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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20년 만의 역전극…배신자와 로맨티시스트의 뒤바뀐 처지

by한겨레

[토요판] 남지은의 토요명작 리플레이


② 청춘의 덫


“당신 부숴버릴 거야” 대사로


지금까지 수없이 변주·패러디


요즘 청년 초상, 여성의 연대


시대 변하며 새로운 해석 불러


강동우 역 배우 이종원 인터뷰


“엔지 내고 나한테 화나 울 만큼


대본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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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부숴버릴 거야!” 이 한마디로 설명이 다 되는 드라마, 바로 <청춘의 덫>이다. 1999년 1월27일부터 4월15일까지 24부작으로 <에스비에스>(SBS)에서 방영했다. 당시로서는 이보다 더 저주스러운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배신당한 여자의 한을 처절하게 표현한 대사가 화제였다. 지금까지도 “너를 부숴버릴 거야”(<역전의 여왕>), “장가 내가 다 부숴버릴 거야”(<이태원 클라쓰>) 등 다양하게 변주되며 드라마 속 대사로 패러디되고 있다. “부셔버릴 거야”가 아니라 “부숴버릴 거야”가 바른 표기라며 명대사 바로잡자는 글도 눈에 띈다.


어쨌든 수많은 이들이 곳곳에서 “부숴버릴 거야”를 외칠 때마다 이 사람은 섬뜩하지 않았을까. 대사를 너무 찰지게 내뱉는 ‘서윤희’(심은하) 얼굴을 반복재생하느라 우리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이 남자를 잊고 있었다. 9회 등장한 이 장면의 유튜브 조회수만 20만, 하도 부서져 이제는 뼛가루도 안 남았을 것 같은 ‘강동우’를 연기한 이종원이다. 당시 살벌한 경고를 눈앞에서 들었던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종원은 지난 16일 <한겨레>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심은하씨가 너무 맛깔나게 잘 말했죠. 하하하.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감탄했지만, 부서지고 말고 느낄 새가 없었어요. 그 대화에서 중요한 건 나를 부숴버리겠다는 게 아니라 혜림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되는 대목이었으니까요.” 이 드라마에 참여한 당시 관계자들(이하 ‘제작진’으로 통칭)은 최근 <한겨레>와 한 전화인터뷰에서 “촬영 당시에는 이 대사가 화제가 될 줄 몰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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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 한마디로 설명되는 드라마


혜림이. 바로 서윤희와 강동우의 네살배기 딸인 혜림의 죽음이 이 장면, 나아가 드라마 전개를 바꾸는 중요한 키였기 때문이다. <청춘의 덫>은 강동우가 결혼만 하지 않았을 뿐 사실혼과 다름없던 서윤희를 배신하고 재벌 딸 ‘노영주’(유호정)한테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복수 생각이 없었다. 서윤희는 강동우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며 그를 보내준다. 하지만 혜림이 놀이터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사망하고, 강동우가 ‘혜림이 위독하니 집으로 와달라’는 메시지를 무시하자 복수의 화신으로 변한다. 제작진은 “방영 초반에는 반응이 없었는데, 서윤희가 혜림이 죽고 나서 바닥을 기어 다니며 오열하는 9회 장면이 나간 뒤부터 시청률이 매회 4%씩 뛰었다”며 “아이를 잃은 엄마의 아픔에 시청자들이 크게 공감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1회 당시 기준으로는 저조한 16.8%로 시작해 마지막회 53.1%를 찍었다. 평균 시청률은 35.7%(서울·수도권 기준). 혜림의 죽음은 드라마 성공의 키로도 작용한 셈이다.


