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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토요판] 주명철의 프랑스 역사산책

‘태양왕’보다 부자였던 검찰총장 푸케의 몰락

by한겨레

(17) 보르비콩트성

루이14세 모친한테 충성 출세한 푸케

나라살림 총괄 재무총관 직위 이용

최고부자 돼 보르비콩트성 건축

정적 콜베르의 조사로 비리 나오자

루이14세 초대 화려한 잔치 벌이고

복권으로 다이아몬드 등 선물공세

기분상한 왕, 푸케 체포 감시 명령

재산몰수·종신형 받아 65살에 숨져

한겨레

엄청난 재산을 끌어모아 당시 왕궁보다 더 화려한 보르비콩트성을 지은 푸케의 초상화. 17세기 프랑스 화가 샤를 르브룅의 작품. 위키미디어

베르사유궁의 영감을 불러일으킨 곳, 국가 재정이 엉망인 시기에 가장 호화로운 공사를 벌인 곳, 17세기에 루이 14세보다 더 부자였던 푸케가 지은 보르비콩트성(Château Vaux-le-Vicomte)으로 가보자. 파리의 동역(Gare de l’Est)에서 프로뱅으로 가는 P선 기차로 베르뇌유 레탕까지 가서 매시간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타면 파리 동남쪽 60㎞에 있는 성까지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다. 또는 피라미드 광장에서 출발하는 관광버스를 타고 보르비콩트성과 그 남쪽 30㎞ 안에 있는 퐁텐블로성을 하루에 둘러보는 방법도 있다.


나는 30~40년 전에 보르비콩트성에 가보았다. 멀리서 성을 보면서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마구간부터 들렀다. 영화 <007 뷰 투 어 킬>에 출연한 샹티이성(Château de Chantilly)의 마구간도 직접 보았던 차에 둘을 비교하다가, 보르비콩트의 마구간에서 본 호화 마차들이 특별히 생각난다. 두 성의 마구간이 모두 최고 부자 귀족들의 소유였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오늘날 파리의 피라미드 광장 일대에 있었던 루브르궁의 마구간과 승마연습장의 웅장하고 호화로운 모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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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근교에 있는 보르비콩트성의 야경 모습. 루이 14세 때 검찰총장을 지낸 대부호 푸케가 지은 이 성은 베르사유 궁전의 모델이 됐다. 위키미디어

보르비콩트성의 본관 지하층부터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구경한 뒤에 마지막으로 건물 정중앙의 지붕을 뚫고 설치한 전망대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베르사유궁보다 작고 단아한 건물과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음에도 반나절만의 관람으로는 아름다운 정원의 분수와 조각상들을 찬찬히 보겠다는 용기를 내기란 어려웠다.


전망대로 올라가기 전에 지나면서 보았던 지붕밑의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중세부터 교회 건물을 하늘 높이 올리면서 지붕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에 고심했다. 그래서 석조건물의 천장 위에 목재를 삼각형의 구조로 연결하여 지붕을 튼튼하게 받치는 방법을 채택했다. 나는 17세기에 지은 건물에서 그 같은 구조를 직접 본 덕에,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 불이 났을 때 지붕밑의 ‘숲’(La forêt de Notre-Dame de Paris)이 홀랑 탔다는 말을 쉽게 이해했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12세기에 처음으로 그렇게 높은 건물을 지었으니 보르비콩트보다 훨씬 빽빽하게 목재 구조물을 짜서 지붕을 받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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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문양으로 조성한 정원 화단에서 바라본 보르비콩트성. 건물 남쪽에 넓고 반듯한 인공 정원을 조성했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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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비콩트성에서 바라본 정원. 화단과 분수, 숲이 서로 대칭적으로 배치돼 있다. 위키피디아

네덜란드 상선 약탈하는 사업 하기도

보르비콩트의 주인인 푸케는 1615년에 파리에서 태어나 20살에 파리고등법원 심리부 판사가 되었고, 35살에 파리고등법원 검찰총장이 되었다. 그는 30년 전쟁기의 경제적 낭비와 혼란을 겪는 틈에 루이 14세의 모후 안 도트리슈에게 충성하고 그 덕에 출세했다. 그는 1653년에 재무총관이 되어 나라 살림을 주물렀다. 그는 뒤로는 자기 이익을 챙기면서 겉으로는 자신과 아내의 재산을 저당 잡히고, 총리대신인 마자랭 추기경의 막대한 재산을 국가에 차용했다. 마치 국가재정난을 타개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연출했다.


