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짝 친구야, 다시 만나 반가워

[컬처]by 한겨레

4050세대와 유년시절 같이 보낸

앤·하이디·세라 등 ‘그 시절 소녀들’

도서·굿즈부터 애니·드라마까지…

하나의 장르·문화현상으로 ‘리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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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부터 23일까지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연 서울국제도서전 행사장에서 가장 사랑받은 인물은 배우 정우성, 그다음은 ‘앤 셜리’였다. ‘빨강 머리 앤’은 도서는 물론 각종 굿즈로 제작, 판매 되었고 포토존에는 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빨간 머리 앤>이 시청자들의 호응으로 시즌3까지 제작되는 가운데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 네버엔딩 스토리>(2009, 다카하타 이사오, 구스바 고조 감독)가 2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제23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프로그램으로 상영된다.


‘내 이름은 빨강 머리 앤’ 전시도 열리고 있다. 지난달 28일부터 10월31일까지 서울숲 갤러리아 포레 엠엠엠(MMM)에서 여는 이 전시는 평일 하루 평균 500여명, 주말엔 1000여명의 관람객이 다녀간다. 전시 기획사 미디어앤아트 관계자는 “3년 전 ‘앨리스’전 때 총 25만 관람객 가운데 10~20대가 70%를 차지했다면, ‘앤’전은 30대 이상 성인 관람객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지난 9일 오후 찾은 전시장에는 20대 딸과 50대 어머니가 함께한 모습도 자주 눈에 띄었다. 20~30대로 보이는 많은 여성들은 예쁘게 차려입고 친구들과 함께 연신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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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계의 소녀 리부트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들’이 소환되고 있다. 대개 1960~70년대 태어난 이들의 유년 시절을 지배했던 친구들이다. 1980년 컬러티브이가 시판된 뒤 활짝 열린 ‘총천연색 시대’를 맞아 각 방송사들은 닛폰애니메이션사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를 연이어 들여왔다.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년 제작), <빨강 머리 앤>(1979), <소공녀 세라>(1985), <작은 아씨들>(1987) 등의 세계명작극장 시리즈는 주기적으로 재방영됐다.


1960년대 말 50권 전집으로 출간된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970년대엔 거의 매년 새로운 판본을 찍어냈는데 이 중 <빨강 머리 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작은 아씨들> 등이 널리 사랑을 받았다. 1980년대에 나온 <삼성당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은 ‘올컬러’로 어린 독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이 중 대표적인 필독서는 단연 ‘앤’이었다. 최초의 한국어판 번역본은 아동문학가 신지식이 무라오카 하나코의 일본어 번역을 옮겨 1963년 창조사에서 묶어 낸 것이다. 이제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 ‘빨강 머리 앤’을 검색하면 나오는 국내서만 300종이 훌쩍 넘는다.


세종서적의 <빨강 머리 앤>(강주헌 옮김, 2016)은 1908년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쓴 초판 원본을 최대한 그대로 옮긴 한국어판 ‘정본’이라 할 만하다. 이 책은 캐나다 ‘빨강 머리 앤 협회’가 100주년을 기념해 초판본과 비교해 절 구분과 여러 오식을 엄격하게 바로잡은 것을 번역했다. 7월 중순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앤’ 단행본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화로 살린 <빨강 머리 앤>(더모던)이다. 지난 5월 출간된 이 책은 발간 한달 만에 6쇄 3만부가 판매되었는데, 출판사는 곧 1908년 초판본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의 양장본도 출간할 예정이다. ‘앤’ 관련 국내 최대 규모 아카이빙 블로그(aogg.egloos.com)의 운영자 ‘로맨티스트’는 “<빨강 머리 앤>은 그림의 힘이 막강한 아동 청소년 도서임이 분명하다”며 일러스트레이터 김지혁의 그림을 담은 인디고의 <빨간 머리 앤>(김양미 옮김)을 수작으로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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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시장의 ‘소녀 리부트’는 3년 동안 30만부가 팔려 나간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백영옥 지음, 아르테, 2016)에서 시작했다. 출판사는 올해 안으로 아름다운 일러스트와 함께 몽고메리의 원작을 완역해 출간하고 뒤이어 몽고메리 평전도 펴낼 계획이다. 앤 열풍을 타고 <빨간 머리 앤을 좋아합니다>(위즈덤하우스), <빨강 머리 앤이 사랑한 풍경>(터치아트) 등 앤이 좋아했던 패션, 인테리어, 정원 등으로 관심사를 파생시킨 책들도 나왔다. 20살 전후의 앤을 집중적으로 다룬 <스무 살, 빨강 머리 앤>(앤의서재)도 있다.


