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는 예술이어라

[여행]by 한겨레

해남 여행의 처음과 끝 녹우당

고산 윤선도 유적지이기도 한 곳

윤선도 증손 윤두서 작품도 볼만

조선 남종화 대가 화실 운림산방도

초의선사 흔적 있는 대흥사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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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진도 운림산방 전경. 김선식 기자

아침부터 폭염 경보가 울린 지난 8일, ‘땅끝’ 전라남도 해남으로 향했다. 남도 예술 발원지라 불리는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낯선 지역에 낯선 목적(예술 기행)으로 간다는 게 영 낯설었지만, ‘여행이 원래 낯섦을 추구하는 게 아니었나’며 마음을 다잡고 떠났다. 손에 잘 잡히지 않는 여행에서도 쉼, 환기, 재충전, 다시 올 이유 같은 걸 느낄 때가 있다. 단지 목말라서 차 한 잔 마실 때나 나도 모르게 작품 한 점을 오래 들여다볼 때 그런 순간이 온다.


수백 년 나이 먹은 나무를 보면 경외심이 든다. 그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켰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만큼 그 자리가 유서 깊은 곳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라남도 해남군 한가운데 있는 ‘녹우당’ 사랑채 담벼락 밖에 있는 은행나무가 그렇다. 키 20여m, 둘레 6m 은행나무에 달린 은행잎은 풍성하다 못해 탐스러웠다. 나무는 수령 500~600년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건축물 녹우당 역사의 산증인이다. 해남 윤씨 종가 고택인 녹우당은 그 역사가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강진에 살던 어초은 윤효정(1476~1543)은 향리 집안이던 해남 정씨와 결혼해 해남에 터를 잡으면서 막대한 경제력을 얻었다. 윤씨의 아들이 진사시에 급제한 기념으로 심은 나무가 집 앞 은행나무다. 집안은 대대로 벼슬길에 오르며 한때 ‘임금 부럽지 않은’ 부와 권세를 누렸다. 현재도 18대 종손이 녹우당 안채에 산다. 녹우당 뒤편엔 수령 500여년 된 비자나무 숲이 있다. 대부호 집안답게 비자나무를 심은 이유도 각별하다. ‘뒷산에 바위가 보이면 마을이 가난해진다’는 이유였다. ‘녹우당’ 이름은 비자림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푸른 비자나무 숲에 바람 부는 소리를 빗소리에 빗대 ‘초록 비’(녹우)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랑채 앞 푸른 은행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에서 유래했단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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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윤씨 중 재주가 출중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4대 종손인 고산 윤선도(1587~1671)다. 녹우당 터 전체를 ‘고산 윤선도 유적지’라 부르는 이유다. 고산은 조선 남인의 거두이자 조선 시조 문학의 대가다. 그는 초년부터 말년까지 정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25살 때 진사시에 합격한 뒤 29살에 예조판서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당했다. 73살에도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당하고 나이 여든에 풀려났다. 앞서 효종이 봉림대군이던 시절 고산은 그의 사부였다. 효종은 고산에게 수원 집을 하사했는데, 고산이 1669년 82살에 낙향하면서 그 집을 뜯어 배에 싣고 가 종가에 덧대 지었다. 그 집이 녹우당 사랑채다.


그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정치에 관여하지 않을 땐 해남 금쇄동과 완도 보길도 등에서 은거했다. 그때 산중신곡과 어부사시사와 같은 국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들을 썼다. 당시 문인들이 한문학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쉬운 우리말을 유연하고 멋들어지게 구사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그를 ‘자연미의 시인’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녹우당 안 고산 유물전시관에선 고산의 과거 급제 답안지, 시조 모음집인 <산중신곡> 등을 볼 수 있다. 직설적인 문신이자, 서정 시인이면서, 대부호 가문의 살림과 가훈을 챙기는 섬세하고도 엄격한 집안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큰아들 ‘인미’에게 보내 가훈으로 삼도록 한 편지 ‘기대아서’를 보면 이런 글귀가 있다. ‘나는 쉰 살을 넘기고서야 모시옷과 명주옷을 입었는데 너희들은 벌써 그 옷을 취하니 좋은 모습이 아니다. 근검하고 절약하도록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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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해남 녹우당 앞. 수령 500~600년 은행나무가 담벼락 밖에 보인다. 김선식 기자

고산 유물전시관 한쪽을 채우고 있는 건 고산의 증손 공재 윤두서(1668~1715) 작품들이다. 공재는 25살 때 진사시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천문, 의학, 지리 등 다방면의 학문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 풍속화, 문인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45살 낙향해 그린 ‘자화상’(국보 240호)은 한국 미술사의 걸작으로 꼽힌다.


전시관에서 본 ‘자화상’은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부리부리한 눈은 강렬한 기운을 뿜었고, 구레나룻, 콧수염, 턱수염 등은 한 올 한 올 세어 그린 듯 섬세했다. 형형한 눈빛과 미세하게 그린 수염은 그림 전체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그가 자화상을 그릴 때 봤다는 거울도 전시돼 있는데, 수백 년 세월 탓에 표면이 흐려져 있다. 자화상 속 공재의 표정은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우울, 분노, 슬픔, 자부심 같은 것들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시관 한 귀퉁이 그가 남긴 시조를 다시 읽으며 그의 감정을 짐작할 따름이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버렸으니/ 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 고야/ 두어라. 알 이 있을 것이니 흙인 듯이 있거라.’


