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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나는 누구인가’ 그림 속 내 얼굴이 묻는다

by한겨레

얼굴을 그리다

정중원 지음/민음사·1만9000원

한겨레

본인의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 작품을 바라보는 정중원 작가. 민음사 제공

‘그림이야? 사진이야?’ 얼굴에 있는 작은 모공, 거뭇거뭇한 주근깨, 얇은 솜털까지 생생하게 보인다. 마치 누군가를 마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이퍼리얼리즘(Hyperrealism) 초상화’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장소나 물건, 사람 등 일상적 소재를 마치 사진과 같이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미술 장르로, 극사실주의 또는 포토리얼리즘이라고도 불린다.


<얼굴을 그리다>는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로 주목받아온 정중원(32) 작가가 쓴 에세이다. 지은이는 강창희 전 국회의장,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 소장 등의 공식 초상화를 제작하고 강연과 비영리 극단 운영, 연기활동을 병행해온 예술가다. 이번 책은 자신의 작품활동뿐 아니라 인물화를 중심으로 한 동서양의 미술사까지 두루 다뤘다.


지은이는 예술 대상으로서 ‘얼굴’의 의미를 심도 깊게 고찰한다. ‘얼굴’을 마주하는 행위로 시작되는 초상화나 자화상 작업을 해온 그는 “우리가 ‘얼굴(나와 너)’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과정이야말로 자아와 타자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라고 말한다. 특히 ‘나’의 얼굴을 마주하는 자화상 작업에 관해서는 “내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결점들을 드러내고 그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데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나를 그리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 내 얼굴의 어떤 특징들이 나를 나처럼 보이게 하는지 관찰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한겨레

과거 유럽의 초상화는 전통적으로 인물의 생김새를 미화했다. “흠결 있는 현상 세계보다는 완벽한 이상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고전 미학의 지침”을 따른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돈줄을 쥔 후원자”를 의식한 가난한 예술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초상>(1701)을 그린 화가 이아생트 리고는 루이 14세의 마음에 들기 위해 63살이었던 그를 뽀얀 피부의 청년으로 바꾼 초상화를 그렸다. 17세기 조선의 초상화는 그런 유럽의 흐름과 확연히 달랐다. 인물 얼굴에 나타난 사소한 티까지 보이는 대로 그렸기 때문이다.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자세히 보면 오른쪽 이마 위에 볼록하게 돋아 있는 사마귀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대상을 미화하지 말고 그대로 묘사해야 한다는 조선 미술의 엄격한 규범 때문”이라고 지은이는 말한다.


전통적인 초상화와 달리 21세기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는 관람자의 시선을 바꾼다. 후자는 그림이 얼마나 실물을 닮았는지가 아니라 실물이 그림과 얼마나 같은지 비교 검토하게 한다. 눈으로 실물을 볼 때는 미처 몰랐던 미세한 특징을 그림에서 발견하고, 실물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은 원본과 복제, 실재와 가상의 전복된 위계를 보여 주는 데 본래의 목적이 있다. 그림을 얼마나 정교하게 잘 그렸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복제인지 고민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지은이는 “‘나는 누구인가?’, ‘나의 욕망은 무엇인가?’, ‘나의 욕망은 오롯이 나의 것인가?’ 등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하이퍼리얼리즘 초상화는 실재와 가상, 존재의 진실성을 깊이 있게 질문하게 한다”라고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민음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