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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여성적인 꽃’ 아닌 ‘자기다운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by한겨레

43. 메리 모저, ‘조지프 놀리킨스의 초상’


“꽃 그림 그리도록 두자”

한정된 소재 강요한 평단

주류 장르 역사화 못 그리게

화가 의도와 달리 예술을

‘여성성 재현’ 국한해 해석

한겨레

조지아 오키프, <아이리스의 빛> , 1924년, 캔버스에 유채, 리치먼드 버지니아 미술 뮤지엄. ⓒ Georgia O’Keeffe Museum / SACK, Seoul, 2020

예술계에서 여성 화가의 성취가 섹슈얼리티에 갇히는 사례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여성 미술가는 내향적이며 표현 매체를 다루는 방식이 좀 더 섬세하고 미묘하다’, ‘여성 예술가는 가정 내의 삶이나 어린이 같은 소재에 매혹된다’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섬세하고 미묘하게 안료를 다룬 18세기 로코코 작가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는 남성 아닌가. ‘상남자’ 르누아르와 모네가 어린이와 가정 내의 삶을 그린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남성이 그린 그림은 그의 기질이나 체격과 연결하지 않으면서 여성들에겐 흔히 그런 잣대가 적용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여성의 ‘꽃 그림’이다.


프랑스의 미술평론가 레옹 라그랑주는 1860년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여성들은 그들이 늘 선호해왔던 그런 종류의 미술, 즉 꽃 그림을 그리도록 내버려두자. 불가사의하게 우아하고 신선한 꽃 그림의 경쟁 상대가 될 만한 대상은 우아하고 신선한 여성들 자신뿐이다.” 라그랑주의 말에 따르면 꽃 그림과 그것을 그린 여성은 서로 닮은꼴이며, 꽃 그림을 그린 여성 미술가는 그저 자신의 본성을 완수한 것일 뿐이다.


20세기의 대표적인 ‘꽃 그림 화가’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그런 평을 받았다. 또 라그랑주의 말을 뒤집으면 꽃 그림을 벗어난 여성 화가는 자신의 본성을 벗어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얘기였다. 영국의 화가 메리 모저(1744~1819)가 그런 비판의 당사자였다. 두 ‘꽃 그림 화가’가 겪은 일을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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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모저, <조지프 놀리킨스의 초상> , 1770~1771년, 캔버스에 유채, 예일대학교 영국미술센터

‘꽃 그림 화가’ 틀에 가두기

메리 모저는 1744년에 태어났다. 모저가 태어난 시대는 여성이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르기 어려웠다. 당시 ‘위대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상 기념할 만한 사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 기독교사, 신화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담은 그림인 ‘역사화’를 그려야 했다. 16세기 르네상스 시대부터 19세기까지 서양의 아카데미에서는 역사화를 미술 장르 중 가장 우월한 ‘그랜드 장르’로 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화는 인체를 정확히 묘사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인체를 잘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의 세세한 움직임도 잘 알아야 하고 해부학적 지식도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드 소묘’를 배워야 했지만 여성은 수업을 받을 수가 없었다. 여성이 남성의 벗은 신체를 보면 그릇된 욕망이 자극되어 교양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상대적으로 가치가 낮다고 평가됐던 정물화나 풍경화, 자수 같은 공예 예술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메리 모저는 그나마 행운이 따랐다. 모저의 아버지는 화가이자 칠보세공사였는데, 어릴 때부터 재능이 분출한 딸을 손수 ‘개인교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밑에서 ‘누드 소묘’ 실력을 착실히 쌓았건만 모저는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다. 모저에게 장려된 것은 여전히 ‘여성적인 꽃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도 잘 그렸던 모저는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다. 1758년 14살의 나이에 18살 미만 소녀들을 위한 ‘예술장려협회’에서 꽃 그림으로 상을 받았고 이듬해에도 은메달과 함께 상금(5기니)을 받았다. 모저의 꽃 그림은 1760년 예술장려협회에서 열린 런던 최초의 공공 미술 전시회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1768년에 창립된 영국왕립미술원 설립단원 중 여성은 두명이었는데, 모저가 그중 한명이었다. 승승장구였다.


