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시가 되다

[컬처]by 한겨레

[정태춘·박은옥 데뷔 40돌]


‘시인의 마을’ ‘촛불’로 떠오른

탁월한 싱어송라이터 정태춘

음악·삶의 동반자 박은옥

소외되고 짓눌린 약자들 위로


거리 민중 위해 목청 높이고

검열로 억압하던 정부에 맞서

음반 사전심의 철폐 이끌어내


문화예술계 인사 144명 모여

데뷔 40돌 기념사업 추진위 발족

문학·예술성 빼어난 노래 재조명

시집 발간·순회 공연·헌정 전시 예정


정태춘 “팬들 위해 기념 앨범 제작

요즘은 붓글로 내 안의 얘기 전달

올 한해는 소통하며 놀아볼 생각”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1993년 한국방송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에서 노래하고 있는 정태춘·박은옥 부부. 김승근 사진가 제공

이달 초 나오는 시 전문 계간지 <시작> 봄호에서 문학평론가 오민석 단국대 교수는 “시스템과 불화하고 저항하는 주체”로서 음악만큼이나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이룬 ‘두 거장’의 예술적 자취를 분석한다. 1억장 이상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스타 가수이지만 주류 음악계에서 늘 비껴나 있던 밥 딜런은 1960년대 미국 사회의 “노래 속에 거리의 삶을 끌어들였다.” 정태춘은 1978년 데뷔작 <시인의 마을>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연예인’의 길을 가는 대신 “자신만의 포크로 현실과의 접점을 만들어나가”며 그로 인해 “공허한 사랑 노래로 인식되던 대중문화는 삶의 노래로 지평을 넓혀나갔고, 얇고 얕은 감성으로 치부되었던 대중문화는 사회, 정치적 성찰의 심도를 갖기 시작하였다.”


지난 1월 말 발족된 ‘정태춘·박은옥 데뷔 4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면면만 보더라도 정태춘이 한국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의 넓이와 깊이를 어림짐작할 수 있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이은 명필름 대표가 공동 추진위원장을 맡았고, 방송인 김제동, 사진작가 김홍희, 영화배우 명계남·문성근, 영화감독 임순례·정지영, 소설가 박민규, 화가 박불똥·임옥상·홍성담, 연출가 유수훈, 판화작가 이철수 등이 추진위원으로 참여했다. 추진위원 144명의 명단에는 1970년대 이후 문화판의 변화를 주도해온 이름들이 망라되어 있다.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상념 끊기지 않는 번민의 시인이라도 좋겠소


나는 일몰의 고갯길을 넘어가는


고행의 수도승처럼


하늘에 비낀 노을 바라보며


시인의 마을에 밤이 오는 소릴 들을 테요”


(‘시인의 마을’ 중)

어쩌면 정태춘은 처음부터 시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때문에 한국에서 가장 삭막한 공간 중 하나일 군대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노랫말을 써내려갈 수 있었을 테다. 1954년 경기도 평택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정태춘은 음대 입시를 포기하고 도망치듯 간 군대에서 첫 노래들을 만들었다. 그 노래들로 발표한 앨범이 <시인의 마을>(1978)이다.


데뷔작에서 ‘시인의 마을’, ‘촛불’ 등이 히트하면서 그는 대번에 주목받았다. ‘쎄시봉’으로 상징되는 포크 문화의 향취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 그의 노래는 서양 노래 번안곡과 차별화된 한국적 정서와 노랫말을 품고 있었다. 1979년 <문화방송>(MBC) 신인가수상과 <동양방송>(TBC) 방송가요대상 작사 부문 상까지 받으면서 ‘인기가수’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명랑운동회> 같은 프로그램에 나가 뛰고 구르고 실에 매달린 과자를 따 먹고 해야 하는 ‘연예인’의 활동에 적응하지 못했다.


1집의 성공 이후 그는 보다 깊은 음악세계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2집(1980)에선 불교의 정서를 녹여냈고, 3집(1982)에선 국악의 요소를 접목했다. 대중성보다 자신만의 독창성과 예술성에 몰두한 결과물은 흥행 실패로 귀결됐고, 이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당시는 음악과 삶의 평생 동반자 박은옥과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박은옥은 부산에서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다. 서울로 올라와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중 음반사에서 정태춘을 처음 만났다. 박은옥은 정태춘의 곡을 받아 1978년 데뷔 앨범 <회상>을 발표했다. 그 과정에서 사랑에 빠진 둘은 1980년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을 꾸리고 딸까지 낳아 기르던 시기에 닥친 궁핍은 고통스러웠다. 이때 또다른 음반사가 손을 내밀었다. 4년 전속 계약에 800만원이라는, 다소 굴욕적인 조건이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온 음반이 4집 <떠나가는 배>(1984)다. 이때부터 둘은 ‘정태춘·박은옥’ 부부 이름으로 앨범을 내기 시작했다. 4집에 이어 5집 <북한강에서>(1985)까지 잇따라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부부는 힘겨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과거 거리 집회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는 정태춘.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92년 장마, 종로에서’ 중)

