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가정 여성 차별 맞서 ‘일신우일신’…인순이의 길은 역사가 됐다

[연예]by 한겨레

아버지는 미군, 어머니 홀로 양육


사회적 멸시 견디며 가요계 데뷔


‘또’‘친구여’ 등 새로운 도전·성과


공동체 위한 대안학교도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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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순이가 지난달 23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KBS) 신관 공개홀에서 열린 ‘골든 걸스’ 쇼케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리 시대의 위인을 꼽으라면, 그 안에 인순이가 속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요즘 대중문화계에 중년여성 열풍이 거세다지만, 인순이는 그 열풍 너머에 존재한다. 훨씬 전부터 존재했고, 훨씬 윗길이다. ‘골든 걸스’ 멤버 중에서 유일하게 60대다. 1957년생인 그는 신체 나이가 가장 젊고, 근력과 균형감이 최고다. ‘희자매’로 데뷔해 유일하게 걸그룹 경험이 있어서인지 적응도 빠르다. 박진영의 다소 무리한 디렉팅에 동료들이 불만을 표할 때도 인순이는 눈을 반짝이며 “우리가 이런 디렉팅을 받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며 분위기를 다잡는다. 처음 박진영의 제안을 받았을 때 “언제든 하이힐을 신고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답했다. 이건 빈말이 아니다. 인순이는 59살에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 입상했다.

나이 들면 트로트? 타성 벗어난 도전

어떻게 이럴 수가. 데뷔 후 46년이 흘렀건만, 원로 가수가 아니라 현역 가수이다. 그것도 똑같은 스타일로 46년간 버틴 게 아니라, 자기 스타일을 계속 바꾸어가며 ‘늙지 않는 현역’으로 살고 있다. 계속 정상에 있었던 건 아니다. ‘밤이면 밤마다’로 1984년에 ‘7대 가수상’을 받지만, 1987년부터 내리막이었다. 밤무대 말고는 설 곳이 없었다. 그렇게 잊히는 가수들이 많다. 보통 그런 시기에 가수 활동을 접는다. 사업을 알아보거나 사고를 친다. 하지만 인순이는 불러주는 곳이 없어도 끊임없이 여러 장르의 노래를 연습하며 레퍼토리를 개발했다. 밴드를 결성하고 안무를 짰다. 춤을 배우고 의상에 투자했다. 5년간의 슬럼프 기간에 묵묵히 준비한 것들이 마침내 ‘열린음악회’ 무대에서 실력으로 뿜어져 나왔다. 장르를 넘나드는 선곡과 퍼포먼스로 세대를 초월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티브이(TV) 무대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가던 인순이는 1992년 트로트풍의 노래 ‘착한 여자’를 발표하며,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트로트로 잡았다. 많은 ‘원로가수’들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스텝이다. 하지만 박진영과의 만남을 계기로 인순이의 노선이 확 달라진다. 1995년 박진영의 노래 ‘이별’에 인순이가 피처링한 것을 인연으로, 1996년에 음반 작업을 함께 하였다. 그렇게 발표된 곡이 ‘또’이다. 인순이의 파워풀한 가창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역동적인 댄스곡이었다. 뮤직비디오는 인순이의 인종적 특징을 살려 휘트니 휴스턴을 떠오르게 하는 등 진보적 관점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인순이만의 강점을 최대한 살린 세련된 작업물이었다. 이런 진취적인 흐름은 2004년에 조피디(PD)와 만나 대박을 터뜨린다. 처음엔 ‘친구여’의 피처링으로 참여한 작업이었으나, 인순이는 곡 전체를 장악했다. 인순이는 제2의 전성기를 맞았고, ‘친구여’는 조피디의 노래 중 가장 유명한 노래가 되었다.


2005년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 부른 ‘거위의 꿈’이 또 한번 사고를 쳤다. 객석에서 기립박수가 터지고, 시청자들의 반향이 컸다. ‘거위의 꿈’은 발표된 지 10년이 지난 곡으로, 원곡자(카니발)가 따로 있다. 하지만 호응이 남달랐던 이유는 곡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인순이의 삶과 공명하며 진정한 울림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리라. 2007년에 원작자의 허락을 받아 발매한 리메이크 싱글 음반이 히트하면서 ‘거위의 꿈’은 인순이의 대표곡이 되었다.


