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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거친 나뭇결에 새겨진, 민중과 저항의 역사

by한겨레

[‘80년대 목판화 항쟁의 증언, 운동의 기억’전]

한겨레

광주항쟁 등 근현대기 우리 민족 수난사를 소재로 삼은 유근택 작가의 연작 판화 의 일부분. 항쟁기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손을 치켜들고 절규하는 군중의 모습을 단순한 선과 강렬한 명암 대비가 특징적인 화면으로 찍어냈다. 목판화 거장 케테 콜비츠의 작업을 연상시키는 이 연작 판화들은 2003년 에 같은 제목으로 실렸던 임철우 작가의 연재소설에 삽화로 들어갔던 목판화 250점으로 이뤄져 있다.

오직 검고 흰 것들만이 역사를 이야기한다. 목판 위에 흑백 명암으로 표현된 거친 나뭇결의 흔적이 이 땅에서 억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놓고 있다. 외침과 저항, 죽음과 삶, 슬픔과 희망….


중견 화가 유근택(55)의 2003년 연작 목판화 <우리 사이에 강이 있어>는 단순하면서도 날카로운 칼맛의 선으로 한반도 근현대 역사를 아로새겼다. 광주항쟁과 제주 4·3항쟁, 한국전쟁 당시 보도연맹 사건 등 울부짖거나 겁에 질린 민중의 원혼과 잔혹하면서도 묵묵한 압제자의 군상, 역사의 비극이 펼쳐진 산하와 바다의 유령 같은 과거 풍경이 판화 작업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더욱 특기할 만한 것은 이 연작이 2003년 한해 동안 <한겨레> 지면에서 파격적인 방식으로 펼쳐지며 수십만명의 독자와 만났다는 점이다. 임철우 작가가 같은 제목의 연재 소설(연재 뒤 <백년여관>이란 제목의 소설집으로 묶여 나왔다)을 실을 당시, 유 작가는 당일 연재 분량의 소설 텍스트에 해당하는 목판 이미지를 일일이 칼로 새기고 찍었다. 그렇게 일년 내내 무려 250점의 삽화를 만들어냈고, 이 삽화는 한반도 근현대사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또 다른 예술적 기록으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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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작 (1984). 이상호 작가는 짓눌린 인간군상의 먹먹한 표정과 눈빛 등을 특유의 표현주의적 필치로 묘사하며 80년대 한국목판화의 지평을 한차원 넓혔다고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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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등 근현대기 우리 민족 수난사를 소재로 삼은 유근택 작가의 연작 판화 의 일부분. 광주항쟁 희생자의 양다리를 들고 끌고 가는 당시의 충격적 사진을 목판화로 표현했다. 연작 판화 는 2003년 에 같은 제목으로 실렸던 임철우 작가의 연재소설에 삽화로 들어갔던 목판화 255점들로 이뤄져 있다.

목판화의 대중적 소통력을 새삼 입증한 유 작가의 기념비적인 연작이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 목판화의 수작들을 처음 망라한 기념비적인 전시에 나왔다.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별전 ‘메이투데이’의 일부로 전남 광주시 운천로 무각사 로터스갤러리에 차린 ‘80년대 목판화 항쟁의 증언, 운동의 기억’전이다.


이 전시는 광주항쟁의 비극을 태반으로 움튼 80년대 민중미술 운동 시기 핵심적인 작업 매체였던 목판화의 주요 수작을 한자리에 모았을 뿐 아니라, 유근택의 연작 목판화로 대표되는 2000년대 작업까지 포함한 최초의 기획전이다. 지난 6~7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광주비엔날레재단 특별전 ‘민주주의의 봄’의 일부로 소개됐던 광주항쟁 관련 목판화 50여점 컬렉션과, 인사동 나무아트에서 5월 광주 현장과 군사정권 폭압상을 새겨 찍은 1980~90년대 목판화 50여점을 따로 전시했던 기획을 합친 자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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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하 작 (1988). 엄혹한 시대현실을 상징하는 가시넝쿨을 배경으로 백기완 선생과 그의 어린 딸을 묘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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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형 작 (1984). 보기 드문 작가의 80년대 목판화 작품이다. 당시 광부들의 월급명세서 위에다 쪼그린 채 도시락 먹는 광부의 모습을 옮겼다.

목판화는 독특한 전파력과 제작의 용이성으로 독재 정권을 비판하는 선전 수단으로 쓰였고, 엄혹한 시대상을 표현하는 매체로 주목받았다. 전시장은 80년대 5월 광주의 해방구적 풍경을 형상화한 홍성담의 재기 넘치는 작업과 광주·전남 미술인공동체의 기록적 판화들, 80년 5월 직후 당시 광주 사람들의 공포와 우울을 표현주의적으로 담은 조진호의 작품, 80년대 중반 이후 본격 전개된 목판화 운동에 매진했던 여러 리얼리즘 작가들의 수작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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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열렸던 목판모임 ‘나무’의 전시포스터. 훗날 미술기획자이자 평론가로 활약한 이섭씨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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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수 작가의 목판화 (1987). 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열사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질 당시의 모습을 칼맛 나는 목판화로 표현한 이 작품은 장례식에 큰 걸개그림으로 재현돼 많은 시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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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진하, 이섭이 함께 작업한 인물역사판화 . 수십개의 격자형 틀 안에 간결하면서도 개성적인 선으로 묘사한 한국근현대사 주요 위인들의 얼굴을 보통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새겨찍어 당시 화단에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전시 성격상 광주의 참상과 군사 독재 정권의 폭압상을 직설적으로 고발한 작품이 주류지만, 잊혔던 또 다른 문제작을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1984~88년, 시대에 저항하는 민중의 단면과 불온한 시대상을 추상적인 선과 표현주의적인 묘사로 새롭게 승화시킨 이상호, 김진하, 이섭, 정원철 등의 인물 군상, 초상 판화, 전시 포스터 등은 유근택의 연작과 더불어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작품들이다. 걸개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최병수 작가가 찍어낸 이한열 열사의 목판화, 이제 한국 리얼리즘 화단의 최고봉으로 떠오른 황재형 작가가 월급명세서에 찍은 도시락 먹는 광부 목판화 등도 접하기 드문 판화사의 걸작들이다.


미술사적 의미가 지대한 목판화 명작 잔치지만, 그 정점이라 할 수 있는 87년·88년 민주화운동 현장의 대형 걸개그림들이 공간 문제로 빠진 것은 아쉽기 그지없다. 29일까지.


광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