이쯤 되니 다른 분야 도전도 해보고 싶지 않았을까. 모저는 정해진 수순처럼 ‘꽃 그림 밖의 장르’를 넘보기 시작했다. 1769년 왕립미술원 첫 전시회부터 1802년까지 모저는 총 36편의 작품을 출품했는데 그중 열다섯 작품이 역사화였고 초상화도 세 점을 선보였다. 그중 모저의 친구이자 조각가인 조지프 놀리킨스를 그린 초상화는 의미심장하다.


모저는 남성 누드 조각을 만들고 있는 놀리킨스를 그렸다. 즉 모저는 놀리킨스가 만드는 조각 작품 역시 그림으로 생생히 표현한 것이다. 이를 통해 모저는 자신 역시 인체를 정확히 묘사할 수 있는 해부학적 지식이 있으며, 꽃 그림뿐 아니라 고전적인 주제도 잘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그러나 ‘남성 누드를 그리는 여성’에게 향하는 미심쩍은 눈길은 여전했고 진지한 비평 역시 받지 못했다. 1789년 한 비평가의 말은 쐐기와 같았다. “모저는 꽃은 탁월하게 그린다. 다른 그림은 그리지 않아야 한다.”


한편 20세기의 ‘꽃 그림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원치 않은 관점의 비평에 시달려야 했다. 오키프는 1918년부터 1932년까지 200여점 이상의 꽃 그림을 그렸는데, 대체로 꽃 한송이를 클로즈업해서 이파리나 배경이 들어갈 여유가 없을 정도로 캔버스 네 모서리를 꽉 채워 그렸다. 1924년 작 <아이리스의 빛>이 대표적이다. 오키프는 확대한 꽃을 그린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꽃은 비교적 자그마하다. 너무 작아서 우리는 꽃을 볼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내가 보는 것, 꽃이 내게 의미하는 것을 그리겠다고. 하지만 나는 크게 그릴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놀라서 그것을 바라보기 위해 시간을 낼 것이다. 바쁜 뉴요커조차도 시간을 내어 내가 꽃에서 본 것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


그러나 곧 오키프의 의도와는 다른 비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에 처음 소개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심취한 뉴욕 대중에게 오키프의 꽃 그림은 주로 성적으로 에로틱하게 해석된 것이다. 주름진 꽃잎과 부드러운 색조로 물든 아이리스의 꽃잎은 여성의 성기로 해석됐고, 자신의 안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꽃의 모습은 오키프의 억압된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표현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오키프 자신은 이러한 해석을 단호히 거부했다. “당신은 나의 꽃을 보면서 꽃과 관련된 당신 자신의 연상을 마치 나의 생각인 것처럼 글을 썼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오키프는 관능성, 여성성, 또는 프로이트적인 해석을 되풀이하지 않는 비평가를 찾으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 비평가는 아예 “정신분석학자들은 우리에게 여자들이 그린 과일과 꽃은 아이를 원하는 여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아무래도 정신분석학자들이 옳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키프의 꽃 그림은 여성성 재현이라는 기존 해석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 ‘여성적’ 수식어의 함정

얼마 전 코로나19 퇴치에 ‘여성적 리더십’이 빛을 발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뉴질랜드, 대만, 독일 등 여성 지도자가 이끄는 나라가 상대적으로 성공적인 코로나 퇴치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도대체 ‘여성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궁금해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가 ‘부드러운 카리스마’, ‘엄마 같은 리더’라는 말을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그냥 일을 잘하면 잘한다고 평가할 일이지 굳이 ‘여성적으로 다르게’라고 판단해야 할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흑인적 리더십’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었던가? 마찬가지로 메리 모저와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도 그렇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은 ‘여성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저, ‘자기다운’ 그림을 그렸을 뿐이다. <끝>


이유리 작가 sempre80@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