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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토요판]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

“어떤 이데올로기에도 가담 않는다”

by한겨레

(22) 장 지오노(1895~1970)


<나무를 심은 사람> 쓴 평화주의자

프로방스의 시골 마노스크 살며

전체주의와 모든 전쟁에 반대

“암흑기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작가”

한겨레

장 지오노. 사진 외젠 마르텔, 위키피디아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코로나19 때문일까, 혼자서 여행하면서 언젠가 아내와 꼭 함께 다시 와야지라고 생각했던 곳에 어쩌면 이제는 다시 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슬퍼진다. 그런 곳은 많지만, 오래전에 방랑한 장 지오노의 마노스크가 유독 그리운 이유는 그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도 젊은 날의 방랑으로 시작하여 30여년 뒤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뜨거운 여름의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를 힘겹게 걸어 다니다가 밤에 닿은 고지대 마노스크에서 때이른 겨울을 만나서였을까? 아니면 내가 사는 마을에서 수십년 자란 소나무들이 무참하게 잘려나가는 것을 매일처럼 보면서 이제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일도 나무를 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30년 전 8월 파리에서 밤차로 새벽에 내린 엑상프로방스에서, 세잔이 죽기 직전까지 20여 년 동안 60번이나 그렸다는 생트빅투아르산의 거대한 석회암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걷고 나자 숨이 막혔다. 풀 한 포기 없는 그 황량한 산을 그렇게도 자주 그린 이유가 무엇일까? 그가 살았던 고향의 산이기도 했지만 모든 사물을 입체로 본 그에게 그 무엇보다도 꼭 맞는 대상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반대로 그런 산을 보고 자라서 모든 사물을 입체로 보게 되었을까? 여하튼 그 전후는 물론 지금까지도 나는 세잔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연과 인간을 입체로 바꾼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태양이 찬란한 프로방스도 그 더위와 황량함 때문에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황량하기에 지오노는 <나무를 심은 사람>을 썼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청년들과 고원에서 공동체 생활

엑상프로방스에서 기차를 타고 두 시간쯤 뒤 밤늦게 닿은 깊은 산속의 마노스크는 추워서 놀랐다. 그가 1951년에 발표한 소설 <지붕 위의 기병>에서 묘사한 그 뜨거운 콜레라의 여름과 달리 8월인데도 추웠다. 흰색 여름의 생명과 검은색 콜레라의 죽음으로 엮어지는 그 소설처럼 그의 작품에는 전염병이 자주 나온다. 가령 1930년 작품인 <영원한 기쁨>에는 한센병이 나온다. 그 무렵 다른 작가의 작품에도 전염병은 ‘전염’됐다. 가령 1947년에 발표된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나 1943년에 발표된 장 폴 사르트르의 <파리떼>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인간의 연대의식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는 이야기인 것과 달리 지오노의 소설에서 전염병은 물질주의를 비유한 것으로, 그것을 자연과 교감하는 원초적 인간의 서정적이고 신화적인 이미지로 극복하는 이야기여서 더 좋았다.


서둘러 지오노의 생가와 그가 다닌 초등학교, 열여섯살부터 서른다섯살까지 일한 은행, 그리고 무덤과 기념관 등을 둘러보는 데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광대한 중앙묘지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11명의 친지가 함께 묻혀 있었고, 그들의 생몰연대만 기록되어 있었다. 구두수선공 아버지와 세탁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가난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열여섯살 때부터 은행에서 일하면서 <성서>, 호머의 <일리아드>, 베르길리우스의 작품 등을 열심히 읽었다. 1차 세계대전에 5년간 참전하면서 그 참상을 직접 겪은 후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전쟁 후 은행에 복직해 결혼했지만, 서른네살에 첫 작품 <언덕>을 발표한 뒤 이듬해 은행을 그만두고 마노스크 마을 뒤에 있는 ‘황금의 산’이라는 뜻의 몽도르 기슭에 이층집을 사서 평생 그곳에서 작품만 썼다. 거대한 마로니에가 있는 입구를 지나 1층의 응접실에 들어서면 그의 친구인 베르나르 뷔페가 그린 그림과 함께 회화와 조각 작품들 그리고 책들이 보인다. 2층은 지붕이 경사진 다락방 서재로 동쪽에 큰 난로, 남북으로 커다란 창이 있고 남쪽 창을 배경으로 책상이 놓여 있으며, 그 위에 그가 평소에 즐겨 쓴 물건들이 놓여 있다. 당시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나는 유독 수많은 파이프에 관심이 가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다.


