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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비 오는 날 제주에 가면

by한겨레

비록 용암동굴 천장에선 물 떨어졌지만

편백 숲으로, 오름 호수로, 그림 속으로

한겨레

지난달 26일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에 있는 사라오름 산정호수. 며칠 내린 비로 호수에 물이 가득 찼다. 김선식 기자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거의 1년 만에 방문한 제주였다. 비를 뚫고 어디든 가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했다. 제주국제공항 주차장에서 짐을 짊어진 채 우산을 들자마자 호기로움도 금세 고개를 숙였다. 어디든 비부터 피해야 했다. ‘그래, 동굴로 들어가자.’ 화산섬 제주도에 올 때마다 한 번쯤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용암동굴을 떠올렸다. ‘위기를 기회로’, ‘우중 여행을 우주여행(용암동굴은 우주의 신비다)으로’를 속으로 외치며 차를 동쪽으로 몰았다. 첫 목적지는 제주시 구좌읍 월정리 ‘만장굴’. 지난달 25~26일 제주도 우중 여행의 시작이었다.

여긴 더운 날 와야겠어

‘집중호우로 인하여 동굴 내부가 물이 많이 떨어지고 군데군데 고여 있기도 하므로 우비, 모자, 우산 등을 준비하시고 조심해서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만장굴 들머리 안내판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행지에서 또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불길한 기운이 엄습했다. 실제로 동굴 천장에선 산발적으로 물이 떨어졌다. 바닥 곳곳엔 물이 고여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닥은 미끄러웠다. 여행객 대부분 우비를 입거나 우산을 들었다. 비 오는 평일 오후인데도 만장굴을 오가는 여행객들은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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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만장굴 내부. 김선식 기자

제주도는 ‘동굴의 왕국’이다. 지난해 8월 발표한 ‘제주도동굴연구소’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 동굴은 총 209개다.(용암동굴 178개, 해식동굴 31개) 흔히 ‘오름의 왕국’이라 불리는 제주도의 오름 규모(368개)에 버금간다. 만장굴은 그중에서도 유서 깊다. 1962년 국내 동굴 중 처음 천연기념물(제98호)로 지정됐다. 만장굴을 포함한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됐다.


용암동굴은 먼 과거 용암이 흘러간 길이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는 지난달 17일 조사 결과 만장굴을 포함한 거문오름용암동굴계가 9000년 전(오차 ±1800년) 생성됐다고 추정했다. 동굴 안은 작은 조명들이 드문드문 설치돼 있었다. 짧게는 5m 앞도 암흑이었다. 동굴은 넓어졌다가 좁아지길 반복했다. 넓은 곳은 ‘광장’이고 좁은 곳은 ‘골목길’이었다. 주 통로는 폭이 18m, 높이 23m에 이른다고 한다. 총 길이는 7.4㎞, 여행객들은 그중 약 1㎞(제2구간) 거리를 탐방할 수 있다.


‘부종휴 탐험대’가 된 기분이었다. 고 부종휴 선생은 1946년 당시 제주 김녕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학생 30여명과 횃불과 짚신에만 의지해 처음 만장굴을 발견했다고 한다. 동굴 벽면과 천장을 살피며 조심조심 발걸음을 뗐다. 용암이 남긴 흔적들은 왠지 으스스했다. 용암이 벽에 새긴 무늬와 선(용암 유선)은 거슬거슬한 파충류 가죽 같았고 천장이 녹아 굳어버린 날카로운 형상(용암종유)은 맹수의 이빨을 닮았다. 천장에서 바닥으로 흘러내리던 용암이 굳어 기둥이 된 높이 7.6m 용암 석주에 이르러 공개 구간은 끝난다. 다시 되돌아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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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만장굴 내부. 김선식 기자

이날 바깥 기온은 21도, 만장굴 내부는 10.8도였다.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용암동굴 안에 있으면 춥다. 긴 옷이나 점퍼를 권한다. 동굴은 비가 아니라 더위를 피할 때 오면 좋을 곳이었다. 여행객에게 개방된 제주도 동굴은 손에 꼽는다. 만장굴 외에는 미천굴(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 ‘일출랜드’)과 협재굴·쌍용굴(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한림공원’)이 대표적이다.