출판 시장의 관심은 이제 다른 소녀들에게까지로 번져나가고 있다. 지난달 발간된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혜화1117)에는 앤을 비롯해 <피터 팬>의 웬디, <작은 아씨들>의 조,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 등 17명의 소녀가 등장한다. 최근 발간된 <걸 클래식 컬렉션>(전 4권)에서는 하이디, 작은 공주(소공녀) 세라, 빨강 머리 앤, 작은 아씨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펭귄북스의 어린이용 임프린트 퍼핀 시리즈로 표지가 아름답고 모두 여성 번역가가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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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어른은 왜 소녀에 열광하나

국어사전에서 ‘소녀’는 미성숙한 어린 여자아이를 가리킨다. <소녀들>(여이연)에서 김은하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는 ‘소녀’가 연령서열주의에 의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권리를 박탈당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소설 속 ‘소녀들’은 자기주장이 있고, 실제 여성들의 생애사에서 그 시절 겪어야 하는 성애화된 시선과 관음증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위험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맘껏 뛰어놀고, 까다롭지만 대개 사려 깊은 어른들 속에서 살아간다.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환상이자 그 시절을 어렵게 겪어낸 어른 여성들에게는 대리만족을 주는 셈이다.


직장인 이유정(28)씨는 “초등학교 때 산 시공주니어의 <빨강 머리 앤>(전 3권)을 열번도 넘게 읽었다”고 했다. 그는 “앤은 가난하고 상황이 대단히 좋지 않은 친구이지만 긍정적인 면모를 잃지 않는다. 대학에 가고 교사가 되어 점점 어른이 되는 앤이 나와 함께 크는 친구 같았다”고 말했다.


‘청춘의 질주’ 뒤 자신의 뿌리를 되돌아보고 싶은 중년 여성들에게는 어릴 적 단짝 친구와도 같았던 여성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는 것이 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20대 딸(노신회)과 함께 <우리가 사랑한 소녀들>을 쓴 50대의 최현미씨는 “도로시, 삐삐, 앤, 하이디 등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이 소녀들 중 몇몇은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그 소녀들을 애정하며 자랐던 나는 누구인지 찾아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책을 낸 혜화1117의 이현화 편집장 또한 “중년 여성들은 모험과 사랑을 거침없이 시도하는 여성 주인공들을 동경하며 자란 경우가 많고, 그들을 성장의 동반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출판 편집자이자 에세이 작가인 이하영씨는 “앤, 하이디, 삐삐, 주디 애보트(<키다리 아저씨> 주인공)의 이야기에는 ‘여자도 의견이 있고 생각을 한다’는 점이 잘 드러나 있었다. 감정이입을 많이 했기에 주인공 대부분이 ‘결혼’이라는 결말에 이를 때는 크게 낙담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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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리부트’ 현상의 뿌리엔 여성주의가 있다고 최현미씨는 짚었다. 그는 “요즘의 소녀 열풍은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이 집단적인 목소리를 내고 자아와 주체성을 중시하면서 자기 자리를 돌아보고 성찰하려는 흐름이 생겨난 것과 연관이 있다”며 “의도적이든 아니든 ‘나를 만든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생각하는 것은 페미니즘의 영향이 짙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엔 결혼으로 이르는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 절대적으로 씩씩하고 자유로운 삐삐는 출간 70여년이 지난 지금 페미니즘의 틀로 봐도 영감을 주는 캐릭터”라며 “이런 점이 요즘 어린 여성들도 삐삐를 계속 좋아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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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 작가 또한 이 현상이 단지 추억의 행위가 아니라고 짚는다. 그는 “어린 시절 읽었던 작품들을 복잡한 세상사에 지친 어른들의 눈으로 다시 읽는 것은 단순한 노스탤지어가 아니”라며 “어른의 독서는 동화나 축약판에서 만나볼 수 없었던 맥락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오늘 내 삶에 비추어 보는 행위가 된다. 이야기 속 소녀들은 중년 여성들에게 잃어버린 내면 아이(inner child)의 감수성을 되찾게 해주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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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희원 충남여성정책개발원 연구원(여성학 박사)은 “상당수 2030 여성들이 ‘소녀다움’과 ‘탈 코르셋’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데,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앤을 ‘걸크러시’나 페미니스트로 재해석할 것이냐 아니면 드레스와 꽃모자를 즐기는 취향의 소녀로 놔두느냐가 핵심이 아니다. 못생기고 가난한 고아 여자아이가 어른들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것,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한껏 느끼면서 일상을 살았다는 것이 소중하다. 사실 모든 여자들이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이유진 이주현 기자 frog@hani.co.kr

2019.07.1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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