손꼽히는 명작이지만, 사실 처음에는 기대작이 아니었단다. 바람 피우고 복수하는 등의 내용이 파격적이기도 했고 세련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김혜수와 배용준이 나오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문화방송)와 맞붙었는데 다들 그게 더 잘될 거라고 했어요. 이 드라마는 망한다고. 방송사 내부에서도 반대가 심했죠.”(제작진)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심은하에 김수현 작가의 이름값을 생각하면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파격적인 설정이 부담스러웠는지 배우들도 고사했다는데, 심은하가 <엠>(M) 연출자에게 은혜를 갚는다며 출연한 덕분에 힘을 받았다고 한다. 강동우 역도 이병헌, 김민종이 거쳐 갔고 노영주 역도 유호정 이전에 고 장진영과 이승연이 먼저였다. 이승연이 불법 면허 취득과 관련해 자숙의 시간을 더 갖겠다며 1월5일 하차하면서 유호정이 촬영 전날 급박하게 투입됐다. 이종원도 처음에는 전광렬이 연기한 ‘노영국’ 역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그는 “결혼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김수현 선생님이 무서워서 피했다”고 웃으며 “감독님이 촬영이 임박해 다시 연락해 도와달라기에 동우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광렬-김민종-심은하-이승연 구도에서 김민종과 이승연이 빠지면서 두 사람이 투입된 것이다.


죄다 운명이었나 보다. 모두 찰떡같이 소화하며 이 드라마 이후 더 훨훨 날았다. ‘뽀글파마’를 유행시킨 유호정은 당찬 여자의 대명사가 됐고, 심은하는 이 드라마로 그해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전광렬은 로맨티시스트로 인기를 얻은 뒤 드라마 <허준>에 캐스팅돼 굵직한 배우가 됐다. 제작진은 “모든 배우들이 다 빠져들어서 연기했다. 촬영하면서 보고 있으면 그게 현실처럼 느껴져 자연스레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클로즈업 신이 많다”고 말했다. 특히 심은하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대사 하나 틀리지 않고 엔지도 안 냈다. 대사 하나가 20쪽이 되는 대본도 실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서로 윈윈효과도 낸 모양이다. 이종원은 “상대가 엔지를 안 내니 나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본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봤다. 2회 모텔에서 이별하는 장면에서 엔지를 두번 내고는 스스로한테 너무 화가 나 세트 밖에 나가 운 적도 있다”며 웃었다. 이후 김수현 작가가 <내 남자의 여자>에 캐스팅할 정도로 좋은 연기를 선보였지만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시청자들에게는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한다. “식당에서 밥 먹다가 쫓겨났고, 식당에 못 들어가기도 했어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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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놈’이 짊어진 삶의 무게


하지만 지금 보면 강동우는 좀 불쌍하다. <청춘의 덫>은 옛날 드라마 중에서도 요즘 보면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대표적인 드라마다. 당시에 아이와 여자를 버리고 돈을 택한 나쁜 놈의 대명사였지만 지금 보면 그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에 더 눈길이 간다. 1회부터 서윤희가 “(가족에게) 가슴 아픈 걸 왜 꼭 화내고 짜증 난 걸로 표현하냐”고 말할 정도로 그는 아등바등 사는 가족이 아팠고 그렇게 살아도 가난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현실에 지친 찰나 다가오는 노영주에게 서서히 끌려갔던 것이다.