브르타뉴 지방 선주(船主)의 아들인 푸케는 그 지방의 아름다운 섬 벨일(Belle-Isle)의 토지를 사서 요새화했다. 사람들은 그가 브르타뉴를 점령하고 그곳의 지배자가 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왕에게 고했다. 사실상 푸케는 사략선(corsaire·개인이 운영하는 해적선)을 운영하면서 네덜란드 상선들을 나포·약탈하는 사업을 했다. 푸케는 정적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보(Vaux)에 건축가 루이 르보, 화가 샤를 르브룅, 정원사 앙드레 르노트르를 고용해서 1656년부터 1661년까지 성을 지었다. 당시 왕이 소유한 생제르맹과 퐁텐블로의 별궁보다 푸케의 보르비콩트성이 훨씬 화려하다는 평을 들었다. 18세기에 볼테르는 정원사 르노트르가 보르비콩트의 정원을 가꾸는 데 1800만리브르(금 3만7500톤)를 썼다고 말했다.


이제 장바티스트 콜베르가 등장할 차례다. 1619년에 랭스에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난 콜베르는 스스로 13세기 스코틀랜드 귀족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찍부터 과학과 공예에 관심을 가졌고, 상업으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했다. 훗날 그는 ‘콜베르주의’(colbertisme)라는 중상주의 정책을 채택했다. 그는 일꾼의 임금을 낮게 책정해 사치품을 싸게 수출함으로써 수입을 막고, 상단(商團)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1648년에 전쟁부에서 일하던 장바티스트 콜베르 드 생푸앙주는 사촌동생인 장바티스트 콜베르를 전쟁대신 르텔리에에게 천거했다. 1651년에 르텔리에는 콜베르를 총리대신 마자랭 추기경에게 소개했고, 그때부터 콜베르는 추기경의 재정을 담당했다.


마자랭 추기경은 뱅센성에서 1661년 3월에 숨지기 전에 왕에게 콜베르를 천거했다. 왕은 오래전부터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으로 이자를 갚는데도 해마다 나랏빚이 늘어나는 현상을 기이하게 생각하던 차에 콜베르에게 푸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5월에 콜베르를 재무장관에 임명했다. 콜베르는 상관인 푸케의 비리를 보고하고 해임을 상주했다. 대다수의 신하가 푸케의 사치에 분노하면서 콜베르의 편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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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케의 부정을 폭로해 그를 몰락시킨 이는 훗날 재무장관을 지낸 콜베르였다. 콜베르(중앙 검은 옷)가 루이 14세(의자에 앉은 이)에게 왕립 과학아카데미의 회원들을 소개하는 모습. 17세기 화가 샤를 르브룅의 작품. 위키피디아

‘검찰총장직 사임’은 콜베르의 꼬임

1661년 8월17일에 푸케는 보르비콩트성에 루이 14세를 초대했다. 이날 3시쯤 퐁텐블로성에서 출발한 왕 일행은 저녁 6시에 푸케 부부의 안내를 받으면서 화가 르브룅이 화려하게 꾸민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르브룅은 푸케의 상징인 다람쥐와 태양을 사방에 배치해서, 푸케의 좌우명인 “내가 오르지 못할 곳이 어디인가?”(Usque non ascendam)를 과시했다. 태양이 하나뿐임을 잘 아는 루이 14세가 그 사실을 인정할 리 없었다. 실제로 루이 14세는 1662년부터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모든 것 위에 있는”, “나는 온 세상을 충족시키기 적합하다”라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좌우명(Nec pluribus impar)을 채택했다.


루이 14세는 밖으로 나가 푸케가 마련해준 작은 마차를 타고 운하, 분수, 폭포와 조각상을 감상했다. 파리의 튈르리(튀일리)궁 정원사 가문에서 태어난 르노트르의 작품이었다. 르노트르는 샹티이성, 베르사유궁의 프랑스식 정원을 설계했다. 꽃을 자연스럽게 가꾸는 영국식 정원보다 기하학적 문양의 대칭성을 강조하는 프랑스식 정원은 인위적이며 단정하다.


