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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색연필 쥐면 고된 농사 피곤 풀리고 정신도 총총해지죠”

by한겨레

해남 농부화가 김순복씨


14년 전 남편 사별 뒤 홀로 농사

5년 전 딸이 준 색연필로 그림 빠져

농한기 주로 그린 작품 모두 300점

시화집도 내고 ‘한살림’ 농촌달력도


들판과 마을 일상 담은 33점으로

해남서 ‘속담으로 읽은 농촌 풍경전’

한겨레

해남 농부화가 김순복씨. 땅끝순례문학관 제공

“대화 중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속담을 새겨들었다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그려봤지요.”


지난 14일 만난 전남 해남의 농부화가 김순복(62)씨는 <속담으로 읽은 농촌 풍경전>에 내놓은 작품들의 탄생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오는 9월11일까지 해남읍 연동리 땅끝순례문학관에서 전시회를 여는 김씨는 유튜브에 올릴 영상 촬영을 마치고 한창 편집작업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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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 집에 문짝 없다’(김순복 작)

전시에는 농사를 지으며 만났던 들판과 마을의 소소한 일상들을 담은 가로 44㎝×세로 32㎝ 작품 33점을 선보였다. 농촌의 후덕한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너른 마당과 낮은 지붕,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소·닭·개·쥐 같은 동물들을 알록달록 색연필로 담아냈다.


“마을 분들이 ‘목수 집에 문짝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해요.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어요. 나중에 들어보니 ‘내 일은 않고, 남 일만 하는’ 착한 이웃을 빗대어 쓰더라고요.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따뜻하고 환해졌어요.”


김씨는 입말로 들은 속담 250여개를 적어놓았다. 이 속담 하나하나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도화지로 옮겨 담고 있다. 이번에는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 ‘광(곳간)에서 인심난다’, ‘노느니 염불한다’, ‘팥죽 단지에 생쥐 들랑거리듯’ 등을 내놓았다.


김씨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해남군 현산면 향교리로 시집왔다. 14년 전 남편 김종일씨를 여의고는 농사일을 혼자 도맡았다. 올해도 논밭 4만여㎡에 호박 양파 배추 등 9종의 작물을 가꾸고 있다.


“먹고 살아야 하니 늘 바빠요.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밤에는 앉은뱅이책상 위에서 그림을 그리죠. 좋아하는 일을 하니깐 색연필로 칠하고 있으면 피곤이 싹 가시고 정신이 총총해져요.”


김씨는 농번기에는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림을 구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농한기에는 3~4일에 한 점꼴로 작품을 매듭짓는다. 2015년 시작한 그림이 ‘고추 말리기’, ‘모내기’, ‘벼베기’, ‘시래기 삶기’ 등 벌써 300여점이 넘었다.


“어릴 때 그리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방바닥에 엎드려 노상 연필로 뭔가를 그렸지요. 어머니가 완강하게 말려서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어요. 못그린 게 한이 돼 시집갈 때도 이해해줄 사람을 찾았어요. 남편한테도 ‘그림을 좋아하느냐, 그려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서 ‘그렇다’는 반응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어요. 나중에 봤더니 남편은 고교 때 캔버스 받치는 삼각대(이젤)를 한번 펴봤을 뿐 완전 젬병이더라고요. (하하)”


그는 25살에 결혼해 해남으로 온 뒤 5남매 양육과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었던 시절을 보내느라 그림을 잊고 살았다. 2006년 금실 좋았던 남편을 떠나자 벼랑 위에 선 듯 막막했다. 세상은 온통 무채색으로 보였다. 상실의 아픔을 견디며 억척스러운 ‘청주댁’으로 10년의 세월을 견디었다. 단조로운 일상에 반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지난 2015년 2월 생일에 셋째딸 신애가 “엄마는 그림 그리는 할머니 되는 게 소원이었잖아”라며 선물을 내밀었다. 72색 색연필과 스케치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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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곳간)에서 인심난다’(김순복 작)

“처음엔 달력 그림, 신문 사진을 베끼며 연습했지요. 그러다 해남의 산과 들이 들어왔어요. 풍경을 그리다 사람의 동작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동작을 세세히 잘 그리면 배경은 따라오더라고요. 이제는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로 그림을 채워가고 있어요.”


김씨는 3년 만에 해남 행촌미술관, 전남도 동부지역본부 등에서 전시를 했다. 농부화가로 입소문이 돌면서 광주 김냇과 갤러리, 서울시민청 미술관, 농협 농업박물관에 초청을 받았다. 한살림에서는 2017년부터 2년 동안 김씨 그림으로 농촌 달력을 만들어 800부 이상 팔았다. 김씨는 2018년 내친김에 시화집 <농촌 어머니의 마음>을 발간해 ‘소박하고 따뜻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색연필을 손에 들고 있으면 시름이 사라져요. 그림의 크기가 작아서 부족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니 살아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정진하려고요.”


땅끝순례문학관 이유리 학예사는 “농촌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 사람들의 서사를 찾고, 이야기에 상상력을 더해 빚어낸 과정은 한국화단에서 유례가 드물다. 자연과의 교감에서 나온 작품들이어서 전원화가 밀레의 그림처럼 보는 이를 편안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