비를 잊는 시간, 빛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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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성산읍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 오는 10월까지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한다. 김선식 기자

빗방울이 더 굵어졌다. 미천굴과 협재굴·쌍용굴까지 완주하려던 계획은 만장굴 초입에서 애당초 접었다. 안락한 공간이 그리웠다. 불현듯 떠오른 곳은 ‘인공 벙커’. 2018년 11월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에 문 연 프랑스 미디어아트 상설전시관 ‘빛의 벙커’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훈데르트바서 작품에 이어 지난해 12월부터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오는 10월까지다. 대로에서 약 500m 외진 길로 들어갔다. ‘빛의 벙커’는 옛 국가 기간 통신시설이던 비밀 벙커를 개조한 곳이다.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5.5m 단층 건물이다. 전시관 문을 열자 휘황찬란한 그림이 벽과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외부 소음이 차단된 공간엔 90대 프로젝터와 69대 스피커가 설치돼 관람객들이 눈과 귀로 작품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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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성산읍 미디어아트 전시관 ‘빛의 벙커’. 오는 10월까지 반 고흐와 폴 고갱 작품을 전시한다. 김선식 기자

그림은 음악과 함께 벽을 따라 흘렀다. 가장 큰 벽면(100m×5.5m) 앞엔 관객들이 줄지어 앉았다.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1888)이 벽면을 따라 흐르자 관객들도 그림 따라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여기선 관객도 그림이 된다. 고흐의 ‘종달새가 있는 밀밭’(1887)에서 밀(그림)은 점점 키가 자라고 그 옆(통로)을 관객들이 지나간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 하늘(그림) 속으론 너덧 살 아이(관객)가 뛰어들어간다. 한 가족(관객)은 고흐의 ‘생트마리드라메르의 바다 풍경’ 속 파도(그림)에 앉았다. 고흐의 강렬한 붓 터치와 고갱의 원색적인 색감에 흠뻑 빠져 있다 보니 40~50분이 훌쩍 지났다. 밖에 내리는 비는 잊은 지 오래다. 전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한다. 한참 머물다 다시 밖으로 나갈 시간, 먹구름 짙은 하늘은 비를 뿌리고 까마귀 떼가 점점 밀밭으로 몰려들더니 이내 벙커를 덮쳤다.(고흐의 ‘까마귀떼 있는 밀밭’) 제주에서 독특한 구성으로 만난 명화는 육지 전시와는 또 다른 맛이었다.

며칠 비 내리다 그치면

밤사이 날이 갰다. 이틀 연속 꽤 많은 비(서귀포 기준 24, 25일 각각 123.2㎜, 27㎜)가 내린 터였다. 새벽부터 맘이 들떴다. 비가 많이 온 뒤에라야 물이 차오른다는 사라오름 산정호수에 가기로 했다. 제주도에 산정호수가 있는 오름은 물장오리오름, 물영아리오름, 물찻오름, 사라오름이다. 그중 사라오름 산정호수는 가장 높은 곳에 있다.(해발 1338m)


‘양말 벗고 맨발로 걸어야지.’ 사라오름은 비가 많이 내린 뒤엔 호수 둘레길(나무 데크)까지 살짝 물에 잠길 때가 있다. 맨발로 호수를 걷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운이 좋으면 호수에 물 마시러 오는 노루 떼도 만날 수 있다. ‘어제 내린 비는 바로 오늘을 위한 비였으리라’ 생각했다. 새벽 6시30분 한라산 성판악 탐방로를 걷기 시작했다. 성판악~백록담 코스 약 3분의 2 지점에 사라오름 들머리가 있다.(성판악~사라오름 전망대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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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한라산 백록담 가는 길에 있는 사라오름 산정호수. 김선식 기자

