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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지게스님 지게스님, 어디로 가시나요

by한겨레

[100도/ 30년 만에 미황사 떠나는 금강 스님]


낡고 허물어졌던 이름없는 사찰

담 헐고 지게져서 축대부터 쌓아

세계가 주목하는 불교 유산 명소로

미황사 괘불탱 처음으로 복원·모사

괘불재와 부도발, 현대풍 사천왕상

사찰탁본 새로운 미학까지 널리 알려

“절집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동

언제나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죠

떠난다 해서 별다른 감회 없습니다

그저 절집처럼 담담하게 살아갈뿐”



한겨레

대웅보전 앞마당을 걸어가고 있는 금강 스님.

“이 절집은 지난 30년간 언제나 내 삶의 중심을 잡아주었습니다. 아무리 번거로운 일이 벌어지고 마음이 혼란스러워도 스승 같은 절집의 존재가 있어 곧 단정해졌습니다.”


지난 12일 낮 해남 달마산 암봉 아래 차분히 내려앉은 미황사 대웅보전으로 들어가면서 스님이 말했다. 대웅보전은 1200년 고찰의 심장. 청년승 시절부터 절간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꾼 주지 금강 스님의 정신적 심장이기도 했다. 2001년 2월 주지로 부임한 스님은 160여년 전 단청칠 벗겨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대웅보전에서 아랫마을 불자들과 함께 천일기도를 올렸다. 부디 절집과 자신이 하나 되어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변방의 사찰 문화유산들을 잘 가꾸고 지켜주는 소임을 다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목탁을 쥔 손가락이 부르터 피가 터지도록 기원했다.


20년이 흘렀다. 미황사는 변두리 이름없는 사찰에서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20년 동안 창의적인 문화재 관련 사업을 벌여, 허물어진 폐사 상태였던 미황사를 국내는 물론 세계 외신들도 주목하는 불교 문화유산 명소로 각인시킨 주역이 됐다. 지난 연말엔 문화재청이 주관한 ‘2020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 대상자로 선정돼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오는 2월3일 스님은 많은 주민과 불자들의 아쉬움 속에 본사 대흥사의 결정으로 주지 자리를 떠난다. 지난 12~13일 미황사에서 1박2일간 스님의 만행에 동행하면서 불교 문화재 지킴이 20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겨레

지난 13일 아침 눈 덮인 미황사 부도밭에 선 금강 스님. 그는 “여기 오면 항상 놀이터에 온 듯한 기분이 된다”며 선승들의 부도탑 사이를 거닐며 즐거워했다. 부도탑들에는 게와 거북이 같은 지역 특유의 해물들과 동물, 꽃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과거도 지금도 절은 살아있다 “절집 문화유산의 제일 중요한 요체는 살아있다는 것, 살아있게 하는 것이죠.”


금강 스님은 12일 아침 종무소에서 신임 주지에게 인수인계하기 위해 사찰 문화유산 목록인 성보 대장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기자를 만난 그는 경내 세심당 다실로 자리를 안내했다. 차석에서 20년의 문화유산 지킴이로서의 소회를 먼저 물었다. 대뜸 그는 슴슴한 어조로 말했다.


“미황사는 퇴락할 때도 있고 융성할 때도 있었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생명체처럼 자연, 사람들과 함께 생동하고 있어요. 저는 그게 좋습니다. 절을 떠난다는 별다른 감회가 없어요. 절집처럼 덤덤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스님은 문화유산 활용에서 ‘최초’의 시도를 많이 했다. 조선시대 대형 불화인 18세기의 국가지정보물 ‘미황사 괘불탱’을 처음으로 복원·모사했다. 이 괘불탱을 내걸고 해마다 가을에 산사음악회를 겸한 미황사 괘불재를 열어 산사음악회의 트렌드를 처음 만들었다. 미황사를 비롯한 전국 사찰 각지의 석물 탁본을 만들어 수집하고 전시회를 열어 사찰 탁본의 새로운 미학을 대중에게 처음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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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불사 초창기의 미황사. 대웅전 마당의 돌 축대를 쌓고있는 모습이다.

잊을 수 없는 답사지로 유명해진 미황사 부도밭도 스님의 원력으로 가는 길을 정비하고 미술사 전문가들의 조사사업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지난해 5월에는 무서운 전통사찰의 사천왕상을 벗어나 21세기 미감에 맞는 현대풍의 창작 사천왕상을 절 들머리에 설치하면서 화제를 모았다. 절의 전각과 부도밭 등의 문화유산에서 펼쳐지는 어린이들의 한문학당이나 청년 수행 프로그램은 지난 20년간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절이 전국 사찰로 유명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미황사는 해남 대흥사의 말사다. 백양사 문중 출신인 그가 4년 임기의 주지 직을 이례적으로 5연임 한 것도 이런 문화재 지킴이로서의 공적에 힘입은 바 컸다. 미황사는 보물인 대웅전과 괘불, 응진전 외에도 숱한 나한상과 시왕상 등의 지방 문화재들이 차고 넘치는 곳이지만, 달마산 아래 암봉과 조화를 이룬 전각들의 아름다운 풍광이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기는 곳이다. 스님은 처음 절을 찾은 80년대 말에는 이런 풍경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라고 털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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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아침 눈 덮인 미황사 부도밭에 선 금강 스님. 그는 “여기 오면 항상 놀이터에 온 듯한 기분이 된다”며 선승들의 부도탑 사이를 거닐며 즐거워했다. 부도탑들에는 게와 거북이 같은 지역 특유의 해물들과 동물, 꽃 등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삼나무 숲 베며 대웅전 마당을 닦다 처음 미황사에 온 건 1989년. 당시 스승인 주지 지운 스님을 따라 절에 와서 이년을 살았다. 대웅전과 응진전의 두 절집과 작은 요사채만 있고 모두 빽빽한 삼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햇빛이 들지 않고 습기가 넘실거렸다. 절 마당에 햇살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아 볕을 들이기 위해 이 년 동안 삼나무 베는 작업만 했다.


