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품은 섬, 남해에 가다

[여행]by 한겨레

앵강만 통발어선 타고 해삼·문어·감성돔 잡고

김만중 유배된 노도, 서불이 남긴 석각 보고

대대로 내려온 다랑논과 죽방렴 지나면

남해섬 풍경은 지난 세월이 만들었구나

시간을 품은 섬, 남해에 가다

가천다랭이마을 앞바다. 두 여행객이 전망대로 걸어가고 있다. 김선식 기자

남해에 남해군이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해안선 중간지점, 노량대교로 이어진 섬이다. 지도를 보면 남해군은 양 날개를 활짝 편 나비 모양이다. 남해군 남부엔 넓고 깊게 파인 만이 있다. ‘꾀꼬리 앵’, ‘큰 내 강’. ‘꾀꼬리 울음소리 들리는 강 같은 바다’라는 뜻으로 전해지는 앵강만이다. 높은 언덕에 올라 내려다보면 앵강만은 여지없는 농촌 마을이다. 밭고랑 뚜렷한 정돈된 밭 주변에 빨강, 파랑, 주황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한쪽엔 물 댄 논들이 몰려 있다. 방풍림 넘어 바다가 펼쳐진다. 하늘색과 바다색은 경계가 모호하다. 수평선 안쪽으로 배 두 척이 보일 듯 말 듯 앵강만에 안겨 있다.

 

앵강만 원천항(남해군 이동면 신전리)에 내리자 그제야 소금기 어린 바닷냄새가 밀려 왔다. 지난 16일 오후 2시, 심호흡하고 3톤급 연안 통발어선 ‘그레이스호’에 올라탔다. 김상우(51) 선장은 “요즘 해삼이 많이 잡힌다”고 했다. 배가 출발했다. 지름 30㎝, 길이 60㎝ 원통 모양 통발들이 배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얼린 정어리를 통발에 넣고 1주일가량 바다에 던져두면, 그 냄새를 맡고 해삼, 문어, 물고기 등이 모여든다고 했다. 배가 출발하고 15분 지나 통발을 던져 놓은 지점에 도착했다. 선장은 스위치를 당겨 기계를 움직였다. 기계가 밧줄을 당기자 통발이 딸려 올라왔다. 선장은 엉킨 밧줄을 풀고 통발을 떼어 내 바구니에 털었다. 처음 한두 개는 허탕이었다. 새끼 볼락이나 새끼 미역치, 군소만 몇 마리 들었다. 그는 새끼 물고기들을 바다로 던지고 통발을 계속 올렸다. 드디어 해삼이 올라왔다. 도와줄 요량으로 난 해삼을 집게로 집어 빨간 대야로 옮겨 담았다. 해삼은 집게로 옮기는 속도 보다 빠르게 올라왔다. 대야는 20~30분 만에 해삼으로 가득 찼다. 씨알이 굵은 해삼은 잘 자란 밤고구마만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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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우 선장이 통발로 잡아 올린 감성돔을 들고 웃고 있다. 김선식 기자

‘여기 해삼 밭이네’라고 중얼거렸을 즈음 선장은 통발에 든 감성돔을 꺼내 들어 올렸다. 그는 “감성돔은 남해군의 군어”라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해삼이 올라올 때 가끔 낙지, 문어, 돌게, 털게가 따라 왔다. 개중엔 등지느러미 가시를 날카롭게 세운 물고기들도 보였다. 선장은 “가끔 부모들이 한눈판 사이 미역치에 찔려 우는 아이들이 있다”며 “특히 쑤기미는 독성이 매우 강해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장은 해삼을 썰어 회로 내오고, 문어와 돌게를 냄비에 넣어 라면을 끓였다. 해삼은 부드러웠고 라면은 쫄깃했다. 해물 라면 국물에 미세한 뱃멀미가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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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에서 끓여 먹은 해물 라면. 김선식 기자

선장은 젊은 시절 원양어선을 탔다. 2000년대 초반 돌아와 고향에 정착했다. 바다를 품은 앵강만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거기서 통발어선으로 생계를 꾸렸다. 그는 “여긴 고기 썩는 냄새, 기름 냄새 안 나서 좋다”며 “6월부턴 연안에서도 씨알 굵은 문어와 낙지, 붕장어가 올라온다”고 말했다.


앵강만 원천항에서 배를 타고 가다 보면 멀리 섬 하나가 보인다. 숙종 15년(1689년) 서포 김만중이 유배당한 ‘노도’다. 김만중은 평안북도 선천 유배지에서 어머니를 위로하려고 <구운몽>을 썼다고 전해진다. 유배에 풀려 선천을 떠나 어머니와 재회한 지 석 달 만에 다시 유배당한 곳이 남해군 노도다. 결국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그도 노도에서 생을 마쳤다. ‘인생 어차피 일장춘몽’이라며 유배 시절 자신과 어머니를 애써 달랬던 그의 말 못 할 고통이 앵강만 앞바다 외딴 섬에 서려 있다.