숲은 한껏 물이 올랐다. 물기 머금은 나무줄기 이끼는 포동포동했다. 햇살 머금은 숲은 여행객들도 초록으로 물들였다. 이름 모를 나무는 뿌리로 바위를 끌어안았고 둥글게 패인 줄기 구멍 속에서 씨앗은 싹을 틔웠다. 초록 숲에선 만개한 산딸나무 꽃들만 유난히 하얬다. 뒤따라 산을 오르는 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운동복 차림으로 산길을 달리는 이부터 9개월 된 아이를 업고 백록담으로 향하는 인천 시민까지, 자기 속도에 맞게 발걸음을 뗐다. 사라오름 산정호수에서 내려오는 이들에게 “물이 데크까지 찼냐”고 묻자 같은 말만 되돌아 왔다. “무조건 올라가 보세요. 끝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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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판악 탐방로에서 만난 서현수씨 가족. 김선식 기자

호수는 잔잔했다. 수면은 데크 높이에 50㎝ 이상 못 미쳤다. 얼마나 비가 와야 데크까지 물이 차오를까. 지난 7일 한라산 국립공원에 문의했다. 답이 돌아왔다. “오늘(화요일) 아침에 데크 바로 밑까지 물이 찼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에도 비 예보가 있어서 일요일엔 데크 위까지 물이 찰 가능성도 있지만 아무도 장담할 순 없습니다.” 바짝 마른 데크에 섰다. 가까운 호수는 붉은빛이, 먼 호수는 녹음이 짙었다. 투명한 물 아래 붉은 화산 송이들이 반짝였다. 호수 뒤로 백록담 정상이 굽어보고 있었다. 물빛이 빛나는 정원 같은 호수였다. 둘레 약 250m(호수 직경 80~100m) 호수 둘레길을 천천히 걸었다. 다른 여행객들도 그곳에 오래 머물며 쉬이 떠나지 않았다. 둘레길 한쪽에 전망대 가는 길(약 도보 1~2분 거리)이 있다. 전망대에선 주변 오름들과 한라산이 넓은 들판처럼 펼쳐진다. 구름도 그 들판에선 길게 누워 쉰다.

가랑비 오면 다시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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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남원읍 고이오름은 편백 약 7만 그루가 있다. 김선식 기자

비 온 뒤 온통 편백 숲으로 뒤덮인 오름에 가보는 건 어떨까. 사라오름에서 내려와 고이오름(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으로 향했다. 약 40년 전 마을 주민들이 이 오름에 편백 7만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권송덕(61) 제주도 토종흑염소협회 회장은 “당시 오름 소유자가 골프장을 조성하려고 마을 주민들에게 일당 400원씩 주고 편백 7만 그루를 심게 했다”고 말했다. 권 회장은 2015년 고이오름을 포함해 주변 총 3만9800평가량을 매입했다. 고이오름 들머리에서 흑염소 13마리를 키우기 시작해 현재 3000마리를 키운다. 지난해 7월부터는 ‘토종흑염소목장’과 고이오름을 외부에 개방했다. 오전 10시~오후 5시 매시 정각 흑염소 먹이 주기 체험을 한다. 고이오름 둘레길도 만들었다. 짧은 길은 20~30분, 긴 길은 35~40분 코스다. 편백을 다듬고 남은 가지와 껍질을 잘게 잘라 숲길에 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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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오름으로 가는 성팍안 탐방로. 김선식 기자

