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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ESC

허리 긴 당신, 올여름 티셔츠는? 짧게 더 짧게!

by한겨레

숨바꼭지·방탄꼭지 등 기상천외한 니플밴드

여름철 필수 패션 아이템 된 지 오래

하지만 요즘엔 오버사이즈 티셔츠가 더 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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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고 색이 화려한 셔츠는 발랄해보인다. 게티이미지뱅크

2년 전쯤 생긴 취미가 있다. 기분이 울적할 날 온라인 오픈마켓에 접속해 니플밴드(옷 위로 유두의 윤곽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붙이는 스티커 형태의 제품)의 제품명을 찾아보는 것이다. 작명 센스에 감탄했던 제품명 몇 개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숨바꼭지, 방탄꼭지, 앙젖꼭띠, 찌못미. 제품명만큼이나 놀라운 것이 어마어마한 판매량이다. 그러니 시중에 이토록 다양한 니플밴드가 출시된 걸 거다. 필자는 이중 ‘하우두유둘’이라는 제품을 골랐다. 이름뿐만 아니라 접착력, 지속력, 크기, 컬러 등이 적당하다는 리뷰와 사진 후기를 보고 선택했다. 정말이지 사진 후기는 오랫동안 잊지 못할 거다.


니플밴드는 최고의 여름 발명품이지만 논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젖꼭지는 숨길 필요 없는 신체 부위라는 지적부터, 니플밴드를 자주 사용하면 피부에 발진이 생길 수 있다는 의학적인 관점, 옷을 벗어야 하는 상황에서 민망한 경우가 생긴다는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 대한 언급도 있다. 필자 역시 이 밴드를 사긴 했지만 붙이지 않는 쪽으로 노선을 정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고, 안 붙일 수 있다면 붙이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품이 낙낙한 티셔츠를 찾기 시작했다. 찾지 못했을 때는 한 사이즈 큰 제품을 사서 길이만 줄여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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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플밴드 ‘하우두유둘’. 온라인 쇼핑몰 화면 갈무리

다행히 요즘은 오버사이즈 티셔츠가 인기라서 선택지가 다양해졌다. 특정 유행의 경향을 파악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스파브랜드(패션 제품의 기획, 생산, 유통의 전 과정을 직접 맡아 관리하는 패션업체의 상표)가 어떤 제품을 내놓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현재 여러 스파브랜드 온라인 매장에 접속하면 티셔츠 카테고리에 ‘오버사이즈’라는 하위 카테고리가 있다. 라지(L) 사이즈 기준 일반 티셔츠의 가슴 단면 너비가 53~54㎝이지만, 오버사이즈 티셔츠의 가슴너비는 60㎝ 남짓 된다. 이쯤 되면 가슴을 일부러 내밀어도 유두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정도다. 다른 스파브랜드인 지오다노와 스파오에서도 ‘오버핏’이나 ‘루즈핏’처럼 품이 넓은 티셔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국내 최대 패션 플랫폼인 무산사에서도 ‘릴렉스 핏 티셔츠’(정확한 제품명은 ‘무신사 스탠다드 릴렉스핏 크루넥 반팔티셔츠’)의 구매 후기가 7만개가량 달려 있다. 다른 티셔츠보다 확연히 높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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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이 낙낙한 무신사 ‘스탠다드 릴렉스핏 크루넥 반팔 티셔츠’. 무신사 제공

7만개의 후기는 무신사의 탁월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티셔츠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긴 생각해보면 구두를 안 신는 남자, 치마를 안 입는 여자는 봤어도 티셔츠를 거부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티셔츠 대신 셔츠만 입는다는 남자들도 집에서는 대부분 티셔츠를 입고 생활한다. 집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 채우기도 빡빡한 셔츠 단추 여러 개를 끼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러니 앞서 한 이야기를 수정해야겠다. 패션계의 여름 최고 발명품은 니플밴드가 아니라 반소매 티셔츠다. 그렇다면 티셔츠는 언제 처음 등장한 걸까?


복식사를 들춰보면 티셔츠의 등장이 비교적 근래의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티셔츠의 조상은 원피스 형태의 속옷인 ‘유니온 슈트’(Union Suit)다. 심지어 소재는 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허리 라인을 경계로 위아래가 분리되고 소재 역시 울에서 면으로 대체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티셔츠가 등장하는 건 20세기 초 미 해군이 군복에 사용하면서다. 이때까지만 해도 티셔츠는 군복 안에 입는 속옷이었다. 셔츠 안에 입는 옷이라고 하여 언더셔츠(Undershirt)라고 불렀다. 하지만 덥고 습한 환경에서 복무했던 미 해군은 군복을 벗어 던지고 티셔츠 차림으로 지내는 경우가 늘어났다. 실용적이었던 이 복장은 노동자 계급으로도 금세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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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로셔츠의 단추를 풀어 입으면 목이 길어보인다. 바버샵 제공