노도에서 동쪽으로 가면 상주면 양아리 두모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엔 큰 항아리 모양의 포구가 있다. 지금의 이름은 ‘큰 항아리’를 뜻하는 ‘드므개’에서 유래했다. 마을 위 주차장은 한려해상국립공원과 기암절벽 절경이 펼쳐진다는 금산 등산로 입구다. 그곳엔 높이 2.6m 석상 하나가 있다.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해오라고 보낸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 서불의 석상이다. 서불은 불로초를 구하러 금산에 왔다가 바위에 석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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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이 새겼다고 전해지는 남해 양아리 석각. 김선식 기자

지난 17일 아침 7시반, 등산로 입구에서 석각으로 향했다. ‘남해 양아리 석각’으로 불리는 곳이다. 갓 뜬 햇빛에 산길은 싱그러웠다. 약 20분 걷자 울타리로 막아 놓은 바위가 보였다. 커다란 바위엔 괴상한 무늬가 깊게 새겨져 있었다. 서불은 결국 불로초를 찾지 못하고 사냥만 하다가 이 석각을 남긴 채 금산을 떠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무늬를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서불이 다녀갔다는 뜻이다’, ‘동물 발자국일 것이다’, ‘보면 늙지 않는 별(노인성)을 볼 수 있는 자리와 시각을 서불이 써 놓은 것이다’ 등. 감당할 수 없는 어명을 받들어 떠나 온 이역만리 외딴 섬, 어느 산중에 머문 서불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해독할 수 없는 무늬에선 그저 그의 막막함만 읽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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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다랭이마을 계단식 논밭. 김선식 기자

남해군 가는 곳마다 과거의 시간이 묻어 있다. 앵강만 서쪽 끝 가천다랭이마을(남면 홍현리)이 그렇다. 지난 17일 오전 10시,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농가 대문 앞에는 통마늘과 쪽마늘이 따로 망에 담겨 쌓여 있었다. 마을 서쪽 전망대에선 다랭이마을이 한눈에 보였다. 설흘산과 응봉산 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논밭 100여층은 마치 바다로 내려가는 거대한 계단처럼 보인다. ‘좁고 작은 논배미’를 뜻하는 ‘다랑이’의 사투리에서 유래한 ‘다랭이 마을’은 벼, 마늘, 시금치를 재배한 계단식 논밭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논밭과 높이 5m 안팎 암수바위를 지나 경사로를 따라 10분가량 내려가면 설흘산 밑동까지 차 있는 바다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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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 지족해협 죽방렴. 김선식 기자

남해군엔 원시 어로도 남아 있다. 본섬 남해도와 창선도 사이 좁은 바닷길, 지족해협에서 죽방렴으로 멸치를 잡는다. 죽방렴은 길이 10m 정도 참나무 말뚝을 브이(V)자형으로 줄지어 박고 대나무로 주렴처럼 엮은 어업 시설이다. 밀물에 죽방렴을 따라 들어 온 물고기는 썰물 때 브이자 꼭짓점 지점에 원통 모양으로 만든 웅덩이에 갇힌다. 시속 13~15㎞ 거센 물살에서 사는 멸치는 고기 살이 탄력이 좋고 죽방렴에서 건졌기에 그물·바늘에 상처 입지 않아 국내 멸치 가운데 으뜸으로 친다. 조세윤(66) 환경부 자연환경해설사는 “죽방렴은 지족해협 손도(좁은 물길)에만 23~26개 있다”며 “‘만족을 안다’는 뜻인 ‘지족’에선 죽방렴으로 물고기가 들어오는 만큼만 잡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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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 신전숲 끝에 홀로 서 있는 팽나무. 김선식 기자

대대로 섬사람들은 숲과 나무로 마을을 지켰다. 수백 년 전부터 조성한 남해군 동부 물건방조어부림과 남부 앵강만 신전숲이 그렇다. 마을(물건리)에 태풍과 해일 피해를 막고(방조) 물고기를 주는(어부) 숲(림)을 조성한 곳이 물건방조어부림이다. 해안선 1.5㎞를 따라 상층목 2000여 그루가 심겨 있다. 앵강만 신전숲은 1만평 규모 방풍림이다. 지난 17일 오전 11시 신전숲 주변 연못에선 거위 네 마리가 물질하고 있었다. 숲길은 바다와 만난다. 그 경계에 키 20m가량 되는 우람한 팽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나무는 섬처럼 외따로 서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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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 앞바다에서 통발로 건져 올린 해삼. 김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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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다랭이마을 암수바위. 김선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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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강만 신전숲 주변 연못에서 노니는 거위. 김선식 기자

남해군 여행 수첩

  1. 교통 : 남해군까지 케이티엑스(KTX)를 타고 순천역에 내려 렌터카를 빌려 이동하거나, 시외버스를 타고 남해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는 방법이 있다. 남해군 안에서 버스로 이동하려면 농어촌버스 노선과 시간표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시외버스와 남해군 농어촌버스 노선 및 시간표는 남해군 누리집 교통지도 페이지(namhae.go.kr/transport) 참고. 문의 남흥여객(055-863-3507).
  2. 음식 : 남해시외버스터미널 근처 남해전통시장 안에 있는 ‘짱구식당’(055-864-6504)은 서대를 넣어 끓인 매운탕이 얼큰하다.(3인분 5만원) 가천다랭이마을 ‘해바라기맛집’(055-862-8743)은 멸치쌈밥(1인분 1만원/2인부터)과 해물 된장찌개(8천원), 지족삼거리 근처 ‘원조물회맛집’(055-867-0057)은 물회(1인분 1만5천원/2인부터)가 별미.
  3. 숙소 : 앵강만 주변에 ‘남해 비치호텔’(남면 남서대로 575-13/055-862-8880)과 ‘빛과 소금 펜션’(남해대로 1553번길 9-10/055-862-4285) 등이 있다.
  4. 어부체험 : ‘남해 어부체험’은 오전 7시, 오전 10시, 오후 1시, 오후 3시 운영한다. 체험은 3시간가량 소요. 비용은 1인당 2만5천원, 최소 15만원 이상(6인 가격 이상). 통발 어업과 선상 낚시를 체험할 수 있다. 배에서 갓 잡은 회와 해물 라면을 시식한다. 남은 해물은 싸준다. 문의 055-862-4285.
  5. 문의 : 남해군청 관광진흥담당관실(055-860-8601), 남해군 여행 누리집 tour.namhae.go.kr
시간을 품은 섬, 남해에 가다

남해(경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2019.05.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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