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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세계서 가장 아름다운 벽돌 나온 ‘외리 유적’…84년째 방치된 까닭은

by한겨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한겨레

백제 문양전이 나온 규암면 외리 유적 추정 현장. 부여소방서 뒤편의 구릉지대에 있다. ‘개인 소유지로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 팻말이 걸린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소방서 뒤쪽에 유적이 있습니다.”


“불 끄는 소방서요?”


“예, 맞습니다.”


국립부여박물관 조효식 학예사가 겸연쩍은 듯 위치를 확인해줬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산수화로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등 모르는 이가 없는 7세기 백제 산수문양 벽돌(산수문전·국가지정보물). 이 문화재의 출토지는 부여소방서 뒤쪽 언덕배기 밭에 있었다. 84년 전, 일본 고고학자들의 손을 거쳐 42점의 완형과 150여점의 파편으로 세상에 나온 부여 외리 유적이다.


유적으로 추정되는 밭 앞을 철조망이 가로막았다. ‘개인 소유지로 출입을 금합니다 … 농작물을 경작하고 있으니 함부로 채취하거나 훼손할 시 민형사상 고발 조치하오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라는 살벌한 팻말이 걸려 있었다. 행정구역상 지번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 209-2번지 혹은 209-3번지 일대. 그것도 어렴풋한 추정일 뿐, 확실한 위치를 아는 이는 없다.


지난 5일 오후 세한 추위를 견디며 찾아간 외리 유적은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가 나온 곳이란 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인근에는 벌목한 나뭇더미와 중장비, 트럭이 주차돼 자재 야적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방엔 재개발 건물이 여기저기 올라가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동행한 조 학예사는 1937년 조선총독부에서 파견한 일본 학자 아리미쓰 교이치가 이 유적을 조사할 당시 유적 도면 복사본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유적 현황을 알려주는 그림 자료는 이 도면이 전부라고 봐도 됩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보고 내용이 빈약합니다. 해방 뒤에도 계속 파헤치고 개발해 일대의 변화가 심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선 이 소방서 뒷자락을 조사 지점으로 추정하지만, 사유지라 살펴볼 수가 없습니다. 유적 팻말조차 없어 아쉽고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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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 중인 백제 문양전 가운데 산수봉황무늬 벽돌. 산과 물이 깃든 경관을 배경으로 구름과 함께 산꼭대기의 봉황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봉황이 산야를 형상화한 뚜껑 위에 앉은 백제 금동대향로의 구도와 빼닮은 점이 주목된다.

외리 일대에서는 1907년과 1937년 30년 간격으로 획기적인 백제 유물이 출토됐다. 1907년에는 농부가 쇠솥에 들어 있는 백제 금동관음보살상 2구를 발견했고, 1937년에는 아리미쓰 교이치 등 일본 학자들이 불상 발견 지점에서 불과 100여m 떨어진 사원 추정 터에서 4쌍 8종류의 문양전을 발굴했다. 발굴품 중 백제 문양전은 교과서에 실렸고, 백제관음상은 국내에 남은 1구와 일본으로 유출된 1구 모두 백제 불상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렇지만 외리 유적은 정작 80여년째 후속 조사 없이 방치됐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른 백제 왕릉이나 사찰 터 발굴에 밀려 내팽개쳐진 것이다. 후대 학자들이 구체적인 발굴 상황과 양상을 제대로 복기할 수 없는 이유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 벽돌’이란 호평을 받은 백제 문양전은 국립부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지난 연말부터 차려진 ‘백제산수문전’ 특별전을 통해 디지털 기법으로 단장해 선보이는 중이다. 간결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으로 3개의 산이 우뚝 솟은 모습을 표현한 산수무늬 벽돌과 산과 물이 깃든 경관을 배경으로 구름과 함께 산꼭대기 봉황을 형상화한 봉황무늬 벽돌 등 8가지 문양전이 중앙공간에서 조명을 받으며 관객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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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문양전 가운데 연꽃도깨비무늬 벽돌. 허리띠를 길게 내려뜨린 역동적인 도깨비의 상이 율동하는 연꽃무늬 대좌 위에 서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백제 말기 갑자기 나타난 이 문양전의 도상적 의미와 용도에 얽힌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진전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벽돌이 나온 외리 유적의 실체를 모르는 탓이다. 윤형원 관장은 “1937년 문양전을 발굴한 이래 중요한 국가 종교시설 터로 추정했으나 후속 조사가 없었다. 계속 허물어지는 유적에 대해 빨리 발굴조사를 벌여 유적의 용도와 실체를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고 전했다. 80년대 이래 부여소방서, 국유림관리사무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등의 건물이 속속 들어서면서 사적 지정과 재조사가 진행되지 않으면 유적 자체가 사라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규암리 일대에선 백제 불상만 8개 이상 발굴됐고, 국내 최고 사리기가 나온 왕흥사 터 등 사원 터가 널려 있어 백제문화예술의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외리 유적에서 500m 떨어진 코앞에 2010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청사가 지어졌다. 이 땅엔 아직도 등잔 밑이 어두운 문화유산이 많다. 새해 외리 유적 재조사에 서광이 비치기를 갈망한다.


부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