2005년 무렵에 인순이의 무대를 가까이서 보았다. 48살이라는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탄탄한 몸매와 파워풀한 퍼포먼스, 카리스마 넘치는 가창력에 넋이 나가버렸다. 거기에 인순이가 객석에 던지는 따뜻한 위로의 말에 마음이 녹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앞으로 약 20년간 인순이가 현역 댄스가수로 계속 노래하리라 상상하진 못했다. 48살 댄스가수도 기적 같은데, 66살 댄스가수는 완전 판타지 같았기 때문이다. 나이 든 여자이자 혼혈인이라니, 나이·성·인종의 삼중적 소수자인 인순이가 가장 빠르게 변하는 연예계에서 반세기 동안 도태되지 않고 주류에 서 있을 수 있는 비법이 있는 걸까.


첫째, 인순이는 후배들과 인연을 통해 동시대의 새로운 음악을 흡수함으로써 자신을 갱신해 나간다. 둘째, 작은 기회도 놓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셋째, 슬럼프 기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과감히 투자하며 실력을 쌓고 기다렸다. 넷째, 남들이 모두 가는 쉬운 타성의 길로 가지 않았다.

부계혈통주의…국적 얻지 못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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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문화방송(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희자매’ 멤버였던 인순이(가운데)가 ‘실버들’을 부르는 모습. 유튜브 화면 갈무리

“실버들을 천만사~ 늘어놓고도~ 가는 봄을 잡지도 못한단 말인가~” 데뷔곡 ‘실버들’의 노래말이다. 정서가 착 감긴다 했더니, 김소월의 시란다. 1978년 희자매가 처음 등장했을 때, 센터였던 인순이의 외모가 단연 화제였다. 인순이는 당시 머리에 구슬 장식 흰 두건을 쓰고 있었다. 인종적 특징이 드러나는 짧은 곱슬머리는 한번도 티브이 화면에 나온 적이 없었다. 당시 혼혈 가수로 윤수일, 박일준이 활동 중이었지만, 흑인계인데다 여성인 인순이를 향한 대중들의 모욕과 차별의 언사는 훨씬 심했다.


1982년 길에 나붙었던 영화 ‘흑녀’의 포스터를 기억한다. 인순이가 육감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고, “검은 성의 신비” “육신은 새까맣습니다. 그러나 피는 당신같이 붉습니다” 등의 카피가 적혀 있었다. ‘애마부인’ 등 에로티시즘이 주류를 이루던 당시 한국 영화계에서 혼혈 여성을 이국적인 섹슈얼리티로 소비하려던 기획이었으려니 짐작하기 쉽다. 일부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료를 찾아보면 영화 ‘흑녀’는 그렇게만 단정할 작품이 아니다. 에로티시즘과 배신과 치정이 서사의 전면에 나와 있지만, 배경에는 혼혈인에 대한 당시 사회적 인식이 비판적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순이는 당시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겪었던 차별과 소외를 들추는 것 같아 처음엔 출연을 거절했지만, 사회적 인식을 표현하는 데 정열을 쏟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로 인순이는 촬영을 위해 거액을 들여 의상을 직접 준비하고 수상스키와 오토바이를 배우는 등 촬영에 열성을 보였다. 영화의 기획 의도를 정확히 판단하긴 힘들다. 분명한 것은 20대의 인순이가 성적 착취를 당한 희생자가 아니라, 혼혈인에 대한 차별을 알리고 싶어서 적극적으로 출연한 당사자이자, 분명한 자의식과 주체성을 지닌 예술가라는 점이다.


