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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언니들이 보여줬어, 나이 먹고도 즐겁게 살 수 있구나!

by한겨레

이중의 마이너리티 ‘나이 든 여성’

독보적인 댄스 가수 엄정화조차

예능 출연해 ‘불러줘서 고마워’

연령주의, 젠더 갭 이중고 앞에

퇴색되기 쉬운 여성의 전문성

강요된 전형적 역할 벗어던진

중장년 여성들 솔직담백한 삶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시즌2

이들의 도전 더 큰 응원 받기를

한겨레

문화방송 <놀면 뭐하니?> 의 새 프로젝트 ‘환불원정대’의 출발은, 한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여성 댄스 가수 엄정화가 자신을 불러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문화방송 유튜브 갈무리

이효리가 지나가는 투로 툭 던진 프로젝트 걸그룹 조합인 ‘엄정화-이효리-제시-화사’가 현실로 이뤄지던 날, 이효리와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엄정화는 사뭇 진지한 투로 말을 꺼냈다. “효리야, 만나면 얘기하려고 했어.” “뭘 또 심각하게….” 이효리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엄정화가 말을 이었다. “너무 고마워.” 긴장이 삽시간에 허물어지자 이효리는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난 언니 안 한다고 할까 봐, 이제 배우 (활동) 하시면 바쁘고 하니까.” 엄정화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문화방송(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의 새 프로젝트 ‘환불원정대’의 출발은, 그렇게 한국을 대표하는 독보적인 여성 댄스 가수 엄정화가 자신을 불러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때는 서른 넘은 여가수가 없었지”

절반쯤은 농담 섞인 엄살이겠지만, 나머지 절반은 떨어지지 않는 질문이 되어 계속 뇌리를 맴돈다. 거의 모든 후배 가수들이 롤모델로 꼽는 여성 가수 원톱 엄정화가 설 무대가 그렇게 없었을까?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크긴 하다. 2016년과 2017년 각각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 공개된 10집 <더 클라우드 드림 오브 더 나인>은 음악적 완성도나 장르의 다양함에서 2006년 발표된 9집 <프레스티지>에 비견할 만한 명반이었고, 타이틀곡 ‘엔딩 크레딧’은 그해에 발표된 트랙 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지만, 정작 그 곡으로 활동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평단과 팬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대중과 폭넓은 접점을 만들진 못했던 ‘엔딩 크레딧’은, 발표된 지 만 3년도 안 됐는데 벌써 유튜브에서는 ‘재발견’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날 좀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약간 가수로서 대중에게서 좀 멀어진 것 같은, 그런 외로움?” ‘엔딩 크레딧’으로 한국방송(KBS)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2018년, 그는 나이 들면서 여성 아티스트로서 느끼게 되는 외로움을 토로했다. ‘가수 엄정화’를 논할 때 사람들은 ‘배반의 장미’나 ‘포이즌’과 같은 전설적인 히트곡들을 남긴 과거의 엄정화를 주로 이야기했고, 그런 탓에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현역 엄정화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마치 동갑내기 선배 김완선이 쉬지 않고 2020년에도 새로운 곡을 발표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오직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나 1987년 <팍스 뮤지카> 무대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날, 말하다 말고 문득 울컥해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던 엄정화는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 기억해주세요. 저, 엄정화라는 가수예요.” 그것은 자신은 추억으로 박제될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앨범과 무대를 꿈꾸며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라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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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방송 유튜브 갈무리

“나는 스물일곱, 스물여덟 막 이때부터 이게 마지막이라고 계속 듣고 지나왔거든. 그때는 서른 넘은 (댄스) 여가수가 없었지.” 엄정화가 마주한 벽은 상대적으로 젊은 얼굴들을 선호하는 방송가의 뿌리 깊은 연령주의와, 여성이기에 겪는 젠더 갭이 더해진 이중고였다. 물론 한국의 연령주의는 남녀 구분할 것 없이 심각한 편이어서, 젊은 시절 아무리 근사한 활약을 했던 연예인이라 해도 나이가 들면 그에 맞춰 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을 강요당한다. 그런데 여기에 젠더 갭까지 더해지면 수행을 강요받는 역할이 더더욱 협소해진다. 한국에서 ‘더 이상 어리지 않은 여성’은 이중의 마이너리티였고, 그런 여성이 자신의 성적 매력을 과시하며 무대에 서는 건 민망한 일이라 여기던 시절을 엄정화는 온몸으로 뚫고 지나왔다.