상업적 성공에 취할 법도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거리의 민중에게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정태춘은 청계피복노조 지지 공연에 참여한 이후로 거리에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전교조, 전노협 등을 지지하며 노래했고, 새로 발표하는 음악에도 사회적 목소리를 녹여냈다. 대표적인 노래가 8집(1993) 타이틀곡 ‘92년 장마, 종로에서’다.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정태춘과 박은옥의 시선은 억압받는 자, 짓눌린 자, 고정관념에 시달리는 자, 약자, 빈곤한 자, 소외된 자, 노동자에 있다. 두 사람은 한평생 이들을 감싸 안고 지키기 위해 목청 높여 노래했고 외쳤다”고 말했다. 정태춘은 특히 자신의 고향인 평택 대추리와 도두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 싸움에 온몸을 던졌다.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2006년 3월 평택 대추리에서 미군기지 확장 반대 농성을 벌이다 전경에 강제 연행되고 있는 정태춘. 노순택 사진가 제공

정태춘의 싸움 중 단연 두드러진 성취는 음반 사전심의를 철폐한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정부 산하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를 받지 않으면 음반을 발매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가사가 난도질 당하기 일쑤였다. 정태춘은 자신의 일곱번째 앨범 <아, 대한민국…>(1990)을 심의를 받지 않은 채 ‘불법’으로 제작해 내놓았다. 사전심의에 공식적으로 저항한 최초의 음반이었다. 정부와 검찰에 의해 고발·기소 당하자 그는 위헌법률심판제청으로 맞섰다. 결국 1996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음반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이는 문화예술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은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나의 시를


써야겠다


나의 바다는


저물면서도 빛나지 않는다”


(<노독일처> ‘황지우처럼’ 중)

음악인으로, 사회운동가로 치열하게 살아온 정태춘은 밥 딜런에 비견되는 노랫말에서 볼 수 있듯 뛰어난 시인이기도 하다. 2004년 <노독일처>라는 시집을 발표했고, 올해 두번째 시집도 낼 예정이다. 최근 들어 상대적으로 덜 관심 받았던 그의 문학적 성취를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새로운 창작 활동으로 붓글을 쓰고 있는 정태춘.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시작> 봄호는 정태춘의 문학적 측면을 특집으로 다룬다.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기고를 통해 “나로서는 정태춘이 직접 노랫말을 쓰고 곡을 입혀온 탁월한 ‘싱어송라이터’이고, 그 점에서 마음 깊은 곳에서 시를 길어 올리는 ‘시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게 된다”고 밝혔다. 최재봉 <한겨레> 문학 담당 기자는 “정태춘의 노래가 초기의 토속적 낭만주의에서 중기의 치열한 현실 비판을 거쳐 관조와 심화 쪽으로 변화를 보였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가사의 시적 특성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왔다”고 썼다. 박은정 천년의시작 편집장은 “정태춘의 노래는 많이 알려졌어도 가사에 담긴 문학적 성취는 덜 주목 받았기 때문에 이를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이와 함께 4월 초 과거 시집 <노독일처>를 복간하고 신작 시집 <슬픈 런치>와 가사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도 발간할 예정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40돌 기념사업이 예정돼 있다. 정태춘·박은옥은 4~11월 제주, 서울, 부산 등 전국 15개 도시를 도는 순회공연 ‘날자, 오리배’를 펼친다. 또 40돌 기념 앨범 <사람들 2019>도 발표한다. 한국대중음악학회와 한국음악산업학회가 관련 연구와 포럼을 진행하고, 미술가들의 헌정 전시 ‘다시, 건너간다’가 4월11~29일 서울 세종미술관에서 열린다. 여기엔 요즘 정태춘이 창작에 매진하고 있는 ‘붓글’ 작품들도 전시된다. 한때 사진과 가죽공예에 몰두했던 정태춘은 요즘 붓글씨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억압에 맞선 ‘시인의 노래’, 다시

정태춘이 광고를 두고 ‘과장, 거짓말, 사기’라고 비판한 붓글 작품. 정태춘·박은옥 40 프로젝트 사업단 제공

정태춘은 <한겨레>와 한 전화통화에서 “음악을 다시 시작한 건 아니고, 팬들을 위한 마음을 담아 예전 노래를 다시 부르고 신곡 두 곡을 더한 소박한 기념 앨범이다. 정식 앨범을 낼 계획은 여전히 없다. 대신 요즘은 붓글로 내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동안 조용히 지냈는데, 올 한해는 여러분들과 소통하며 재밌게 놀아볼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2019.03.14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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