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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탈진실의 시대’ 왜 리영희인가

by한겨레

리영희 10주기: 다시 돌아보는 삶과 정신

평생 암흑과 싸운 ‘실천 지성’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시대

‘자유인의 책임’ 다시 묻게 돼

한겨레

언론인 리영희(1929~2010) 창비 제공

‘탈진실의 시대’라고들 한다. 허위와 진실이 뒤섞인 시대, 진실을 파헤쳐 드러내려는 의지가 거짓의 비웃음을 사는 시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언론인 리영희가 온몸으로 통과한 20세기야말로 거짓이 진실을 모욕하고 허위가 사실을 능멸하던 시대였다. 진실을 찾아내 알리는 것이 범죄가 되는 시대였다. 어둠이 깊어서 끝이 보이지 않던 시대에 리영희는 몽매의 동굴을 향해 진실의 횃불을 들어 올렸다. 진실의 불이 밝을수록 거짓이 휘두르는 탄압의 강도도 높아졌으나, 리영희는 오라에 묶이고 창살에 갇혀서도 진실을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는 5일이면 그 진실의 전도자 리영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이성의 힘으로 거짓의 우상에 맞섰던 이 ‘거인’의 삶과 정신이 더욱 그리워지는 때다.


리영희의 삶은 한반도에 흉측한 상처들을 남긴 20세기 역사와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한복판인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난 리영희는 일제 군국주의의 광기가 극단을 향해 치닫던 19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입학했다. 1945년 해방의 감격은 며칠 가지 못했다. 미국과 소련의 점령정책으로 반도는 둘로 나뉘고 고향의 부모는 좌우 갈등의 혼란기에 남녘으로 내려왔다. 20세기 내내 분단과 독재에 맞서 싸웠던 한국의 다수 지식인처럼 리영희도 분단의 고통을 안은 월남민의 한 사람이었다. 1946년 리영희는 국립해양대학교에 입학했다. 무상으로 배움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다. 리영희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남북은 따로 정부를 세워 분단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폭력으로 해체하고 미군정 정책을 이어받아 일제 부역자들을 대거 등용했다. 친미파로 옷을 갈아입은 친일파는 나라를 극우·반공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뒷날 리영희는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한국 현대사가 뒤틀리게 된 가장 뼈아픈 원인이라고 썼다.


1950년 대학을 졸업한 리영희는 중학교 영어 교사직을 얻었으나, 곧이어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군 통역장교로 입대했다. 영시를 즐겨 읽던 문학청년 리영희는 최전선에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며 반전평화주의에 눈을 떴다. 죄 없는 민간인들이 군인의 총검에 죽어 나간 거창 양민학살은 리영희의 국가관을 흔들었다. 병사에게 돌아가야 할 식량을 빼돌려 뱃속을 채우는 군부의 끝도 없는 부패와 타락에 치를 떨었다. 리영희는 하루라도 빨리 군대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국가는 통역장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놔주지 않았다. 리영희는 1953년 휴전 뒤에도 4년이나 더 군대에 머물렀다. 통역장교로 복무하던 시기에 리영희는 제임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해 미국 고위 장교들의 통역을 하며, 한국인 모두가 우러러보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를 보았다. 미국은 한반도의 운명과 염원에 아무런 관심도 없는, 국가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제국주의 국가였고 한국군은 미국이 부리는 용병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계관의 대변화였다.