모처럼 제대로 깔아준 ‘두개의 판’

없는 길을 만들며 걸어온 엄정화의 회고를, 그 길을 따라서 걷는 이효리가 받는다.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몰라요, 특히 저한테. 앨범 낼 때마다, 뭐 할 때마다 ‘맞아, 정화 언니도 했었지. 정화 언니가 그거 할 때 지금 내 나이였는데, 잘하셨잖아’ 이렇게 생각하면서.” 환불원정대는 단순히 세대별 여성 솔로 아티스트들의 컬래버레이션이 아니라, 여성 아티스트들의 활동 연한을 더 길게 확장하려는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간의 연대인 셈이다. 비록 가수로서 자기 주관이 뚜렷한 여성 솔로 아티스트들을 ‘센 언니’라는 키워드로 묶어놓고, 첫 화부터 의견 조율 과정을 ‘기싸움’으로 몰고 가는 접근 방식이 다 흡족하진 않지만, 그 아쉬움에도 환불원정대 프로젝트를 응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이와 성별에 따른 뻔한 역할모델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아티스트가 있어도, 방송이 그를 공들여 조명하며 기회를 주지 않으면 시도는 힘을 잃는다. 환불원정대 프로젝트는 방송사가 모처럼 제대로 깔아준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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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가 2020년 시즌2로 돌아왔다. 이 리얼리티 예능은 노년 여성에 대한 쉽고 무례한 편견을 우아하게 파괴한다. 한국방송 유튜브 갈무리

뻔한 역할모델을 거부하며 나이 먹는 여성들은 옆 방송사에도 있다. 2018년 끝내 해바라기집을 짓는 모습까진 담아내지 못한 채 끝났던 한국방송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가 2020년 시즌2로 돌아온 것이다. 혼자 살게 된 노년의 여성 연예인들이 남해의 전원주택에 모여 함께 살아간다는 내용의 이 리얼리티 예능은, 노년 여성에 대한 쉽고 무례한 편견을 우아하게 파괴한다. 혜은이의 이혼에 섣부른 위로를 하려 했던 이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행복을 말하는 혜은이의 모습에 놀라고, 어머니의 부재로 ‘엄마 집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고백하며 찾아온 이건주에게 박원숙은 “(엄마 집밥 먹고 싶었던 거면) 그럼 잘못 왔어”라고 잘라 말한다.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는 가정의 틀을 벗어난 개인으로서도 충분히 함께하며 행복을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저렇게 나이 들고 싶다는 마음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무조건 조용해지거나 욕망이 사그라들지 않는다. 문숙은 요가를 하고 훌라춤을 추며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즐거움을 보여주고, 김영란은 자신은 침대에 누워 남이 대령해주는 브런치를 먹어야 한다는 농담을 던지며 언니들 사이에서 막내로 예쁨받고자 하는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이 네명의 멤버는 ‘엄마’나 ‘할머니’라는 뻔한 역할을 수행하거나 그걸 의식하는 대신, 하루하루 자기 자신의 열망에 충실하게 산다. 노래를 가르쳐주겠다는 혜은이의 제안에 자신은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한다며 눈을 반짝거리는 김영란의 얼굴을 보라. 그 안엔 세상이 쉽게 상상하고 요구했던 노년 여성의 뻔한 얼굴 대신, 새롭고 흥미로운 도전을 앞두고 흥분한 이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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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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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유튜브 갈무리

상대적으로 더 보수적이고 점잖은 한국방송1에서 교양 프로그램으로 방송되던 시즌1과 달리, 한국방송2로 옮겨와 본격적으로 예능을 표방하고 방송되는 시즌2는 보다 더 자유롭고 활기차졌다. 짧은 호흡으로 편집되어 유튜브에 올라오는 클립 영상마다 프로그램을 즐겁게 보고 있다는 댓글들이 굴비처럼 줄줄 달린다. 그리고 그 댓글들을 두루 관통하는 정서는 선명하다. ‘나이 먹고도 즐겁게 살 수 있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먹고 싶다’가 바로 그것이다. 마치 엄정화가 앞서 나간 길을 바라보며 이효리가 용기를 얻은 것처럼, 먼저 뻔하지 않게 나이 먹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네 멤버를 보며 시청자들 또한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는 게 아닐까? 동시간대 터줏대감인 문화방송 <라디오스타>와 에스비에스(SBS)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맞붙어서도 호각의 시청률을 보여주는 건, 그 비전에 공감하고 위로받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증거이리라.


경제적으로나 사회 전반적으로 위축이 된 시기이기에, ‘환불원정대’ 프로젝트나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의 도전은 더더욱 귀하다. 사회가 그 활력을 잃고 위축되는 순간 타격은 마이너리티들에게 더 강하게 온다. 여성 노동자들이 먼저 해고되고,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역할’을 요구받았던 아이엠에프(IMF) 때에도 목격하지 않았나. 그렇기에 이런 시기일수록, 연령과 성별에 따라 강요되는 역할모델에 저항하며 자기 자신으로 서고자 하는 이들의 도전은 더 큰 응원과 지지를 받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시청자들의 이런 지지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방송국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