 애썼고,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했으며, 승리를 간절히 원하는 이유조차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전쟁에서 백성들이 입는 피해가 무엇인지 애통한 심정으로 세세히 보여주며 공감시킨다. 영화 ‘남한산성’이 신하들의 입씨름과 왕의 굴욕에 방점을 찍으면서 이후에 백성들이 겪은 고난은 아예 다루지 않았던 방식과 비교해보라.



드라마는 기존 사극에서는 맛볼 수 없는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일단 고려 사회를 그린 점이 신선하다. 그동안 정통 사극은 주로 조선 시대를 다루었고, 그보다 이전 역사는 판타지 사극이나 퓨전 사극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고려 사회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찰이 없었다. 그런데 ‘고려거란전쟁’은 조선 사회와 확연히 다른 고려 사회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보여준다.



드라마는 시작과 함께 개경을 죽 훑는다. 불교 사찰을 보여주면서 불교가 중심인 것을 보여주고, 저잣거리 외국인 상인들을 슬쩍 보여주더니, 별안간 담벼락에서 키스하는 남녀를 보여준다. 굳이? 이는 고려가 성적으로 개방된 사회였음을 보여주는 의도적인 장면이다. 곧바로 카메라가 궁궐 안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꽃미남 신하를 끼고 동성애를 벌이고, 태후는 신하와 내연관계를 맺어 사생아까지 낳아 왕위에 올리려 한다. 그뿐인가. 절에 가 있는 대량원군(현종의 즉위 이전)도, 경종의 계비 헌정왕후가 경종이 죽자 자신의 이복 삼촌과 사통하여 낳은 사생아다. 물론 이것은 야사가 아닌 정사의 기록이다. 조선 시대와는 차원이 다르고, 오늘날의 눈으로 보기에도 놀라운 성 윤리다. 성리학이 들어오기 전 고려 사회는 근친혼, 동성애, 과부재가 등이 허용되는 사회였다. 또한 재산 상속에 관련해서도 남녀가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고, 이혼과 재혼에 있어서도 큰 제약이 없었으며 외가의 영향력이 컸다. 그 결과 여성의 지위가 높았다. 우리가 전통이라고 알고 있는 지독한 남성 중심주의는 고작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동안 알고 있던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는 문화적 쾌감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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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듦새도 세련됨이 있다. 역동적이고 빠른 전개가 시원하다. 특히 모든 인물이 욕망에 솔직하고 직설화법을 구사한다. 가령 강조가 현종에게 “성상이 뭘 알아서, 무슨 실력이 있어서, 국정에 관여하겠다는 것이오. 그런 것은 신하들이 알아서 할 테니 성상은 그저 연회나 즐기고 대를 이을 자식 만드는 일에나 전념하시오. 그 쉬운 것도 못 해서 정변이나 일어나게 하지 말고”라며 진심으로 말할 때, 기존 사극에서 느껴본 적 없는 통쾌함이 느껴진다.





