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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함부로 ‘유족다움’을 말하지 말라

by한겨레

영화 ‘살아남은 아이’ 배우 김여진


‘아들 잃은 엄마’역으로

육아 7년만에 스크린 복귀


상처 회복·속죄·치유의 이야기

무게감에 눌려 피하고 싶었지만

절제된 고통 담은 대본에 마음 출렁


‘이 역할 놓치고 싶지 않아’ 욕심


“아이 잃고 어떻게 저럴 수 있나고?

그럴 수 있어요. 이 영화처럼”

내 아들(은찬)이 죽었다.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다 대신 목숨을 잃었다. ‘의로운 죽음’이라는 칭송과 함께 아들은 의사자로 선정됐다. 보상금은 아들 학교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아들 대신 목숨을 건진 친구(기현)는 학교를 나와 방황한다. ‘저 애 때문에…’하는 원망의 틈새로 왠지 모르게 마음이 쓰인다. 아들 친구를 보듬어 자신의 인테리어 가게에서 도배 일을 시켰다. 아이가 제법 쓸 만하게 기술을 배워가면서 세 사람 사이에도 온기가 감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아들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눈물로써 털어놓는다. 그동안 애써 삶을 지탱했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무너진다.

<살아남은 아이>(상영 중)는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부모와 아들의 친구, 세 사람의 이야기다. 영화는 이 셋의 일상을 쫓으며 상처의 회복과 속죄, 그리고 치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시종일관 담담하고 건조하게 그린다. <살아남은 아이>에서 죽은 은찬의 엄마 미숙 역할을 맡아 7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배우 김여진(46)을 최근 서울 동작구 아트나인에서 만났다.


인터뷰 첫머리, 그는 경력 20년 차 내공으로도 감당하기 버거웠던 작품의 무게에 대해 토로했다. “시나리오를 받고 한동안 펼쳐보지도 못했어요. 제목에서부터 무게감이 느껴지니 차마 읽지 못하겠더라고요. 나이 들수록 무거운 작품이 겁나요.”

함부로 ‘유족다움’을 말하지 말라

배우 김여진. 엣나인필름 제공

하지만 미루다 미루다 거절의 이유를 찾기 위해 펼쳐 든 시나리오는 단숨에 그를 삼켜버렸고 7년 만에 스크린으로 이끌었다. “미숙이라는 캐릭터가 손에 잡힐 듯 느껴지며 마음이 출렁거렸어요. 몇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느낌에 ‘다른 사람이 이 역할 하는 건 못 보겠다’는 욕심이 나더라고요.” 어떤 점이 그토록 김여진을 사로잡았을까? “남편을 잃으면 과부, 부인을 잃으면 홀아비, 부모를 잃으면 고아라 부르죠. 근데 자식을 잃은 이를 일컫는 말은 없어요. 이름 지을 수 없는 고통이라서 그렇대요. 그런 고통을 그려내면서도 거리감을 유지하는 작품이라 끌렸어요.”


김여진의 긴 공백은 ‘육아’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 공백만큼 나이를 먹어 이제 일곱살이 됐다. 아이가 있기에 이 작품이 더 애틋했지만, 그래서 더 힘겹기도 했다. “감정을 펼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 고통과 상실감이 무섭도록 공감됐어요. 이건 미숙의 감정이지 내 감정은 아니라고 수없이 선을 그으며 노력했죠. 촬영하는 내내 제 아이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못하겠더라고요.”

함부로 ‘유족다움’을 말하지 말라

배우 김여진. 엣나인필름 제공

영화는 세 주인공의 감정선을 고르게 그리면서도 그들이 맞닥뜨리는 고통을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한다. “이 작품은 아이 잃은 슬픔을 선정적으로 전시하지 않아요. 그 슬픔을 클로즈업하지도,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아요. 감정을 눌러야 할 장면에서 계속 오열이 터지고, ‘컷’ 사인이 떨어졌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아 고생을 많이 했어요.” 그는 흔히 말하는 ‘유가족다움’에 대해 비판적 어조로 의견을 밝혔다. “사람들은 불행을 겪은 이들의 이미지를 자꾸 일반화해요. 그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심지어 유가족을 비난하죠. ‘어떻게 아이 잃은 부모가 저럴 수 있어?’ 그런데 그럴 수 있어요. 이 영화처럼.”


시사회 뒤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감독님도 말씀하셨듯 세월호를 염두에 둔 건 전혀 아니에요. 아이 잃은 부모 이야기는 너무 많아요. 세월호도, 연평해전도, 천안함도, 그런 의미에선 다 같아요.” 영화에 대한 이런 시선은 사회적 이슈에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 온 ‘개념 배우 김여진’의 이미지가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탓도 있을 터다. “배우로서 그런 수식어도 일종의 선입견이라 달갑지만은 않죠. 하지만 관심사에 따라 그때그때 말하고 행동했던 것뿐이고, 그 관심사는 계속 변하고 있어요. 최근에 제 정체성은 유치원생 애 엄마라서. 하하하.”

함부로 ‘유족다움’을 말하지 말라

배우 김여진. 엣나인필름 제공

길었던 공백만큼 일 욕심이 폭발한다는 김여진. 하지만 40대 여배우가 출연할 작품이 적어 아쉽다. “관객 중 다수가 여성이잖아요? 최근 영화가 여성을 그리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아지면서 변화가 시작됐어요. 여성이 어떤 작품을 원하냐, 어떤 시각을 가지냐에 따라 많이 달라질 것 같아요. 한편으론 봉준호 감독처럼 유명한 분들이 흥행을 고려하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요. 백 억 단위 말고 마흔 넘은 여배우가 출연하는 작고 실험적인 영화를.”


다양한 장르에 대한 도전 욕구도 용솟음친다. “요즘 태권도 배워요. 아이 따라 도장에 갔다가 시작했어요. 그래선지 액션 장르에 도전하고 싶어요. <007> 주디 덴치처럼 카리스마를 연기하다 결정적 장면에서 ‘빡!’ 발차기를 선보이면 멋지지 않을까요? 하하하.”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