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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79살에도 스크린 누비는 나문희의 비결은?

by한겨레

‘오! 문희’ ‘수상한 그녀’ ‘아이 캔 스피크’ 감독 얘기 들어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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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 문희> 스틸컷.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호박고구마”(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낸 귀여운 할머니부터 미국 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강단 있게 증언하는 할머니(영화 <아이 캔 스피크>)까지, 천의 얼굴을 소화해온 ‘국민 할머니’ 나문희가 이번에는 ‘노인 액션’에 도전했다. 2일 개봉하는 영화 <오! 문희>에서다.


시골 노인 문희(나문희)는 손녀가 당한 뺑소니 사고의 유일한 목격자다. 하지만 치매 탓에 상황을 온전히 기억해내지 못한다. 경찰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아들(이희준)은 어머니와 함께 직접 범인을 잡으러 나선다. 그 과정에서 문희는 달리고, 높은 나무에 올라가고, 트랙터를 몰고 질주한다. 영화를 연출한 정세교 감독은 “트랙터 장면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하면 된다고 했더니 선생님께서 ‘감정 잡으려면 진짜로 해야지’라며 촬영 한 달 전부터 트랙터 운전 연습을 하셨다”며 “60년 경력에도 부단히 노력하시는 모습에 놀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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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 문희> 스틸컷.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1941년생으로 올해 만 79살인 나문희는 1961년 문화방송(MBC) 라디오 공채 성우 1기로 데뷔했다. 이후 연기자로 활동 폭을 넓혀 100편이 넘는 영화·드라마에 출연했다. 오랜 경력을 쌓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건 50대에 들어서다. 55살이던 1995년 한국방송(KBS) 드라마 <바람은 불어도>에 북한 사투리를 쓰는 80대 할머니로 출연해 조연임에도 ‘케이비에스 연기대상’에서 대상을 받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2006년 문화방송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귀엽고 코믹한 연기로 온 국민의 친근한 할머니가 됐다.


최근 들어선 스크린에서의 활약이 돋보였다. <수상한 그녀>(2014), <아이 캔 스피크>(2017), <감쪽같은 그녀>(2019) 등 상업 영화에서 잇따라 주인공을 맡으며 스크린에 부는 은빛 바람을 이끌고 있다. 특히 <아이 캔 스피크>로 대종상·청룡영화상·백상예술대상 등 그해 각종 여우주연상을 휩쓸며 70대 노배우의 저력을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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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계에선 나문희를 두고 친근하면서도 단단한 이미지를 지닌 노년 배우로서 독보적인 위치를 가진다고 평가한다. <아이 캔 스피크>를 연출한 김현석 감독은 “또래 배우가 몇분 계시지만, 평소 시장 사람들과 편하게 어울리다 나중에 ‘일본군 위안부’임이 밝혀진 뒤 당당하게 증언하는 옥분은 나문희 선생님밖에 할 수 없는 역이었다”고 강조했다. 정세교 감독도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나문희 선생님 아니면 이 영화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실제 자식과 손주 대하듯 하는 연기에서 진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지에 오르고도 연기에 대한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도 나문희의 힘이다. 정세교 감독은 “문희의 정신이 흐릴 때와 온전할 때를 어떻게 달리 보여줄지 고민이 컸는데, 선생님이 ‘치매 증상이 있을 때는 아이 같은 감성을 보여주면 어떨까?’라고 제안하셨다”며 “손녀가 좋아하는 시크릿쥬쥬 놀이까지 연습하시며 완벽한 연기로 제 걱정을 날려버리셨다”고 말했다. 그는 또 “연세 때문에 대본 외우기도 쉽지 않으실 텐데, 이를 극복하고자 촬영 전날 숙소에서 큰따님과 매번 리허설을 열심히 하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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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상한 그녀> 스틸컷. 씨제이엔터테인먼트 제공

<수상한 그녀>를 연출한 황동혁 감독은 온몸을 던지는 연기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말순이 사람들과 드잡이하는 장면을 찍을 때 연출자로서 욕심이 나서 테이크를 여러 번 갔는데, 선생님께서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몇 시간 동안 연기를 반복했다”며 “나중에 보니 멍까지 들었는데도 참고 묵묵히 해내신 거였다”고 존경을 표했다.


촬영 현장에서 늘 후배들과 스태프를 살뜰히 챙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김현석 감독은 “시장에서 촬영하면 선생님께서 중간에 슬쩍 먹을 걸 사 오셔서 나눠주시곤 했다”며 “친엄마·친할머니 같았다”고 떠올렸다. 황동혁 감독은 “촬영 전 어린 배우들을 모아 대본 리딩을 하면서 분위기를 잡아주시고, 끝나면 격려도 많이 해주셨다”며 “촬영 끝나고 스태프들에게 친할머니처럼 용돈 봉투까지 챙겨주셔서 다들 감동했다”고 전했다. 이런 모습은 지난 주말 방영한 문화방송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에서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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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 문희> 스틸컷. 씨지브이아트하우스 제공

이런 ‘친엄마·친할머니의 마음’은 스크린 너머 관객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여든을 앞둔 나이에도 스크린을 펄펄 누비는 나문희의 진정한 힘이다. ‘노배우는 죽지 않는다. 다만 농익어갈 뿐이다.’ 배우 나문희가 오늘도 증명해내고 있는 말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