‘하나 된 고려’ ‘야만적 거란’은 없다





드라마는 이분법에 빠지지 않는다. 즉, 한 사람의 영웅을 중심으로 선악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고,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입장을 드러내게 한다. 가령 항복을 주장하는 신하들을 무조건 간신이나 비겁한 인물로 그리지 않고 그들의 주장에도 나름의 설득력을 부여한다. 다만 중반으로 갈수록 강감찬의 역할에 너무 큰 무게를 두는데, 이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고려사’에는 거란군이 개경에 접근했을 때, 모든 신하가 항복을 말했지만 강감찬 홀로 “서서히 이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나온다. 이 말에 따라 현종은 몽진을 떠났고, 거란군이 물러간 뒤 현종은 강감찬을 최고 요직에 등용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현종의 몽진 중에 강감찬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록에 없다. 강감찬과 현종 사이에 두터운 신뢰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작가의 상상으로 메운 것이다. 서경에서 고려 조정이 항복한다고 표문을 보내고, 동북면에서 온 지채문 등이 계속 싸웠던 역사 기록의 틈새에 강감찬의 두뇌 플레이를 넣은 것은 재미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모든 상황에 강감찬이 출몰하거나 노령의 몸으로 회복하기 힘든 수난을 겪도록 그리는 건 이후 귀주대첩까지 끌고 가는 데 무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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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하나 된 고려’와 ‘야만족 거란’의 싸움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고려는 똘똘 뭉친 단일체가 아니었다. 중앙집권제가 아니었던 만큼, 싸우지 않고 성을 내주겠다는 서경부유수도 있고, 황제를 죽이겠다는 지방 호족(실존인물 전주 절도사 조용겸을 모델로 창작된 가공인물 충주 호장 박진)도 있다. 다양한 이해 주체들이 있는데, 이들의 입장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거란이라고 해서 그들을 절대악의 한 묶음으로 그리지도 않는다. 흔히 사극에서 ‘북방 오랑캐’는 야만족으로 묘사해왔다. 하지만 당시 요나라는 송나라에 굴욕외교를 얻어낸 군사대국이었고, 독자적인 문자와 대장경도 보유하게 된다. 드라마는 거란 황제는 명예를 중시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그리고, 거란 장군도 합리성과 협상력을 갖춘 노장으로 그린다.(다만 황실의 부마이기도 한 소배압을 너무 험상궂게 그리거나, 약탈을 담당하는 거란 병사를 갑자기 원숭이 소리를 내며 튀어나오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여전히 상투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여 아쉽다.) 그런 면에서 민족주의적 도식에서 반 발짝 벗어난 드라마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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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가 잘할 수 있는 것





2023년 백상예술대상 드라마 부문 주요 수상작과 후보작들(‘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더 글로리’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작은 아씨들’ ‘슈룹’) 중 지상파 드라마는 한편도 없었다. 지상파 드라마들은 시청률, 화제성, 작품성 등에서 비지상파와 오티티(OTT) 드라마에 밀리고 있으며, 주로 노년층을 대상으로 일일드라마와 주말드라마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거란전쟁’이 2030 시청자들에게 높은 화제성과 시청률을 보이는 것은 시사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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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32부작의 제작비가 270억원이다. ‘오징어 게임’ 9부작의 제작비가 250억원, ‘마이 데몬’ 16부작의 제작비 320억원에 비해 적은 편이다. 제작비 중 상당액이 전투 장면 시지로 나갔다. 사극은 의상, 분장, 기마, 보조출연 등의 기본비용이 많이 든다. 어려운 환경에서 제작비 압박을 받아가며 만들고 있다. 물론 사극과 현대극의 제작비를 단순 비교할 수 없다. 사극은 피피엘(PPL·제품간접광고)이 불가능하여서, 투자를 받기 어렵다. 이 때문에 ‘고려거란전쟁’ 같은 정통사극은 한국방송(KBS)이 아니면 만들기 어렵다. 케이비에스 정통사극의 명맥을 잇고, 전 국민에게 역사교육의 생생한 자료를 제공하고, 국제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에 반전 평화의 메시지를 주고, 외국에 수출해 부가수익도 얻으면서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 케이비에스는 어설픈 콘텐츠로 오티티와 경쟁하려 하지 말고, 자신이 확실히 잘할 수 있고, 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하기 바란다.



‘고려거란전쟁’은 현종의 성장극으로 읽히기도 한다. 앞으로 남아 있는 회차에는 새 왕후와의 로맨스와 개경으로 돌아온 뒤 고려를 변화시키고 승리하는 군주로 거듭나는 현종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질 예정이다. 극 중 현종이 무럭무럭 성장하듯, 배우 김동준도 자라고 있다. 연말 시상식에서 최수종이 대상, 김동준이 최우수상, 두 사람이 베스트 커플상을 받았다. 최수종이 2000년 ‘태조 왕건’에 출연했을 때, 청춘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고 가는 목소리를 지닌 그가 사극에 어울리냐는 힐난이 많았다. 이렇게 오래도록 ‘사극의 왕’을 할지 누가 알았으랴. 김동준을 보며 그때의 최수종이 떠올랐다. 어쩌면 베스트 커플상이 그 암시일지도 모른다. 강감찬과 현종이 유사 부자관계로 느껴지듯, 최수종과 김동준이 유사 부자 혹은 교수와 대학원생처럼 느껴진다. 새로운 사극 유망주 김동준을 응원한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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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2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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