범신론적인 농부들의 삶을 다룬 초기 작품을 쓰면서 그는 1929년부터 마노스크가 내려다보이는 산비탈에서 자신과 같은 평화주의자 친구들과 공동생활을 했고, 1935년부터는 주변의 콩타두르 고원에서 50여명의 젊은이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했다. 콩타두르는 마노스크에서 버스로 두어 시간 걸리는 바농을 지나야 다다르는 곳이다. 산양 치즈로 유명한 바농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 죽은 양로원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다시 30분 정도를 가면 콩타두르 고원으로, 사람들을 보기 힘들고 지오노와 그 친구들의 흔적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허무하게 돌아서야 했다. 지오노는 친구들과 그곳에서 봄여름을 보내며 9년 동안 어떤 종류의 전쟁에도 반대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는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에도 가담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반전 성명을 아홉 차례나 발표했다.

한겨레

장 지오노. <한겨레> 자료사진

'나치 협조' 억울한 누명 쓰기도

많은 사람이 본다는 국내의 어느 유튜브에는 그가 파시스트여서 감옥살이를 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도리어 반대로 그는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국가사회주의는 물론 국가주의와 전체주의를 비판했고, 도시문명에 반대했다. 그는 징병 반대 운동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개전과 동시에 구속되었으나 앙드레 지드 등의 구명 활동으로 석방되었다. 1944년에 파리가 해방된 직후에 그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7개월간 감옥에 갇혔으나, 그것이 억울한 누명이었음이 곧 밝혀졌다. 그럼에도 대독 협력자로 찍혀 블랙리스트에 실렸다니 프랑스에도 문제는 많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에서 당대 최고의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가 1930년부터 1946년까지 암흑기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는 앙드레 지드나 폴 발레리나 그밖에 저명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농민 아나키스트 작가 지오노, 참다운 기독교도 베르나노스, 그리고 초현실주의자 브르통이라고 한 평론에 의해 알려졌다. 낡은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했으며, 깊은 도덕성을 가지고 현대의 가치관에 저항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오노의 후반 작품은 스탕달과 발자크의 전통을 잇는 것인데, 그 후반 작품에도 지오노가 추구한 자유롭고 이상적인 사회와 그 근원인 아나키즘이 나타난다. 물질주의적인 산업사회를 거부하며 자유, 자연, 평화를 강조하는 그의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에 공감하면서도 솔직히 말해 <나무를 심은 사람> 외에는 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나무를 심은 사람>도 프랑스에서 발표된 것이 아니라 1953년에 미국에서 처음 발표되었고(흔히 <리더스 다이제스트>인 줄 알지만 <보그>에 발표됨), 프랑스에서는 그 뒤에 나왔다.


이 책에서 1913년 산악지대로 여행을 간 ‘나'는 물을 구하다 우연히 50대의 홀아비 양치기를 발견하는데, 그는 지난 3년간 10만그루를 심었지만 1만그루만 산다고 한다. 그러나 1차 대전 후에 그가 만든 숲은 우거지고 시냇물이 흐르고 1945년 87살로 눈을 감을 때 숲은 더욱 우거졌다. 1913년에 세 사람만이 지킨 마을은 이제 만명 이상의 사람이 산다. 1993년 그 책의 우리말 번역이 나온 뒤 나처럼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었지만, 1913년에 만명이 살던 우리의 시골에는 지금 몇명이나 살고 있을까?


박홍규 : 영남대 명예교수(법학). 노동법 전공자지만, 철학에서부터 정치학, 문학, 예술에 이르기까지 관심의 폭이 넓다. 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 150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주류와 다른 길을 걷고, 기성 질서를 거부했던 이단아들에 대한 얘기를 격주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