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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황진미의 TV 톡톡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우린 가족에 대해 얼마나 알까?

by한겨레

한겨레

<(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티브이엔)는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 품은 비밀을 다룬 드라마다. 과거에 명절이면 만들어지던 3~4부작 특집극의 심화한 판본 같다. 나름의 문제를 안고 사는 가족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이고, 이들의 비밀들이 터져 나오고, 그래도 가족임을 수긍하게 되는.


사실 <…가족입니다>가 다루는 비밀들은 막장 드라마 못지않다. 그럼에도 만듦새는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이는 영화 <접속> <텔미썸딩> 등의 시나리오를 썼던 김은정 작가와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검블유)를 만들었던 권영일 피디가 만난 덕분이다. 여백과 행간이 느껴지는 응축된 대사가 일품이고, 촬영과 편집이 섬세하고 세련됐다. 연기는 더할 나위가 없다. 원미경, 정진영, 한예리, 추자연이 입체적이고 독특한 캐릭터를 맡아 최강 연기력의 진검 승부를 펼치는 가운데 조연들도 연기 구멍이 없다.


드라마는 60대 아버지가 조난으로 기억을 잃고 22살의 자아로 돌아간 사건을 단초로 삼는다. 22살의 기억을 지닌 채 깨어난 상식(정진영)은 갑자기 늙어버린 자신과 마주한다. 여느 드라마라면 기억이 뭉텅 잘려나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자아를 1인칭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입니다>는 그 간극을 바라보는 아내 진숙(원미경)의 시선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등산 직전 아내는 숨 막히는 결혼생활이 지긋지긋해 ‘졸혼’을 선언한 상태였다. 등짝에 부항을 붙이고, 친구와 ‘상스럽게’ 통화하는 상식을 바라보던 진숙이 마침내 환멸의 말을 쏟아놓는다. 화물차를 몰며 지방을 다니는 그가 가끔 집에 오는 날엔 집 안에 침묵이 가득했다는 둘째 딸 은희(한예리)의 말에 의하면, 그는 전형적인 ‘중년×남’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22살의 기억으로 돌아간 상식은 진숙을 끔찍이 사랑한다. 드라마는 진숙의 낯설고 뜨악한 시선을 따라가며, 풋풋한 사랑꾼이었던 상식이 어떻게 괴팍한 중년×남이 됐는지 풀어낸다. 아직 비밀이 한겹씩 벗겨지는 중이지만 여기에는 개인적인 사연과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결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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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건 별로 없지만) 가족입니다’의 한 장면. 티브이엔 제공

‘대학가요제’ 노래를 유독 좋아한 상식은 학력 콤플렉스가 심한 남자였다. 경상도 출신의 가난한 운수 노동자였던 그는 당시 대학생이었던 진숙을 ‘나무꾼에게 온 선녀’처럼 느낀다. 아마도 젠더 폭력에 시달리던 중이었던 진숙은 임신한 상태로 상식과 결혼하지만 상식의 아이가 아니었다. 상식은 결혼 초반에 외도를 했으며, 어쩌면 숨겨온 혼외자가 있는지도 모른다. 진숙은 셋째를 낳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는데, 선녀처럼 이 결혼에 붙들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숙은 삭막하고 정서적인 교감 없는 결혼생활 대신, 문화센터의 교양남과의 만남에서 활력을 느끼고 있다.


드라마가 풀어놓는 비밀들은 ‘가족을 먹여 살리다 보니’ 순수했던 청년도 밉살스러운 등산남이 되었다고 퉁치는 ‘아버지 용서하기’ 서사들이 놓치는 지점을 보게 한다. 물론 그는 흔치 않은 남자다. 경상도 사투리를 고치는 남자도 드물고 친자가 아닌 딸을 각별히 아끼는 ×남은 희귀하다. 그는 지금도 집 밖에선 낭만주의자로 통한다. 그러나 선녀와 살던 나무꾼도 조바심과 콤플렉스가 변질돼 선녀를 정서적으로 학대할 수 있고, 천박함과 뻔뻔함을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 ‘가족을 먹여 살린다’는 이름으로 남성을 우대하고 쉽게 용서하는 남성 중심 문화가 한몫했음도 부인할 수 없다.


첫째 딸 은주(추자현)의 비밀도 만만치 않다. 그는 사리 분별 명확한 전문직 여성으로, 의사와 결혼했다. 불임으로 임신을 시도하다 포기한 상태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둘 사이의 서걱거림이 있다. 이웃 바리스타와의 묘한 기류가 감지되더니 마침내 비밀이 밝혀진다. 남편이 동성애자이고, 아내와는 위장결혼 한 상태였던 것. 티브이 가족극에서 동성애를 다루기도 어렵지만, 다루더라도 ‘부모에게 커밍아웃하기’ 등을 다루곤 했다. 아내에게 동성애자임을 들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성소수자가 사회적 차별의 문제에서는 피해자지만, 위장결혼의 문제에서는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위장결혼도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산물이지만, 상대를 기망하고 자신에게 비겁한 선택을 한 것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피할 수는 없다.


드라마는 논쟁의 지점을 던진다. 낭만적이고 성실하나 아내로서 견딜 수 없는 남편과, 사회적 약자이나 위장결혼의 가해자인 게이 남성을 여성의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묻는 것이다. 이는 가족주의를 둘러싼 공방뿐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논쟁이 될 만하다. 급진적 페미니즘은 이들을 연민이나 연대의 대상이 아닌 적대의 대상으로 본다.


드라마는 매회 비밀을 터뜨리며 “가족인데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고백을 들려준다. 가족끼리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는 순간은 아찔하지만 유익한 파열구를 연다. 제목은 ‘아는 건 별로 없지만’에 괄호가 쳐져 있다. 어쩌면 ‘그럼에도 가족’이란 테두리로 봉합되는 보수적인 결말이 마련돼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아는 것이 별로 없는 관계가 가족임을 인정하는 것이 가족 유지의 길임을 뜻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다. 가족이라서 잘 모른다. 아니, 가족이니까 제일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