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모델은 조각상, 야외는 테라스…날개 꺾인 여성 화가들

[컬처]by 한겨레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30. 윌리엄 체임버스 경, ‘웨스트민스터의 타운리 컬렉션’


홀로 이동할 자유 없었던 때


누드 드로잉 수업도 기회 없어


야외 빛 담고플 때 테라스만


보호자 있어야 집밖 나가고


“내 바람은 혼자 오갈 자유”


현대 한국사회는 나아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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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일하는 사람들, 선원들과 병사들, 술집 단골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풍경의 일부가 되고 싶은데,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은데, 경청하고 싶은데, 기록하고 싶은데, 다 망했다. 내가 어린 여자라서.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남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남자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데, 그렇게 궁금해하면 유혹한다고 오해받는다. 모든 사람과 최대한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천에서 자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서부로 여행을 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밤에 마음껏 걸어 다녀도 되면 얼마나 좋을까.”


1951년 7월, 위대한 시인을 꿈꾸던 19살 소녀는 이런 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의 주인공은 미국의 시인이자 소설가 실비아 플라스(1932~1963). 그는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여기저기 자유롭게 누비며 세상을 탐색할 수 있는 경험을 원했다. 그러나 플라스는 좌절한다. ‘위대한 시인’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뛰고 있지만, 남성 동기들과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일기에서 이렇게 덧붙인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건 내 끔찍한 비극이다.”


모델 몸 대신 조각상 드로잉해야


여성에게 가해진 이러한 제약은, 비단 문학계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저명한 건축가 윌리엄 체임버스 경(1723~1796)이 남긴 수채화를 보자. 체임버스는 어느 날 건축 영감을 얻기 위해, 런던 웨스트민스터 파크스트리트에 있는 찰스 타운리(1737~1805)의 집으로 향했다. 부유한 고미술 수집가 찰스 타운리는 진귀한 고대 조각이 모여 있는 자신의 집을 작은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타운리의 집에서 조각품을 감상하던 체임버스는 우연히 한 젊은 여인이 엉거주춤 앉아 고대 누드조각을 스케치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멀찍이 떨어진 상태로 이 장면을 종이에 담았다.


윌리엄 체임버스 경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가 남긴 수채화 <웨스트민스터의 타운리 컬렉션>은 18세기 젊은 여성 예술가가 처했던 어려움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그림 속 여성은 고대 누드 조각상을 보며 인체 드로잉을 연습하는 중이다. 그에겐 이게 최선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모델의 몸을 직접 관찰하는 누드 드로잉 수업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서는 인체의 움직임도 잘 알아야 하고 해부학 지식도 있어야 한다. 화가가 누드 드로잉 수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비유해보자면 마치 의과대생에게 인체를 직접 살펴보거나 해부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가 극복해야 할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림 속 여성 옆에 붙어 있는 한 남성의 존재도 화가로서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여성 화가의 주변을 팔로 두른 이 남성은 사실 여성의 ‘보호자’다. 그는 아마도 남성 누드를 그리고 있는 여성이 받을 의심스러운 시선을 차단하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가 이렇게 가까이 지켜보는데 그녀는 과연 그림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까? ‘보호자’가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누드 작품을 그릴 때만 지켜야 하는 원칙이 아니었다. 그림 그리는 여성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상류층과 중산층의 모든 여성은 샤프롱이라고 불렸던 동반자 없이는 아예 이동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여성에게는 집 밖에서 혼자 있을 권리도, 혼자서는 이동할 자유도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1841~1895)가 유독 실내 풍경을 많이 그렸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밖으로 나가서 빛을 관찰하고,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를 화폭에 담는 ‘인상주의 운동’에 참여한 선구적인 화가였다. 하지만 모리조는 다른 인상파 화가와 달리 가족이나 주변의 여성, 아이들의 모습 등 굳이 밖에 나가지 않아도 그릴 수 있는 일상을 화폭에 많이 담았다. 모리조가 ‘가정적인 이미지’를 자주 그린 이유를 흔히 얘기하듯 ‘여성 특유의 모성애’와 ‘섬세함’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그게 모리조의 선택일까.


빛은 테라스에서 봤던 인상파 화가


아니, 그것은 사회의 강요였다. 왜냐하면 여성인 모리조는 마네처럼 술집에서 독주를 마시며 사람을 관찰하거나, 모네처럼 보트를 타며 여행하거나, 드가처럼 한밤의 공연장을 드나들거나, 르누아르처럼 강변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리조 역시 샤프롱 역할을 맡은 어머니에 의해 미술관과 화실 속에서 감시받았다. 새장 속의 새처럼, 그녀는 날개가 있음에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시간만큼 자유롭게 머무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모리조는 자신이 가능한 방식으로 예술적 실험을 위해 분투했다. 그 노력이 담긴 그림이 <해변 빌라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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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여름, 모리조는 노르망디 페캉에 휴가를 갔다가 테라스에 나온 언니 에드마와 조카 잔을 그렸다. 그림 속에서 그들은 테라스 난간 밖으로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바다 풍경을 보고 있다. 모리조는 테라스에 캔버스를 세우고 얼굴에 베일을 드리운 언니, 그리고 바깥 구경에 여념이 없는 조카의 뒷모습을 담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테라스였을까? 테라스는 묘한 공간이다. 집 내부와 외부의 중간지대이기 때문이다. 몸은 밖으로 나와 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실외도 아니다. 테라스는 이런 특징을 지닌 곳이기에, 좁은 집 안을 벗어나 넓은 공간을 그려보고 싶은 모리조의 욕망을 제한적으로나마 해소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진출할 수 있었던 최대치인 ‘테라스’에서 기어코 빛을 담은 모리조의 모습은, 자유를 향한 그녀의 내적 목마름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려주는 징표와 다름없다.


모리조는 1887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마리 바슈키르체프의 일기>를 읽고 동감을 표하며 굉장히 괴로워했다고 전해진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마리 바슈키르체프(1858~1884)는 화가 수업을 받기 위해 파리로 온 여성으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완전히 꽃피우기도 전에 결핵으로 사망한 화가였다. 도대체 그녀의 일기장 속 무엇이 모리조의 마음을 뒤흔든 것일까?


일기장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혼자 돌아다니는 자유, 혼자 오고 갈 자유, 튀일리 궁전, 특히 뤽상부르 공원의 의자에 앉아 있을 자유, 미술품 상점을 둘러볼 자유, 교회와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 밤에 옛 거리를 산책할 수 있는 자유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이다. 보호자를 대동해야 하고 루브르에 가려면 마차와 여성 동반자 또는 가족을 기다려야 하는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관람하는 작품으로부터 좋은 것을 얼마나 많이 얻을 수 있을까?”


19세기 바슈키르체프의 일기가 20세기에 쓰인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와 베낀 것처럼 비슷하다. 세월이 흘러 2020년이 되었다. 21세기 한국 여성의 일기장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한국의 치안 상태가 세계 1위’라는 자화자찬은 성인 남성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닌지, 한번쯤은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유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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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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