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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고대·중세 한반도에도 기후난민이 있었다

by한겨레

536·540년 사상 최악 화산 폭발


평균기온 3도 떨어져 10년 한랭기


고구려 가뭄·기근에 집권층 내분


난민 구휼 역부족…결국 권력 붕괴


17세기 잇단 대기근도 기후이변 결과


100만 기후난민 발생에 나라가 나서


본토 쇄환 대신 병사·노동자로 채용


“조선 상업 발달에도 기후영향 추정”

한겨레

17세기 조선 후기 이상기후 여파로 발생한 ‘경신·을병대기근’의 대규모 유민은 시장경제 등 사회경제적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분석됐다. 사진은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한 장면. ‘한겨레’ 자료 사진

서기 531년 고구려의 22대 안장왕이 죽은 뒤 동생이 안원왕으로 등극했다. <일본서기> 등에 안장왕이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순탄하게 왕위가 계승되지 않은 정황이다. 안원왕은 우산성을 침략한 백제를 물리치는 등 대내외로 세력을 다져갔으나 536년께 홍수와 지진, 전염병, 가뭄, 기근 등 재난이 겹치면서 권력을 잃어갔다. 급기야 후계자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국내성(중국 지안)과 평양성 출신 귀족들이 싸움을 벌여 2천명이 살해되고 왕도 죽었다. 역사가들은 이즈음에 고구려에 귀족 연립정권이 등장하면서 국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 안원왕을 좌절시킨 536년 재난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생태환경사학계는 536년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화산 폭발에 주목하고 있다. 건국대 서민수 연구원(사학과·박사 수료)은 지난달 30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대회에서 ‘한국사에서 536년 화산의 이해와 적용’ 제목의 논문 발표를 통해 “536년 북반구에서 발생한 인류 역사상 최악의 화산폭발이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쳐 각종 재난을 일으킨 사실이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에서 확인된다”고 밝혔다.


1980년대 일부 화산연구자들은 536년께 큰 화산 폭발이 있었다는 주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최근 그린란드와 남극의 빙핵에서 화산 폭발 때 나오는 황산염 침전물과 고목 나이테의 냉해로 인한 저성장 흔적 등을 근거로 535∼536년에 북반구와 539∼540년에 적도에서 두 번의 대규모 화산 분화가 있었다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들 화산은 근래 가장 큰 화산 폭발로 일컬어지는 1815년의 탐보라 화산과 1991년의 피나투보 화산보다 강력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화산재가 성층권까지 상승해 몇년 동안 햇볕을 차단함으로써 기온이 536년 이전 30년 평균보다 1∼3도 하강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화산재 등 에어로졸은 대기순환에도 영향을 끼쳐 건조한 한랭기가 10여년 이상 지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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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00∼750년 화산활동과 기온 변동을 나타낸 그래프. 맨 위와 아래는 각각 그린란드와 남극 빙핵의 황산염 수치이다. 536년에는 그린란드 빙핵에서만, 540년에는 양쪽 모두에서 황산염이 추출됐다. 이는 536년에는 북반구에서 화산이 폭발하고, 540년에는 적도 부근에서 화산이 분화했기 때문이다. 가운데 나무 나이테에 남아 있는 한랭기 저성장 흔적도 540년 전후에 화산 폭발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네이처 지오사이언스’ 제공

고구려에서는 536년 봄철 가뭄이 닥치는가 하면 여름에 해충이 창궐하고 이듬해에는 백성들이 집을 떠나 떠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신라에서는 541년 3월에 눈이 1척(30㎝)이 쌓였다고 적혀 있다. 중국에서도 7∼8월 여름에 눈이 내렸다고 중국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기근이 심해 식인 행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잇따라 등장하고 많은 유민이 국경을 넘어 고구려로 넘어오기도 했다. 화산 폭발에서 야기된 이상 기후로 생긴 난민들이다.


