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누구나 ‘델마와 루이스’가 되는 ‘영혼의 선착장’

[여행]by 한겨레

칠로에섬에서 만난 두 여성


마치 ‘델마와 루이스’처럼 보여


아름다운 섬 칠로에, 신화가 넘치는 섬


‘영혼의 선착장’ ‘악마의 악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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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조각가 마르셀로 오레야나 리베라의 작품이 있는 푼타피룰곶. 사진 노동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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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절벽 꼭대기에 선착장이 세워져 있었다. 허공에 배를 정박할 순 없으니 승객을 태울 배가 있을 리 없었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막다른 낭떠러지 앞에서 두 여자가 손을 잡고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착장 끝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곤 수평선 위로 솟아올랐다. 찰칵. 카메라를 들어 셔터를 눌렀다.


그건 마치 20세기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영화 <델마와 루이스>의 또 다른 엔딩 장면 같았다. 남편과 억눌린 일상에서 벗어나 단 하루라도 자유를 누리고 싶었던 주부 델마는 절친 루이스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 델마가 맞닥뜨린 세상은,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과 성희롱을 대수롭잖게 저지르는 곳이었다. 경찰에게 쫓기던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그랜드캐니언의 깎아지른 절벽. 델마가 루이스에게 말한다. “우리 잡히지 말자!” 루이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눈시울을 붉히며 델마가 대답한다. “저스트 킵 고잉 온(계속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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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선착장’ 위에서 점프를 하는 여행자들. 사진 노동효 제공

여성이 아니더라도 <델마와 루이스>를 사랑하고 엔딩 장면에 전율하는 건 누구나 탈출하고 싶은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지루한 일상, 가사노동, 직장 상사, 업무 등.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이들은 여행을 떠나고, 그들 중 일부는 탈출한 ‘그것’에게 두번 다시 붙잡히지 않는다. 길에서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 때문이다. 담배를 물고 머리를 풀어헤친 델마가 루이스에게 묻는다. “나 지금 꼭 미친 사람 같지?” 그러자 루이스가 대답한다. “그게 원래 너였어. 단지 그동안, 네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던 거야.”


절벽 끝에서 솟구친 여자들의 모습을 촬영한 장소는 태평양과 접한 칠로에섬이다.


칠레를 여행한 지 넉달째, 내가 지나온 도시명을 현지인에게 들려주면 늘 같은 반응이 잇따랐다. “칠로에를 안 가봤다고?” “칠로에를 빠뜨렸다니!” 당연히 어떤 곳이냐고 물었고 돌아온 얘기를 종합하면 칠로에는 ‘20세기의 제주도’ 같은 섬이었다. “내륙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안개가 자주 끼고 날씨가 오락가락하지만 정말 아름다워. 아늑한 성당, 전설과 신화, 환상적인 이야기. 신비의 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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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카우에 해변의 수산물식당 내부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듣고 나니 가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지만, 또 막상 가려니 막막했다.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내려온 터라 칠로에까지 가려면 칠레 영토의 반을 거슬러 올라야 했으니까. 푸에르토아이센으로 가서 칠로에행 페리로 옮겨 탔다. 섬들이 겹치고 겹쳐 섬인지 내륙인지, 강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는 길이었다. 칠레 남부엔 5000개도 넘는 섬이 있고, 섬들은 피오르식 해안선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지도를 만들어 낸다.


푸른 바다에 흩뿌려진 꽃잎 같은 섬들을 지나 칠로에에 닿은 건 28시간이 지난 후였다. 케욘 항구에서 카스트로행 버스로 갈아탔다. 칠로에는 제주도보다 4.5배나 넓다. 섬의 각지를 여행하려면 교통이 편리한 도시에 숙소를 잡는 게 좋을 듯했다. 해안구릉과 감자밭 사이를 지나 카스트로시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인접한 민박집에 둥지를 텄다.


다음날 나는 킨차오섬에 다녀오기로 했다. 제주도로 치면 우도나 차귀도인 셈이다. 버스를 타고 선착장이 있는 달카우에 마을에서 내렸다. 해변엔 선박처럼 원형 창문이 있고 조각판재를 비늘처럼 입힌 건물이 서 있었다. ‘코시네리아 달카우에’ 문을 열어젖히니 한국의 활어회센터처럼 해산물 요리를 파는 식당들로 가득 찼고 테이블마다 손님이 빼곡했다. 자리를 잡고 쿠란토와 해산물 수프를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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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전해오는 칠로에섬 전통 찜 요리 쿠란토. 사진 노동효 제공

쿠란토는 칠로에를 대표하는 찜 요리로 숯불에 달군 돌멩이 위에 고기, 해산물, 감자 등을 놓고 열기와 수분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나뭇잎을 덮어서 익힌 음식이다. 칠레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쿠란토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 6000년 전부터 칠로에 사람들이 요리해온 방식으로 기름기는 빠지고 육즙은 그대로 간직한 닭고기와 소시지는 담백했고 바다 향기를 머금은 해산물은 향긋했다.