루이 14세 일행은 건물로 돌아가 시종장 바텔이 차린 뷔페를 먹었다. 도미니크 미셸은 <바텔과 요리법의 탄생>(1999년)에서 바텔이 푸케의 신임을 받고 모든 일에 간섭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평가한다. 나는 지하층인지 1층인지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바텔이 루이 14세의 일행에게 제공한 대로 고증을 거쳐 재현한 음식상을 보았다. 울긋불긋한 색채의 화려함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손님들은 간식을 먹으면서 쉬고 난 뒤에 밖으로 나가 극작가 몰리에르(본명 장바티스트 포클랭)가 푸케의 주문을 받고 새로 쓴 작품을 감상했다. 몰리에르는 발레를 좋아하는 왕을 위해 발레극(Les fâcheux, 이 제목을 우리말로 옮길 자신이 없다)을 써서 작곡가 륄리의 곡을 받아 무대에 올렸다. 한 달 전에 파리의 극장에서 공연한 연극으로 이름을 날린 몰리에르가 왕을 위해 작품을 처음 썼듯이, 륄리도 왕에게 첫인상을 깊이 심어주었다. 그 후 ‘두 명의 장 바티스트’(deux Baptiste, 몰리에르와 륄리)의 활약상은 제라르 코르비오의 영화 <왕의 춤>(Le Roi danse)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극이 끝난 뒤, 푸케는 로토(loto·복권)를 실시하여 손님들에게 다이아몬드, 보석, 과자를 아낌없이 제공했다. 루이 14세는 푸케의 호화로운 은식기와 호화상품이 걸린 로토에 몹시 자존심이 상해서 푸케를 당장 체포하려 했지만, 모후인 안 도트리슈가 남의 호의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법이라고 설득하는 바람에 참았다. 그는 본관 건물 위로 쏴대는 불꽃놀이까지 즐기고 새벽 3시에 퐁텐블로성으로 돌아갔다.


푸케는 정적들에게 이겼다고 생각했고, 마자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콜베르는 푸케를 제거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기소권을 가진 검찰총장은 수많은 단심제 법정을 소집할 수 있었는데, 푸케에게 그 직책을 내려놓으면 왕이 훈장을 줄 것이라고 설득했다. 당시에는 매관매직 제도가 있었다. 왕은 재정상 이유로 관직을 팔았는데, 이러한 관직은 재산권이었기 때문에 왕도 함부로 파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콜베르는 푸케에게 검찰총장직을 다른 이에게 넘기면 훈장이 수여될 것이라고 유혹했다. 결국 푸케는 140만리브르(금 2916톤)를 다른 이에게 받고, 검찰총장직을 내려놓았다. 며칠 뒤, 왕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낭트로 출발했다. 푸케는 몸살을 앓으면서도 수행했고, 수많은 음모를 경계하라는 측근의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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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비콩트성의 도서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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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비콩트성의 방들 중 하나인 뮤즈의 방. 위키미디어

반역죄까지 뒤집어쓴 푸케

1661년 9월5일에 그는 낭트에서 두 시간 동안 왕을 알현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루이 14세는 근위대 총사(화승총을 소지한 병사) 다르타냥(d’Artagnan, 샤를 드 바츠 드 카스텔모르)에게 푸케를 잡아 밀착 감시하라고 명령했다. 다르타냥은 숙소를 덮쳐 푸케를 체포한 뒤 앙제성, 앙부아즈성, 뱅센성을 거쳐 이듬해 6월 파리의 바스티유 요새 감옥으로 호송했다.


대법관 세기에의 법정에서 푸케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자, 푸케는 “괴상하고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받아쳤다. “반역죄란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의 성문을 주군에게 열어주지 않고 오히려 적에게 열어주는 행위입니다.” 푸케는 세기에가 프롱드 난에서 왕의 편에 서지 않았던 사실을 이렇게 꼬집었다. 2년의 정식재판을 끝내고 1664년 12월 판사 9명이 사형을, 13명은 재산 몰수와 귀양을 결정했다. 루이 14세는 무기징역으로 형벌을 재가했다. 푸케는 토리노 지방의 피뉴롤(Pignerol)에서 1680년 3월에 막대한 재산을 잘 쓰지도 못한 채 65살로 숨졌다.


우리는 17세기의 명소에서 ‘오링 이론’을 실감한다. 1986년 1월28일에 우주선 챌린저호는 ‘접합부’(O-ring)에서 연료가 샜기 때문에 발사 직후 폭발했다. 막대한 노력과 돈을 쏟아부은 사업이 사소한 부품 때문에 망했다. 그래서 최선의 성과를 얻으려면 부품 하나도 소홀히 하지 말라는 ‘오링 이론’이 생겼다. 정원사 르노트르, 건축가 르보, 화가 르브룅은 바로크 시대의 최선의 조합이었다. 그들 덕에 우리는 즐겁다. 민주화 시대에 ‘오링 이론’을 적용할 방법은 없을까? 깨어 있는 시민들이 고비용 저효율의 적폐를 청산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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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비콩트성의 정면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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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비콩트성을 묘사한 17세기 판화. 작가 미상. 위키피디아


▶ 한국교원대 명예교수. <바스티유의 금서>와 <파리의 치마 밑> 등 프랑스 사회 및 문화사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 역사가의 눈으로 해석한 <프랑스 혁명사> 10부작을 지난해 완간했다. 현대 민주주의를 개척해온 프랑스사를 장소와 인물 중심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격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