1957년 민간인 신분이 된 리영희는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인의 길에 들어섰다. 영어에 능통한 리영희는 외신부에 근무하며 세계 각처에서 벌어지는 제3세계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해방투쟁과 미-소 냉전이 가져온 국제관계의 변화에 주목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의 민주주의 탄압을 보다 못한 리영희는 한국 정치의 실상을 알리는 연속 칼럼을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했다. 파장이 자못 컸다. 1960년 학생혁명으로 민주 정부가 들어섰지만 1년 만에 박정희 군부 쿠데타로 다시 무너졌다. 한국 사회 전체가 다시 암흑천지로 바뀌었다.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사로 일터를 옮겼다. 그 직후 리영희에게 처음으로 필화사건이 닥쳤다.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남한과 북한을 함께 초청하고 남북의 유엔 동시 가입도 추진한다는 기사가 문제였다. 리영희는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한 달 남짓 구속됐다. 리영희 인생에 수없이 반복될 시련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진실을 묻어둘 수 없다는 리영희의 기자정신은 시련 속에서 오히려 더 굳건해졌다. 박정희 정권은 리영희의 글을 눈엣가시처럼 여겼고, 1969년 리영희는 조선일보에서 쫓겨났다. 그 뒤 다시 합동통신사로 돌아가지만 1971년 군부독재에 항의하는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또다시 직장을 잃었다. 이듬해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리가 난 것은 리영희에겐 피난처를 얻은 것과 같은 일이었지만, 그해에 한국 사회는 유신체제의 선포와 함께 철권통치의 어둠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리영희는 외신기자로서 획득한 예리한 촉수로 베트남 전쟁과 혁명 이후 중국의 변화를 관찰해, 그 진실을 계간 <창작과비평>과 같은 잡지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대다수 학자와 언론인들조차 베트남 전쟁을 ‘반공 성전’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싸움’으로만 알고 있었다. 베트남 민중의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이라는 본질은 철저히 은폐됐다. 온 국민이 박정희 정권의 거짓말에 속고 있을 때, 리영희는 국제관계 서적과 미국 의회 청문회의 방대한 비밀기록을 입수해 베트남 전쟁이 거대한 허구 위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 계기가 된 1964년 통킹만 사건부터가 미국이 날조한 것이었다. 1971년 베트남 전쟁에 관한 미국 국방부의 극비문서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되자 미국이라는 국가의 치부와 전쟁의 추악한 실상이 낱낱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베트남에 파병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진실을 감추는 데만 골몰했다. ‘펜타곤 페이퍼’가 폭로됐을 때, 미국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의 거짓말’이라는 장문의 글을 <뉴욕 리뷰 오브 북스>에 발표했다. 같은 시기에 리영희는 계간 <문학과지성>에 ‘강요된 권위와 언론 자유: 베트남 전쟁을 중심으로’를 발표하고 이어 잇따라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알리는 글을 썼다. 독재의 감시 아래 있던 리영희가 아렌트보다 한층 엄혹한 조건에서 글을 썼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겨레

언론인 리영희(1929~2010)

1974년 리영희의 첫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가 출간됐다. 이 책은 유신체제의 심장부에서 터진 지적 다이너마이트였다. 폐쇄 병동과도 같은 한국 사회의 굳게 닫힌 철문을 폭파하는 앎의 폭탄이었다. 국민의 눈을 가린 극우반공주의의 장막이 찢기고 그 사이로 빛이 들어왔다. 수많은 지식인·학생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국가권력이 오랫동안 심어놓은 신념체계가 통째로 깨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리영희를 교수직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리영희의 펜은 꺾이지 않았다. 1977년 중국 혁명의 실상을 밝히는 책 <8억인과의 대화>를 펴내고 이어 곧바로 유신체제의 우상을 부수는 이성의 망치와 같은 책 <우상과 이성>을 펴냈다. 책을 읽은 이들의 머릿속에서 반공이라는 우상, 미국이라는 우상, 박정희라는 우상이 무너졌다. 리영희에게 따라붙는 ‘사상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칭호는 이 책들이 일으킨 장대한 각성의 물결에 비추어볼 때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학생들과 지식인들에게 리영희는 진실을 보는 눈을 열어준 ‘사상의 은사’였고, 독재정권 쪽에서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펜과 두뇌를 격리해 놓아야 할 ‘의식화의 원흉’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977년 다시 리영희를 반공법 위반으로 끌고 가 혹독한 신문 끝에 구속하고 2년여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한번 터진 물길은 되돌릴 수 없었다. 출옥 뒤 리영희는 수많은 독자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리영희의 책을 읽고 세계관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경험했다는 고백, 책의 내용에 충격을 받아 ‘공포를 느꼈다’는 고백이 잇따랐다. 1980년대에 거세게 일어난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이야기할 때, 리영희의 책이 일으킨 물결을 빼놓고는 그 전모를 말할 수 없다.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만든 ‘한국 학생운동의 사상적 맥락에 대한 연구’ 책자는 대학생들이 영향을 받은 책 30권을 열거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였다. 이어 세 번째가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 네 번째가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이었고, 다시 다섯 번째가 리영희의 <우상과 이성>이었다. 리영희의 글은 학생운동과 변혁운동의 엔진이었다.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뒤 리영희도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시련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울의 봄을 짓밟은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학살 전야에 리영희를 다시 체포했다. 두 달 만에 풀려난 리영희는 광주의 참상을 뒤늦게 들었다. 분노로 더욱 날카로워진 리영희의 글에 정권은 거듭 체포와 구속으로 답했으나, 진실의 글쓰기는 멈춰 서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리영희는 국제관계 문제에서 한반도로 눈을 돌려 북-미 관계와 평화·통일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다. 나라의 민주화와 겨레의 하나 됨을 지향하는 <한겨레> 창간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1988년 5월15일 윤전기를 빠져나온 <한겨레> 창간호를 집어 든 ‘논설고문’ 리영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한겨레 창간 기념 북한취재기자단 방북 기획 참여로 리영희는 다시 구속돼 160일 만에야 풀려났다.


