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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점액질 뿜어내는 선체로 선박 연비 높인다

by한겨레

[세상을 바꾸는 생각]


미끌미끌한 미꾸라지 피부의 점액 분비 구조서 착안

카이스트 연구진, 윤활 표면 고안해 물살 마찰 줄여

한겨레

카이스트 연구진이 물살 마찰력을 크게 줄일 수 있는 선체 표면의 윤활 구조를 고안해냈다. 픽사베이

물살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배는 물과의 마찰력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장거리 화물선은 운항 과정에서 유체 마찰로 잃어버리는 에너지만 해도 상당한 양에 이른다. 선박이 받는 전체 저항력의 60~70%가 물과 선체 사이의 마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마찰력을 줄이면 그만큼 선박의 연료 소비량을 줄일 수 있다. 오늘날 세계 전체 운송물량의 약 90%는 해상운송이 맡고, 해운업이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2.5%(연간 약 10억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선박 연료 소비 절감을 위한 신기술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은 상황이다.


카이스트(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과 성형진 교수가 이끄는 카이스트-포스텍 공동연구팀이 미역, 미꾸라지 등 피부가 미끌미끌한 해초와 물고기의 점액질 분비 메카니즘에 착안해 선체의 표면 마찰력을 줄이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동안 표면에 골을 내 기름을 주입하는 등 여러 마찰력 저감 기술이 선을 보였으나 생체의 점액 분비 구조를 모방해 항력을 줄이는 구조를 제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초와 물고기에는 흐르는 물과의 마찰을 줄여주는 점액질을 분비하는 세포가 있다. 성 교수는 "포항의 방사광 가속기로 미꾸라지의 점액 분비 구조를 들여다본 결과, 아래는 넓고 위는 좁은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며 이런 구조가 모세관 현상을 일으켜 점액질을 끊임없이 분비해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모세관 현상이란 액체가 중력 등 외부 힘의 도움 없이 좁은 관을 따라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모세관 지름이 충분히 작을 때 액체의 표면장력(응집력)이 작용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나무에서 뿌리가 빨아들인 수분이 줄기를 거쳐 꼭대기의 잎까지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이 모세관현상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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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선으로 촬영한 미꾸라지의 점액 저장-분비 시스템 사진(왼쪽)과 이를 모방한 연구진의 윤활유 표면 방출 장치 구조도. 둘 다 바닥은 넓고 위는 좁은 항아리 모양을 하고 있다. 카이스트 성형진 교수 제공

마찰력 18% 감소...선박 적용 땐 연료 절감 효과 클듯


연구진은 미꾸라지의 점액 분비 시스템을 모방해 윤활유를 방출하는 항아리 형태의 미세구멍을 만들어 실험했다. 구멍의 바닥과 목 부분 비율을 여러가지로 바꿔가며 실험한 결과 윤활유가 지속적으로 방출되면서 물과의 마찰력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구멍의 개방률(바닥 지름 대비 목 지름 비율)이 클수록 윤활유가 더 많이 방출되면서 선박의 표면을 따라 퍼져나갔다. 또 목 부분을 더 길쭉하게 늘려주면 윤활제가 표면에 조금 더 두텁게 퍼지는 효과가 있었다. 연구진은 실험 결과 마찰력이 약 18% 감소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마찰력이 줄어드는 만큼 선박의 연비는 좋아진다. 구멍 개방률 60%에서 마찰력 감소율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방법을 선박에 적용할 경우, 밖으로 배출된 윤활유가 바다를 오염시킬 수 있지 않을까? 성 교수는 이에 대해 생물의 점액 분비 조직처럼 윤활유도 아주 미세한 구멍을 통해 배출돼 표면을 덮기 때문에 생물에 해를 줄 만한 양이 바다로 흘러들어가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연구진이 실험에서 사용한 미세구멍의 지름은 불과 100나노미터(0.1마이크론=0.0001밀리미터) 정도였다. 연구진은 또 무해한 윤활유가 개발돼 있는 만큼 이런 윤활유를 쓰면 된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실험에서 사용한 윤활유는 듀폰의 크라이톡스(Krytox GPL 103)였다. 성 교수는 "한국에서도 홍합 추출물을 이용한 친환경 윤활유가 개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유체 역학에 바탕한 선체 표면의 윤활 원리와 최적 설계 구조를 밝힌 기초 연구다. 성 교수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번 연구를 통해 선체에 윤활 표면을 구현할 경우 얻을 수 있는 이점을 상당히 규명했다"며 연구 성과가 실제 선박에서도 구현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스트래스클라이드(Strathclyde)대의 지밍유안 교수는 과학전문지 `뉴사이언티스트' 인터뷰에서 "근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춘 연구"라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실험 결과를 실제 선박에 적용하려면 여러가지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링 측면에서 볼 때 윤활유를 주입한 표면을 이용해 대형 선박의 항력을 줄이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번 연구는 미국물리학회(AIP)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유체물리학' (Physics of Fluids) 9월15일치에 `항력을 줄이는 윤활유 주입형 미끄럼표면'(A lupicant-infused slip surface for drag reduction)이란 제목으로 실렸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 ▶곽노필의 미래창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