‘티셔츠가 속옷’이라는 개념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이다. 티셔츠가 편하고 실용적이라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티셔츠 차림으로 거리에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이것은 전 세대의 복식 규칙을 무시하는 처사였으므로, 종전 후 미국 사회를 뒤덮은 기성 문화에 대한 반발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런 경향의 반영이자 기름을 부은 것이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A Streetcar Named Desire·1951)였다. 이 영화에서 말론 브란도는 땀에 흠뻑 젖은 티셔츠 차림으로 남성성을 어필했고, 이런 그의 모습이 10~20대에게 폭발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근육질 몸과 그 윤곽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티셔츠의 이미지는 70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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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의 말론 브란도. 수입사 제공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가슴 근육을 키우라고, 어깨 운동을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우리는 현재 ‘근육이 남성성의 상징’이라거나 ‘남성성은 여성성과 구분되는 어떤 것’이라는 믿음에 의문을 던지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티셔츠를 비롯해 옷을 사서 입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게 브랜드의 이름값이나 가격표보다 훨씬 중요하다. 어깨가 좁고 배가 많이 나온 사람이 말론 브란도가 입었던 꽉 끼는 티셔츠를 입으면 코미디언처럼 보이고, 목이 짧은 사람이 폴로셔츠를, 그것도 깃까지 세워 입으면 닌자거북이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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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부분에 깃이 있는 티셔츠는 목이 짧은 사람이 입으면 답답해 보일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부끄럽지만 필자의 신체적인 특징을 이야기하면 목과 허리가 길다. 그래서 티셔츠를 고를 때 브이넥 티셔츠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 옷을 입으면 가뜩이나 긴 목이 더 길게 보여서다. 필자와 달리 목이 짧은 게 콤플렉스라면 브이넥 티셔츠나 목둘레가 넓은 옷을 입길 권한다. 그래야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긴 허리는 길이가 짧은 티셔츠로 커버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체형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가늠할 때 실제 신체 길이를 측정하는 게 아니라 입고 있는 옷의 비율로 판단한다. 길이가 짧은 옷을 입으면 실제로 허리가 약간 짧아 보이는 착시 효과가 있다. 혹 허리가 짧아 고민인 이들에게는 길이가 긴, 세로줄 무늬 티셔츠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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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오롱스포츠에서 생산하는 여름용 기능성 티셔츠. 코오롱스포츠 제공

지인들에게 티셔츠를 짧게 입는다고 말하면 “그럼 앉을 때 속옷이 보이잖아?”라는 질문이 꼭 돌아온다. 그럼 필자는 답한다. “그게 정 신경 쓰이면 짧게 입으면 안 되지.” 이 질문이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던 ‘자신을 파악하는 일’에 체형만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성향이나 기질, 환경 등이 두루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줘서다. 예를 들어 ‘돌출된 유륜(젖꼭지 둘레에 있는 동그란 부분)’이라는 신체적인 특징과 그럼에도 니플밴드를 붙일 수 없다는 기질이 상충하는 남자에게는 오버사이즈, 그것도 원단이 두꺼운 티셔츠를 추천한다. 원단이 얇을수록, 원단의 신축성이 높을수록 신체의 굴곡이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시중에 나온 수많은 기능성 티셔츠, 즉 땀이 금세 마른다고 광고하는 티셔츠들이 여기에 속한다. 마블의 팬이라는 취향을 가진 사람과 소개팅을 해야 하는 환경에 놓인 이라면 어떨까? 뭘 고민하시나. 소개팅하는 날만이라도 아이언맨 티셔츠가 아닌 다른 티셔츠를 입고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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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가 있는 티셔츠는 유행을 타지 않아 오래 입을 수 있다. 이스트로그 제공

농담이지만 동시에 그저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티셔츠에 특정 내용이 있으면 본인 의도와 별개로 상대방은 어떤 정보를 읽는다. 포털 사이트에 ‘티셔츠 논란’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결과 대부분이 ‘프린트’, 정확히는 문구에 집중돼 있다. 욕설이 적힌 티셔츠가 본인에게는 위트일 수 있지만, 누군가를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욕설뿐 아니라 사회·정치적으로 예민한 이슈와 성적인 멘트 역시 조심해야 한다. 그런 말을 입에 담은 것도 아니고 하물며 프린트를 직접 한 것도 아니지만, 그 옷을 입고 다니는 순간 이에 동조하거나 전파의 의지가 있다고 읽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의 추천은 아무런 문양이 없는 무지 티셔츠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반소매 티셔츠는 세탁을 자주 해야 하기에 수명이 대체로 짧고 이 때문에 구입 용이성이 아주 중요하다), 유행도 안 타니까. 만약 너무 심심하게 느껴지면 줄무늬 티셔츠나 왼쪽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티셔츠를 선택하면 된다. 특히 밥 먹을 때 마스크를 주머니에 넣을 수 있는 주머니 티셔츠는 요즘 같은 시기에 꽤 유용하다.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