주말이었던 터라 수공예품 시장도 열렸다. 인형 가게가 유난히 많았다. “인어공주인가요?” “아니요, 칠로타입니다. 전설의 동물인데 황금빛 머리칼에 여인의 상체, 비늘로 뒤덮인 하체를 가졌죠.” 털실로 인형을 짜던 아주머니가 알려주었다. 원주민 전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가 15세기 후 유럽인이 가져온 신화와 융합했다. 칠로타는 마푸체 부족 신화 중 반신반어 ‘섬파이’와 그리스 신화 속 ‘사이렌’이 결합한 바다생명체였다. 칠로타의 오빠 ‘핀코이’는 남성의 얼굴, 바다사자의 몸, 비늘로 뒤덮인 하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섬엔 마법의 돌, 죽은 영혼들의 배, 돼지 얼굴을 가진 물고기 등 환상적인 존재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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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로에섬 전설에 등장하는 반인반어 수생 생물 칠로타 인형. 사진 노동효 제공

배를 타고 킨차오섬으로 건너갔다. 칠로에의 명소는 유서 깊은 성당들이다. 150개가 넘는 목조성당이 있고 그중 15개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가장 오래된 성당이 아차오 마을에 있었다. 칠로에인은 쇠못을 사용하는 대신 전통 나무배를 건조하듯 장부를 맞춰 아차오 성당을 지었다. 유럽에서 본 석재로 지은 성당과 달리 바닥부터 계단, 창틀, 기둥, 아치까지 목재로 지은 성당 내부로 들어가자 금세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무가 가진 따뜻함 때문이었으리라. 청회색으로 칠한 천장에는 내소사 꽃문살을 닮은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한참동안 고개를 쳐들고 있자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와 “에덴의 정원이랍니다”고 알려주었다.


숙소로 돌아올 때면 칠로에의 랜드마크인 프란시스코 성당에 들르곤 했다. 노란색으로 외벽을, 흰색으로 창틀을, 빨간색으로 낮은 첨탑을, 보라색으로 꼭대기 첨탑을 칠한 목조성당을 바라보면 동화 속으로 들어온 듯 기분이 좋았다. 저무는 해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나무로 된 기둥과 바닥에 반사되면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둥지에 들어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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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로에섬의 랜드마크인 프란시스코 성당 내부. 사진 노동효 제공

하루는 성당을 빠져나오는데 광장에서 음악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가니 거리의 악사가 반도네온으로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오블리비온’. 듣는 동안 심장이 찢어질 듯했다. 사람들은 반도네온을 ‘악마의 악기’라 부른다. 건반 대신 71개나 되는 버튼, 주름상자를 펼치고 오므릴 때 다른 음이 나오는 복잡성 등 악기를 배울 때 진입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7㎏에 달하는 악기를 무릎에 올리고 연주해야 하는 고난 때문이라고도 하고, 금속판이 떨리며 내는 독특한 소리 때문이라고도 했다. 내게 반도네온은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악기’였다. 71개 자판이 달린 타자기를 눌러 허공에 소리로 된 시를 쓰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연주를 마친 악사의 악기 케이스에 동전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시력이 좋지 않은 듯 눈살을 찌푸리며 악보를 들여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퐁네프의 연인들>에서의 미셸(쥘리에트 비노슈)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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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시 아르마스 광장에서 반도네온으로 탱고곡을 연주하는 거리의 악사. 사진 노동효 제공

화창한 날, 칠레 조각가 마르셀로 오레야나 리베라가 만든 ‘영혼의 선착장’(Muelle de las Almas)을 찾아가기로 했다. 쿠카오 마을 정류장에서 내린 후 푼타피룰릴곶까진 걸어가야 했다.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동안 땀방울이 흘러내렸지만 눈앞에 펼쳐진 절경이 열기를 식혀주었다. 1960년까진 해안절벽이 아니었다고 한다. 리히터 9.5 규모에 달하는 지진으로 육지가 내려앉으며 절벽이 생겼다. 절벽 끝에 목조구조물이 세워졌다. ‘영혼의 선착장’이다.


마푸체 부족 신화에 따르면 영혼이란 우주의 영혼(Pu-Am)에서 나온 불꽃이며 태어나면서 육체에 깃들었다가 죽은 후 다시 ‘푸-암’으로 녹아든다. 죽은 자의 영혼은 네 마리 고래로 환생한 노파들이 바다 건너 내세로 옮겨준다는데, 칠로에섬엔 또 다른 이야기가 존재한다. 고래가 아닌 뱃사공이 옮겨주며 어떤 영혼은 태워주지 않는데, 남겨진 영혼들이 해안가에서 울부짖는다고.


칠레 조각가 마르셀로는 섬의 토착 신화, 풍요로운 자연, 전통 배와 목조성당을 만들게 한 나무에 경의를 바치며 ‘영혼의 선착장’을 만들었다. 나무 질감을 살린 작품은 거칠어 보이지만 인생행로처럼 굽이치는 곡선이 기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경이로운 자연’이 ‘스토리텔링과 예술성이 어우러진 작품’과 만나면 얼마나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는가! 사람들은 ‘영혼의 선착장’으로 올라가 사진을 찍었고 점프를 할 때면 <델마와 루이스>가, 칠로에 신화와 전설이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 작가)

2020.12.0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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