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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인간의 팔뚝 혈관은 ‘지금 진화중’

by한겨레

출생 직후 사라지는 팔뚝의 정중동맥 보유율

19세기 후반 10%서 지금은 30%대로 높아져

한겨레

10명 중 3명꼴로 있는 팔뚝의 정중 동맥은 인간 소진화의 사례다. 픽사베이

다윈의 진화론은 환경 적응력이 좀 더 나은 형질을 갖고 있는 생물 개체들이 번식에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면서 이들의 형질이 후대로 전해지는 방식으로 진화가 진행돼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의 새로운 형질이 집단 전체에 확산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현재 어떤 진화 과정이 진행중인지를 가려내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인류한테서는 어떤 진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까? 호주 과학자들이 사람의 팔뚝 동맥에서 진화가 진행중이라고 볼 수 있는 증거를 발견했다.


출생 전 태아 팔뚝에는 손가락에 피를 공급해주는 3개의 동맥이 있다. 맥박 수를 잴 때 짚는 팔 바깥쪽의 요골 동맥과 팔 안쪽의 척골 동맥, 그리고 두 동맥 사이에 있는 정중 동맥이다. 이 가운데 팔과 손에 혈액을 공급하는 데 주된 역할을 하는 정중 동맥은 요골 및 척골 동맥이 발달하면서 점차 퇴화돼 출생 직후 대부분 사라진다. 대략 임신 8주 무렵부터 퇴화가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제 학술지 `해부학저널'(Journal of Anatomy) 최근호에 발표된 호주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출생 후에도 계속해서 정중 동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19세기 후반 이후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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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에 있는 3개의 동맥. 가운데 화살표 표시한 것이 정중 동맥이다. Credit: Prof. Dr. Hab. Maciej Henneberg, University of Zurich

소진화의 사례...80년 후엔 모든 사람에게 확산될 듯

연구진은 과거의 기록과 시신 분석을 바탕으로 18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선 정중 동맥 비율이 10%에 불과했으나,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 비율이 30%에 이른다는 걸 발견했다. 예컨대 2015~2016년에 사망한 51~101세의 호주인 78명 가운데 26명한테서 정중 동맥을 발견했다. 유병률이 33.3%나 된다. 이번 연구는 유럽 출신의 호주인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과거 남아공의 흑인과 백인, 말레이시아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비율이 나왔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연구진은 이는 호모 사피엔스 종이 새로운 생물학적 특성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연구를 이끈 호주 애들레이드 의대 마시에지 헨네버그(Maciej Henneberg) 교수는 보도자료에서 “이는 단기간에 일어나는 소진화 사례로, 정중 동맥은 우리가 여전히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지를 완벽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연구진의 일원인 플린더스대 테건 루카스 박사는 이런 정도의 인체 해부학적 변화는 진화 차원에서 볼 때 지난 250년간 가장 빠른 속도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이런 추세라면 지금 태어나는 사람들의 정중 동맥 유병률은 35%로 추정되며, 80년 후에는 모든 사람들이 정중 동맥을 가진 채 태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연구진에 따르면 정중 동맥 유병률이 50%를 넘기 시작하면 정중 동맥은 `예외'가 아닌 '정상'으로 간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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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 동맥은 임신 8주 이후부터 서서히 퇴화한다. 픽사베이

산모 건강 문제보다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일 가능성 높아

연구진은 이런 해부학적 변화는 자연선택의 결과로 정중 동맥 유지가 생존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정중 동맥이 살아 있으면 전체 혈액 공급량이 더 늘어난다. 연구진은 정중 동맥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나 임신 중 산모의 건강 문제를 원인으로 꼽았다. 즉 정중 동맥 퇴화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로 인해 손상을 입어 형질 발현을 하지 않았거나, 정중 동맥이 퇴화를 시작하기 전에 어떤 감염 같은 환경 요인이 작용해 퇴화의 진행을 중단시켰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한 세기 동안 보건위생 환경이 크게 개선돼 온 점을 고려하면 산모의 건강상 문제보다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연구진은 분석했다. 정중 동맥은 그러나 손목터널증후군 같은 의학적 합병증을 동반할 수도 있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인체 해부 구조에서 변화해온 것이 정중 동맥이 유일한 사례는 아니다. 연구진은 척추의 중앙 부분에 결함이 있는 잠재이분척추, 무릎 뒤쪽에 있는 작은 장딴지근머리종자뼈(파벨라) 등도 지난 2~3세기에 걸쳐 증가해 왔다고 밝혔다. 이런 해부학적 변화들도 자연선택 압력에 의한 소진화 과정의 일환일 수 있다고 연구진은 주장했다.


곽노필 선임기자 nop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