1988년 쓴 ‘남북한 전쟁 수행능력 비교연구’는 한국 사회에 또 한 번의 충격을 안겨주었다. 독재정권과 반공세력은 남한이 북한에 군사적으로 절대 열세에 있는 것처럼 선전해 국민을 ‘공포의 포로’로 묶어두고 독재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 리영희는 남한이 군사력에서 북한에 대해 우위에 선 지 오래됐음을 실증적 데이터를 통해 낱낱이 밝혔다. 그 시절 미신처럼 국민의 의식에 달라붙어 있던 두려움의 허깨비를 쳐내버리는 글이었다. 이듬해에는 ‘대한민국은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렸다. 단정 수립 이후 40여 년 동안 진리로 군림해온 명제가 거짓임이 드러난 것이다. 이로써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근거도 함께 무너졌다. 이어 1992년 이후 ‘북-미 핵·미사일 위기’가 고조되자 리영희는 북-미 관계의 역사를 추적해 핵 위기의 근본 원인이 ‘핵무기 선제공격권’을 틀어쥔 미국에 있음을 폭로했다. 1999년 서해교전으로 남북 긴장이 커졌을 때는 ‘북방한계선은 합법적 군사분계선인가’를 써 ‘북방한계선’이 이승만 정권의 북진을 막으려고 유엔군이 쳐놓은 금지선이었음을 밝혔다. 이 모든 작업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다수 국민의 상식이 된 믿음을 뒤흔드는 것이었기에 발표될 때마다 충격을 몰고 왔다.


언론인으로서 리영희는 우리 사회 저널리즘의 실상에 대해서도 비판을 거두지 않았다. 독재의 하수인 노릇을 마다하지 않는 언론은 언론이 아니라 보도기관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특히 저널리즘이 냉전의식에 사로잡혀 반북 보도를 일삼는 데 대해 “거의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했다. 리영희는 남북 대립을 부추기는 보도를 멈추고 남과 북의 처지를 역지사지하는 자세로 살피라고 다그쳤다. 한국 언론의 신뢰도가 전 세계 주요 국가 중에서 몇 년째 최하위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보면 리영희의 비판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은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 관한 교수·대학원생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리영희를 첫 번째로 꼽았다. 리영희의 글들이 우리 사회에 준 충격의 크기로 보건대 놀라운 일이 아니다. 50년에 이르는 리영희 문필 활동의 목표는 <우상과 이성>에 밝힌 대로 ‘진실 추구 오직 그것’이었다. 2005년에 펴낸 자서전 <대화>에서 리영희는 그 진실 추구의 삶을 이끈 근본이념을 ‘자유와 책임’으로 요약했다. “인간은 누구나 본질적으로 자유인이기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책임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에 책임이 있다.” 리영희는 그런 믿음에 따라 사는 삶을 ‘형벌’이라고도 했다. 이런 고백은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가 ‘자유는 형벌’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형벌이 은유였다면, 20세기 한반도의 혹독한 역사를 산 리영희에게 형벌은 은유가 아니라 직설이었다. 리영희는 진실에 복무하는 글과 말 때문에 일터에서 쫓겨나고 체포되고 투옥되는 수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다. 진실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이 시대에 리영희가 살아 돌아온다면 후배 지식인·언론인들에게 무슨 말을 할까. 리영희가 떠난 지 10년, 리영희 정신을 거듭 생각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