2회 서윤희에게 이별을 통보한 이후 15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넌 내가 부모 형제도 귀찮아하는 놈인 줄 알겠지만 우리 아버지 어머니 평생 죽으라고 일해도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 염증 나. 다들 좋은 차 타고 잘 먹고 잘사는데 내 형제들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월급쟁이 뛰어봤자 벼룩이고 좀 나으면 개구리야. 언제 집 사고 그럴 수 있냐”(3회)는 강동우의 대사에서 계층이동 사다리가 끊어지고 금수저 아니면 서울에 괜찮은 집도 못 사는 요즘 3040의 절규가 느껴진다. 제작진은 “강동우는 장학금을 받고 토익 점수도 최고로 받는 등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었다는 점이 요즘 젊은이의 상황과 닮았다”고 말했다. 이종원은 “나도 그때는 이런 개 같은 사람이 있냐며 이해를 못했다”며 “시대가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1978년 원작 방영 당시에는 소재가 비윤리적이라며 50부작 중 20부까지 나간 뒤 조기종영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인간의 내면을 솔직하게 까고 간다는 점에서도 놀라운 작품이었다. 지금의 드라마 문법과도 비슷하다. 강동우는 물론 그의 가족들도 노영주가 아파트를 사주는 등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자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괴로워한다. 보통 드라마였다면 가족들이 나서서 노영주를 거부했을 것이다. “돈은 편하지만 마음은 괴롭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전 악인’도 없다. 복수를 다짐하며 ‘악녀’라 불리기도 했던 서윤희도 자신의 행동에 괴로워하다가 결국엔 복수를 포기한다. 모두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산다.


사랑에 충실해 자신을 던졌던 노영주도 다른 여자의 남자를 빼앗은 나쁜 여자처럼 보였지만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 오빠 노영국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한다. 특히 복잡한 가정사에 상처를 받고 자라며 “누구 앞에서도 떳떳한 게 소원이었다”는 노영주는 가난해도 당당한 강동우를 보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 새롭게 읽힌다. 지금 시선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다. 노영주가 강동우가 아이가 죽어도 가지 않았던 사실에 분노하고, 서윤희와 친구 안수연(김나운)이 “노영주 멋진 여자 같다”고 말하는 등 여자와 여자의 연대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혼은 법적으로 아무 효력이 없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듯한 대사도 눈에 띈다. 제작진은 “여성 캐릭터를 한번 더 나아가게 한 작품”이라며 “대본 200권을 찍어도 방송국 내 사람들이 다 훔쳐갔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이 대본을 보며 드라마를 공부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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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노영국’을 다시 보니


하지만 지금 시선에서 보면 불편한 부분이 은근 많다. 당시에는 로맨티시스트로 불리며 사랑받았던 노영국이 가장 불편한 존재인 점도 재미있다. 상무로 나오는데 그는 비서인 서윤희에게 ‘성추행’적인 발언을 일삼고 운전기사에게도 갑질 같은 행동을 아무렇게나 한다. 당시에는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표현이자 멋진 상사의 모습처럼 다뤄졌다. 서윤희에게 “갑옷 입은 수녀”라며 “지루하다”고 하는가 하면 “서 대리는 그렇게 싱싱하다고 볼 순 없지만, 그래도 꽤 이뻐 보이는 사람인데”(12회)라는 일상적 얘기들도 성추행적 발언이다. 비서에게 집안일을 시키고, 치매를 앓는 할머니의 수발을 들게도 한다. “숙녀가 내리면 냉큼 문부터 열어주는 것”(5회)이라며 운전기사의 이마를 때리는 등 지금 보면 재벌의 갑질이라 불릴 만한 행동도 등장한다. 상사와 비서 간 벌어진 성추행, 재벌가의 갑질 등 뉴스에서 종종 보던 주인공이 노영국일 줄이야. “하하하. 시대적 상황을 이해해주면 좋겠어요.”(제작진)


24회 마지막회에서 노영주와 강동우는 김포공항 커피숍에서 이별한다. 당시 스태프들이 이 장면을 촬영하며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청춘의 덫>을 회상하면서 그들은 다시 또 울컥했다.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가 손꼽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최고의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다시 없을 드라마를 지금까지도 사랑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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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 <한겨레> 문화부 기자. 언제든 옛날 콘텐츠를 다시 볼 수 있는 시대. 세대불문 되감기하면 좋을 대중문화 작품을 소개하려 한다. 연출, 연기, 이야기 기본 3박자에 충실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옛 작품들이 콘텐츠의 본질을 일깨운다. 지금 시선에서 새 해석이 등장할지도. 제작진과 배우들의 비하인드 코멘터리도 담아보겠다. 3주에 한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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