고대 국가들은 ‘기후난민’을 적극적으로 구제하려 했다. 중국에서는 창고를 열어 백성의 기근을 해소하고 유이민에게는 5년 동안 과세를 면해줬다. 고구려 안원왕도 536년 관리를 파견해 구휼에 나서고 이듬해에는 왕이 직접 지방을 돌면서 백성들을 구제했다. 서 연구원은 “안원왕대에 벌어진 귀족간 집단 살상행위는 정치적 갈등에서 비롯됐겠지만 이면에는 기후 재해로 불안정해진 사회적 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후난민은 중세에도 발생했다. 조선 시대 역사 기록에서 기근은 몇년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17세기 후반의 ‘경신대기근’(1670∼1671년)과 ‘을병대기근’(1695∼1696년)은 ‘경신·을병’이라 묶여 회자될 정도로 극심했다. 기후학자들은 이 시기를 영국 런던 템스강이 얼고 우리나라 동해가 결빙되는 등 세계적으로 한랭 현상이 지속된 소빙기로 분류한다. <승정원일기> 등의 눈·비 기록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보면 1650∼1710년대에 강수 일수가 크게 감소했다.


역사서들은 경술년(1670년)과 신해년(1671년) 사이에는 이상저온과 극심한 봄가뭄, 여름철 폭우와 우박, 병충해 등이 닥치고, 을해년(1695년)과 병자년(1696년)에도 8월 경남 진주에 눈이 3촌(9㎝)이 쌓였다고 전한다. 숙종 7년(1681년) <승정원일기>에는 “경술년 이래 한 해라도 조금의 풍작이 있었던 해가 없다”는 기록이, <현종개수실록>에는 “경·신 2년간 100만명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경신·을병 대기근의 여파와 유민 대책을 주제로 발표한 김미성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조선전기 실록에서 발견되는 유민 수 기록을 토대로 추정해보면 17세기 이전 최악의 유민 규모가 전국적으로 16만명을 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며 “경신대기근 때 3년 사이 46만명 이상의 호적 인구가 감소하고 1년 새 69만명에 육박하는 유민이 보고되고 을병대기근 때 6년 사이 141만명의 호적 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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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 원각사 무료급식소를 찾은 어르신들이 지난 4월20일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조선시대에도 기후난민이 발생하면 먼저 구휼부터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설죽소’를 세워 죽을 끓여 나눠주거나 ‘진제장’을 열어 양식을 나눠줬다. 그 다음 본 호적지로 돌려보내는 ‘본토 쇄환’을 시행했다. 호적지 이탈자나 이탈자를 보호해준 ‘허접자’ 모두 수십대의 장으로 처벌됐다. 이런 제도는 꾸준히 유지돼 17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종 1년(1660년)에는 유민에게 15일치 식량을 한꺼번에 내주고 본고장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경신·을병대기근으로 유례없는 대규모 기후난민이 발생하자 정책에 변화 조짐이 나타난다. 우선 군량미 생산지인 ‘둔전’에 유민을 모집해 경작하게 하는 제도가 생기고, 훈련별대라 불리는 새 부대를 만들었다. 숙종 때에는 유민의 산골 정착을 용인하되 세금을 걷도록 했다. 새로운 제도를 놓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백성이 굶주림에 어려워 하는데 재산을 빼앗는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18세기 들어 유민들의 비율이 크게 줄었다. 유민들은 특히 서울 도성으로 몰려들어 조정은 한성부 행정편제를 바꿔 한강변 지역을 한성부로 편입했다. 또 대규모 토목공사에 부역제 대신 모립제를 도입해 임금을 주고 유민을 노동자로 모집했다. 김미성 연구원은 “기후이변은 서울로 인구를 집중시켜 모립제 등장, 거주 공간의 변화, 상업 중심지 이동, 빈민층 형성 등 사회 변화를 낳았다”며 “조선 후기 상업 발달 이면에 기후 요인이 작동했다는 점에서 유민과 그 유민을 둘러싼 정책 변화 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서민수 연구원은 “통일신라 때 중앙정부는 진급(곡식 구제), 사신파견, 기우제 등 ‘사회적 안전망’을 갖추고 있었지만 말기에 와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도적이 자주 발생했다”며 “사회적 안전망이 중앙과 지방, 계층에 따라 불균등·불균일하게 작동한 부분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이근영 기자 kyle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