인순이는 1957년 경기도 연천에서 한국인 어머니와 주한미군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는 몇번 편지를 주고받았을 뿐,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한다.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몹시 가난했다. 당시 혼혈인에 대한 한국 사회의 차별이 어느 정도였을까. 김지혜의 책 ‘가족각본’에서 인용하는 신문 자료를 보면, 당시 혼혈아들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방에 갇혀 지내기 일쑤였으며, 대한민국이 고향이 아니라고 느꼈다고 한다. 정부 정책도 전원 국외 입양을 목표로 삼았다. 당시 법적으로도 혼혈아는 한국인이 아니었다. 1948년에 제정된 국적법은 부계혈통주의를 따르기 때문에, 아버지가 외국인이면 한국 국적을 가질 수 없었다. 1998년에 법이 바뀌면서, 부모 중 한명만 한국인이어도 한국 국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당시 호주제하에서 상당수 혼혈아는 호적도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평생 차별에 시달리지 않으려면 아버지 나라로 가라’는 압박이 가해지며, 국외 입양이 종용되었다. 단일 민족이라는 순혈성을 해치는 얼룩이자, 민족적 자괴감을 일깨우는 수치로 여기며 눈앞에서 치워버리려 한 것이다. 혼혈아를 낳은 여성에 대해서는 성적인 비난을 퍼붓고, 혼혈아에 대해서는 멸시와 혐오를 안기면서.

끝없는 도전 ‘저속노화의 달인’

인순이도 차별과 따돌림을 겪으며,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12살에 미국행을 제안받았지만, 엄마 곁에 남았다고 한다. 그는 부모를 원망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아버지에 대해서는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여장부처럼 강한 사람이며 입양 보내지 않고 끝까지 키워준 것에 감사하다고 말한다. 인순이는 “주한미군은 먼 나라에서 한국의 평화를 지키러 온 사람이며, 외로워서 사랑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인순이는 1999년과 2010년에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면서, 한국군 참전 미군 노병들에게 “여러분들은 모두 제 아버님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아버지’이다. 자전적 스토리가 담긴 노래라고는 하지만, ‘한번도 본 적 없는 아버지’에 대한 노래로 특정되진 않는다. 다만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품었던 복잡한 애증이 교차하는 노래이다. 인순이는 2011년 ‘나는 가수다’의 첫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인순이가 어렵게 끄집어낸 아버지라는 화두를 통해 관객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관계의 응어리를 끌어올리며 눈물을 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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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순이가 지난 4월11일 강원도 해밀학교 개교 10주년 기념식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연하고 있다. 해밀학교는 인순이가 설립한 다문화 대안학교다. 연합뉴스

인순이는 2021년 엠비엔(MBN)의 예능프로그램 ‘더 먹고 가’에 출연해 18살에 막 상경했을 때 청년들에게 괴롭힘당했던 일화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자기 존재를 인정해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대한 쇼맨’의 ‘디스 이즈 미’(This is me)도 불렀다. “시선은 두렵지 않아. 내가 옳다고 굳게 믿어, 이게 바로 나야!” 소수자로서의 자기 존엄이 느껴지는 노래다. 인순이는 자신을 인정하고 긍정함으로써, 세상의 모멸에서 벗어나 승리자가 되었다.


인순이는 개인의 승리에 그치지 않고, 공동체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10년 전 자신과 같은 정체성의 고민을 지닌 청소년을 돕기 위해 다문화 대안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딸을 훌륭한 재원으로 키워낸 엄마이기도 하다. 중졸 학력이 무색할 정도의 훌륭한 교육자다.


인순이는 야만적인 차별을 온몸으로 겪으며 자신의 입지를 구축해온 뮤지션이자, 멸시하는 세상을 향해 자기 존엄으로 받아친 소수자이다. 꾸준히 몸을 갈고닦으며, 새로운 일과 배움에 두려움 없이 도전하여 늙지 않는 비법을 터득한 저속 노화의 달인이다. 일신우일신 하며 기적을 쌓는 인간, 과연 우리 시대의 위인이다.


대중문화평론가


'씨네21' 영화평론가로 출발하여 티브이 드라마, 예능 등을 두루 평론한다. 인권·역사·여성·장애·인구·성·계급·권력 등 사회과학 전반에 관심이 많다. 원래 전공은 의학·보건학이다.

2024.01.30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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