오름 정상까지 왕복 약 30분을 걸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발을 편히 내려놓았다. 물기 묻은 시원한 향기와 나무껍질 밟는 푹신한 감촉, 가끔 지저귀는 새 소리에 집중했다. 군더더기 없는 숲이야말로 숲에 몰입하게 한다. 고이오름이 그렇다. 숲길엔 길잡이 구실을 하는 한 가닥 줄과 쉬어갈 수 있는 통나무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다. 숲에선 자생하는 노루 떼 10마리가량이 가끔 눈에 띈다고 한다. 전망대에선 서귀포 시내와 남쪽 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인다. 내려가는 길, 하늘을 올려다보니 높이 뻗은 편백이 울창하다. 편백 잎이 숲길에 지붕을 씌웠다. 다음엔 비 오는 날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제주 우중 여행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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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장굴 : 제주시 구좌읍 만장굴길 182(전화 064-710-7903). 매달 첫째 수요일 휴관한다. 입장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10분. 입장료 4000원.(성인 기준)
  2. 빛의 벙커 :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039-22(전화 1522-2653). 입장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4~9월 기준) 입장료 1만5000원(성인 기준)
  3. 사라오름 : 성판악 탐방로 들머리 주소는 제주시 516로 1865.(전화 064-725-9950). 성판악 탐방로 입산 시간은 새벽 5시~오후 1시.(5~8월 기준) 성판악 매표소에서 입장료는 무료, 주차비는 1800원(일반 승용차 기준)이다.
  4. 고이오름 :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산 14.(전화 064-805-5099) 입장 시간은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료 8000원.(성인 기준)
  5. 식당 : 구좌읍과 조천읍 일대에 제주도 거주민이 추천하는 갈 만한 식당으로는 비자림길(제주시 구좌읍 비자림로 2682/064-782-5118/흑돼지 정식 8000원), 금보가든(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639/064-782-7158/흑돼지 두루치기 8000원 원조교래칼국수(제주시 조천읍 비자림로 645/064-782-9870/보말 전복 칼국수 9000원) 등이 있다. 성산읍에는 고성장터국밥(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동서로45번길 19/064-783-3233/몸국 7000원), 가시아방국수(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528/064-783-0987/고기국수7000원) 등이 있다. 남원읍에는 뙤미(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86/064-764-4588/제주산 찹쌀 순대국밥 8000원), 동선제면가(서귀포시 남원읍 태위로 3/064-764-5555/재료 소진 시 조기 마감/흑돼지 고기국수 8000원) 등이 있다. 서귀포 시내 화정식당(서귀포시 중앙로 47번길 24/064-762-1001)은 갈치·향토 음식 전문점이다. 갈칫국 1만3000원, 갈치조림(2인분 이상) 2만원. 한동네(서귀포시 동부로 4/064-732-4573)는 메밀 뼈국 8000원, 보말 성게 칼국수 1만1000원. 바당국수(서귀포시 중앙로48번길 43/064-733-9259)는 고기국수 7000원, 돔베고기 1만5000원.),
  6. 숙소 : 인근 숙소는 빨간풍차펜션(제주시 구좌읍 김녕남2길 36/010-6425-1645), 라마다함덕호텔(제주시 조천읍 신북로 470/064-793-5500), 브라운 스위트 제주 호텔앤리조트(서귀포시 성산읍 고성오조로 94/064-786-6200), 예이츠산장(서귀포시 남원읍 516로 918/064-767-3746) 등이 있다.
  7. 다른 여행지 : 제주도 공식 관광정보 포털 사이트 ‘비짓 제주’(visitjeju.net)는 제주 문화와 역사, 관광지, 음식점, 숙박, 쇼핑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누리집에선 비 오는 날 가기 좋은 제주 명소로 ‘절물자연휴양림’(제주시 명림로 584/064-728-1510), ‘비자림’(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55/064-710-7912), ‘북촌 돌하르방공원’(제주시 조천읍 북촌서1길 70/064-782-0570), ‘사려니숲길’(제주시 봉개동 산 64-1/064-900-8800), ‘김영갑 갤러리’(서귀포시 성산읍 삼달로 137/064-784-9907)를 제안한다.

제주/글·사진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