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 3년 전 털린 줄도 모르고 빈 창고만 지킨 종중 어른들

[이슈]by 한겨레

2016년 도난당한 문신 권도문집 목판 찾았다


5일 오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반환식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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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여기서 훔쳐 간 목판들을 딴데서 찾았어요. 모르셨지요?” “이럴 수가. 고이 보관됐다고만 여겼는데….”


안동 권씨 종중 사람들은 수사관의 말에 경악했다. 지난해 11월 경남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에 있는 종중 유물 창고 장판각은 졸지에 문화재 도난사건의 현장이 됐다. 그 안에 소장된 옛 목판 유물이 털렸는데, 종중 관리자들이 신고한 것이 아니라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수사관들이 찾아와 도난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이들은 도난품이 본래 보관됐던 곳을 확인하러 왔다고 밝힌 뒤 자물쇠를 따고 장판각 내부 선반을 살폈다.


실제로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17세기 인조시대 문신이자 학자로 종중에서 추앙해온 동계 권도(1575∼1644)의 문집 내용을 글자로 새긴 목판(책판·경남 유형문화재) 134점이 사라진 채였다. 도둑이 범행 뒤 장판각 출입문을 다시 잠궈둔 탓에 관리를 맡은 종중 사람들 누구도 3년 전 책판이 사라진 사실을 알지 못했다.


수사결과, 권도 문집 책판을 훔쳐간 이는 같은 집안 사람이었다. 2016년 6월께 종중 관리자가 열쇠를 둔 곳을 미리 알아두었다가, 밤에 몰래 들어가 목판들을 통째로 털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그는 책판을 충북 충주의 골동업자에게 팔아넘겼고, 이 업자는 목판들을 가게 창고에 숨겨놨다가 1년 전부터 풍문을 입수하고 수소문하던 사범단속반에 지난해 11월 꼬리가 잡혔다. 단속반의 추궁에 업자는 장물로 사들였다고 곧장 실토했고, 해 넘기기 직전인 12월 목판들을 고스란히 입수할 수 있었다. 한상진 단속반장은 “지난해 도난 25년만에 회수한 17세기 만국전도의 장물 거래를 수사하면서 연루된 충주 골동상 가게를 압수수색하다 우연히 목판들을 발견하면서 단서를 잡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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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수할 때까지 도난 사실조차 몰랐던 이 책판이 권씨 종중으로 다시 돌아온다. 문화재청은 지난 1년간의 추적 끝에 되찾은 목판들을 5일 오전 서울 경복궁 고궁박물관에서 언론에 공개하고, 종중 쪽에 돌려주는 반환식도 열었다. 산청에서 상경한 종중 쪽 인사들은 정재숙 청장에게 감사패를 직접 전달하며 고마워했다. 목판은 검찰의 환부 결정 때까지 당분간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된다. 종중 쪽은 “목판들을 돌려받은 뒤 관련 기관에 맡길지, 복각본을 만들지 등을 논의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동계문집목판’은 동계 권도(1575~1644)의 사후 160여년이 지난 1809년(순조 9년) 고인의 문집 <동계집>(전 8권)의 내용들을 나무에 새긴 책판이다. 추앙하던 선비의 사후 문중 후손들과 지역의 선비, 주민이 합심해 고인의 글발을 목판으로 만들어 찍고 출간하는 공동체 출판의 산물이란 점이 주목된다. 권도는 1613년(광해군 5년) 문과에 급제해 인조치세기 국정에 관여했던 남인 계열 문신이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피신한 인조를 공주까지 수행한 공으로 원종공신에 올랐다. 각 목판 크기는 52×28×3.0cm 내외다. 애초 135개였으나 1개는 분실된 상태다.


목판에는 <동계집>에 실린 권도의 시와 부(산문), 상소문, 교서, 편지, 축문, 묘비글, 행장, 연보 등이 새겨져 조선시대의 치밀한 기록 문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재규 문화재전문위원은 “ 조선 중기 향촌의 실상과 선비들의 생활 등 당시 사회사 경제사 전반을 담은 원전 사료란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2015년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오른 경북 안동 국학진흥원 소장 조선시대 유교 책판 718종과 비교해봐도 전혀 손색 없는 수준의 내용과 제작 내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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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반장은 “종중이나 사찰 유물은 보관 시설이 열악하고, 관리가 허술한 탓에 훔쳐가도 도난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생기곤 한다”고 전했다. 전국 각지 문중에서 기탁한 안동 국학진흥원 소장 유교책판처럼 국공립박물관이나 공공연구원 등에 맡겨 관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책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정재규 전문위원도 “종중 유물은 공공기관 기탁으로 관리를 일원화하는 것이 도난과 훼손을 막을 수 있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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