녹우당에서 꽃피운 문예는 대대로 널리 퍼졌다. 녹우당을 남도 문예 부흥의 발원지이자 산실이라 부르는 까닭이다. 공재의 외증손이던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녹우당 장서 여덟 수레를 빌려 갔다고 전해진다. 조선 남종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도 녹우당 혜택을 입었다. 진도에서 나고 자란 소치가 공재의 화첩과 장서를 만난 건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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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돌목 우수영관광지에서 본 이순신 동상. 김선식 기자

대흥사는 400~600년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1604년 서산대사 입적 뒤 의발을 보관하면서 한국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흥사 들머리에서 두륜산 중턱으로 산길을 따라 30~40분 걸으면 초가지붕을 덮고 있는 일지암을 볼 수 있다. 일지암은 대선사인 초의선사(1786~1866)가 차나무를 가꾸며 ‘다선일미’(차와 선은 별개가 아니다)를 설파하며 수행한 곳이다. 그는 국내 첫 번째 차에 관한 책으로 전해지는 <동다송>을 지었고 후대에 ‘다성’으로 불렸다.


일지암 마당에선 멀리 두륜산 자락 너머 남해가 보인다. 계단 아래 도서관에서 녹차 한 잔을 얻어 마셨다. 폭염에 종일 돌아다녀 땀을 비 오듯 흘렸는데, 따뜻한 녹차 한 잔에도 갈증이 사라졌다. 마치 다선일미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창밖 두륜산 자락을 내다보다 차 한 모금 마시길 반복했다.


일찍이 초의선사의 명성을 들은 소치는 20대 후반에 초의선사를 찾아온 것으로 전해진다. 초의선사는 그의 자질을 알아보고 공재의 화첩과 장서를 가져다 서화를 가르쳤다. 추사 김정희(1786~1856)도 그를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소치는 시·서·화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42살에 헌종을 알현해 그림을 그리고, 왕실 소장 고서화를 품평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50살에 진도로 낙향한 그는 첨찰산 자락에 화실을 짓고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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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대웅보전. 김선식 기자

지난 9일 소치의 화실 ‘운림산방’으로 가는 길, 화실 앞 연못 ‘운림지’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오각형 연못부터 그림이었다. 연못 안, 작은 섬에는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소치가 직접 심은 나무다. 연못 물 위로 드러난 바위 두어개는 여백의 미를 살렸다. 화실 옆은 소치기념관이다. 소치 이래 5대째 화맥을 이어 온 가문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여러 작품 가운데 소치가 노년에 그린 ‘운무산수도’ 글귀에 오래 눈이 간다. ‘남쪽에 푸른 소나무 깎아지른 골짜기를 가로지르나니/ 어찌하면 맨발로 겹겹의 얼음을 밟을 수 있을까.’ 남도의 대가는 일가를 이룬 노년에도 지조와 겸허를 갈구했다.

남도 예술여행 수첩

  1. 가는 길 : 행촌문화재단이 진행하는 ‘남도 수묵 기행’은 해남 대흥사, 미황사, 녹우당, 달마고도 등을 예술가나 큐레이터와 동행하는 답사 프로그램이다. 한국관광공사가 지원하는 2019년 전통문화체험관광프로그램 중 하나다. 행촌문화재단 문의전화(061-533-3663), 누리집(haengchon.or.kr/29). 목포역 또는 광주 송정역에서 녹우당까지는 차로 약 1시간 거리다.
  2. 먹을 것 : 진일관은 해남에 있는 남도 한정식집.(061-532-9932/명량로 3009/2인 기준 6만원) 진도군 신호등회관은 전복 비빔밥, 해삼내장 비빔밥 등의 메뉴가 있다.(061-544-4449/남동1길 66/전복 비빔밥 2만원)
  3. 묵을 곳 : 목포와 해남 사이 영암군에 4성급 호텔 ‘호텔 현대 목포’가 있다. (061-463-2233/영암군 삼호읍 대불로 91) 대흥사 템플스테이 문의전화는 061-535-5775.
  4. 갈 만한 곳 : 해남과 진도 사이 해협 울돌목에는 해남·진도 쪽에 각각 우수영 관광지와 녹진 관광지가 있다. 명량대첩이 벌어진 곳에서 울돌목의 거센 물살과 충무공 이순신 동상, 각종 전시물을 볼 수 있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향토문화회관에서 ‘진도 토요민속여행’이란 이름으로 공연이 열린다. 1997년 4월부터 이어 온 프로그램이다. 진도 토속민요, 무형문화재·국악인 초청공연 등을 무대에 올린다. 1시간여 공연 말미 관객과 함께 하는 공연이 백미다.

해남·진도(전남)/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 참고문헌 <공재 윤두서>, <윤선도 평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2019.08.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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