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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ESC] 무채색도 다채롭구나 ‘한라 설국’

by한겨레

한겨레

눈 내린 한라산에 오른 김강은 작가. 사진 김강은 제공

높이: 1950m


코스: 한라산 영실휴게소-영실기암-윗세오름(1700m)-윗세오름 대피소-만세동산-어리목매표소


거리/소요시간: 약 8.5㎞/약 4시간


난이도: ★★★★


기타사항: 방한 패딩과 방풍 재킷, 귀를 덮을 모자와 장갑, 버프, 아이젠과 스패츠(양말 안으로 들어오는 눈을 막으려고 발목부터 무릎 사이를 두르는 각반) 준비 등 겨울철 산행 대비 철저히 할 것!

한겨레

곳곳에서 폭설 소식이 들려온다. 미디어 속 세상은 온통 하얗게 물들고, 집 밖을 나서니 전에 없던 백색 행렬이 이어진다. 수십마리의 하얀 오리, 겨울 왕국의 엘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까지. 장인이 빚은 듯 재치 있는 눈사람들의 등장에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런 추위에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데, 산꾼으로서 눈 소식이 들리면 조바심이 난다. 이 계절, 산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 있기 때문이다. 초록이 아닌 무채색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한다. 이번 여행지는 겨울 명산 한라산이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한 번쯤 버킷리스트로 꼽는 산이 한라산(해발 1950m)이다. 대한민국의 최고봉이다. ‘한라산=백록담’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한라산의 아름다움은 생각보다 더 다채롭다. 백록담으로 향하는 코스 외에도 분화구의 남쪽 방면을 여행하는 방법(영실, 어리목, 돈내코 코스)이 있고 한라산 기슭의 오름 어승생악 트레킹도 있다. 혹은 한라산 둘레길을 걸어도 충분히 좋은 여행이 된다. 각각의 길이 모두 매력적이지만 적절한 난이도에 가장 볼거리가 풍성한 것은 단연 영실코스, 이번 여행의 목적지다.


영실 코스는 영실 휴게소에서부터 출발한다. 결 고운 밀가루가 내려앉은 듯한 한라산의 허리춤이 빼곡하게 내다보였다. 입가엔 뭉게뭉게 입김이 피어올랐다. 겨울 산행의 시작은 철저한 준비부터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버프와 장갑도 단단히 착용한다. 겨울 산행의 필수품 아이젠도 잊어선 안 된다. 적절한 대비는 자연을 더 편안하게 감상할 여유를 주니 말이다.


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가 숲을 이룬 오솔길로 폭 안겨들었다. 새하얀 눈꽃이 핀 나무들 사이를 지났다. 발은 푹신한 눈 카펫에 푹푹 빠졌다. 살갗은 차갑지만, 두 눈은 포근하고 마음은 뭉근해지는 풍경이었다.


나뭇가지에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것을 눈꽃이라 한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차가운 바람을 만나 나뭇가지에 단단히 동결되는 것을 상고대라 부른다. 온도와 습도와 바람이란 3박자의 절묘한 타이밍이 만들어내는 상고대는, 많은 산꾼이 한파에도 길을 나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40분 정도 숲길을 오르면 시야가 트이고 영실기암이 펼쳐진다. 바람이 거세지니 켜켜이 얼어붙은 상고대가 지천이다. 제주의 여신 설문대 할망의 아들들이라는 약 500개의 병풍바위 영실기암에도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꽃이 피었다. 머리칼과 속눈썹에도 상고대가 맺혔다. 천지 사방이 설국이다. 설인이 되면 이런 기분일까. 무채색의 세상이 이리도 화려할 수 있을까. 멀리 앞서가는 산객은 하얀 도화지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간다. 영화의 한 장면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보라 치는 설국을 한없이 걷다 보니 작은 산장이 나타났다. 종착지인 윗세오름 대피소다. 산객들이 잠시 추위를 피해 쉬어갈 수 있는 쉼터다. 훈훈한 산장 안에 들어서자 붉게 상기된 얼굴이 녹으며 얼어붙었던 마음도 말랑말랑해졌다. 추위를 피해 모인 사람들이 모락모락 열기를 피워내는 모습 또한 진풍경이다.


산행을 마친 후 ‘꿈을 꾼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은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 믿기지 않았다. 아직 얼얼한 살결만이 ‘한라 설국’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뿐. 2021년 새로운 버킷리스트를 고민하고 있다면 주저 없이 노트에 ‘설산 여행’을 적어보자. 코로나 블루를 앓고 있는 우리들의 일상에 정신이 번쩍 드는 새 바람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김강은(벽화가·하이킹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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