“마당 끝 지점 담을 헐어서 그걸로 축대를 쌓았다. 날마다 지게 지고 가서 그 돌 갖고 축대를 쌓았어요. 지금 대웅전과 달마산이 보이는 절집 마당은 그때 노동으로 닦은 공간이죠.” 도로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물품을 들머리에서 지게로 져서 올라가니 마을 사람들이 지게 잘 진다고 별명을 붙인 게 ‘지게스님’이었다. 법명이 금강 아닌 지게 스님이 된 격이었다.


이곳을 사람이 살며 수행하는 온기와 활기가 느껴지는 절로 만든 것은 1991년 전임 주지로 부임한 도반 현공 스님이었다. 삼성각, 명부전 짓고 수행처 만하루와 세심당 요사처를 짓고 쓰러져가던 응진전을 해체 보수한 것도 그였다. 하지만 낯을 가리는 현공 스님은 2000년 훌쩍 자리를 비우면서 거의 막무가내로 우연히 안거를 마치고 들렀던 금강 스님에게 떠맡기다시피 하며 주지의 소임을 맡겼다. 하지만 부임한 지 불과 여덟달 뒤인 2001년 10월15일 부슬비 내리던 밤에 응진전 나한상 7구가 도난당하는 참화를 겪으면서 이후 새벽 1시만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절 내 전각과 불상들 주위를 ‘몽유병자처럼’ 돌며 순찰하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 다행히 도난당한 나한상 7구는 지난해 10월 서울경찰청 수사대가 찾아 귀환을 기다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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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낮 미황사의 대웅보전 앞에 선 금강 스님. 그는 대웅보전과 그 옆 응진전을 두고 “언제나 절과 달마산의 중심이었고, 절에 들어온 내 마음의 중심도 잡아주었던 의지처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미황사 부도탑 탁본이 맺어준 인연 백양사에서 수행승 생활을 하던 스님이 미황사의 문화유산에 눈뜨게 된 건 1996년부터 간간이 시작한 미황사 부도전 탑비 부도탑의 문양 탁본 작업이었다. 원래는 잊혀버린 조선 전후기 절의 사적을 찾아내려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게나 물고기, 다람쥐 같은 해남 지역 특유의 해물과 동물들이 다양하게 새겨진 문양의 소박한 매력에 빠져 전국 선종 사찰 유적인 구산선문 사찰 터의 부도탑, 탑 문양과 함께 전시를 기획했고, 언론 등에 대대적으로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백양사에도 고불 미술관을 세워 마애불과 동종의 탁보 작업, 불교미술 작가들의 전시를 기획했다. 문화유산 지킴이이자 문화기획자로서의 역량을 미황사 주지가 되기 전부터 이미 닦고 있었던 셈이다.


2001년 주지의 소임이 돌아오자 그는 우선 미황사 부도밭을 막 시작한 한문학당 프로그램의 산교육장으로 활용했다. 청장년 수행 프로그램의 주된 코스도 부도탑과 절의 주요 전각들을 돌면서 문화유산들을 새롭게 체험하는 내용이었다.


오랜 세월 닳고 헤어지기 시작한 대웅전의 천장 공포 사이 벽면의 천불도와 괘불의 보존 복원 처리에도 관심을 쏟았다. 국내 최초로 천불도 괘불의 도상을 젊은 작가들이 옮겨 떠내는 모사 작업을 시도했고, 정밀한 모사도 전시는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과거 사찰의 법회가 구경꾼들만 만들어낸다고 생각한 그는 300년 된 괘불탱과 모사본을 매년 거는 괘불재를 열어 그 앞에서 대중이 농산물 등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바치는 만물공양의례를 고안하고 산사 음악제도 열기 시작했다. 문화유산의 전통과 콘텐츠를 핵심에 놓고 대중 참여를 골자로 하는 미황사 프로그램은 대중적 관심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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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젊은 금강 스님(가운데)이 은사 지운 스님(오른쪽)과 미황사에서 정비 작업을 하다 찍은 사진.

즐겁게 참여하는 문화재 사찰을 꿈꾼다 미황사 대웅보전에서는 올해 상반기로 예정된 해체 수리를 앞두고 거의 날마다 오후에 비계가 올라가 공포 사이 벽화와 천장 문양 반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재촬영하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스님은 매일같이 보존복원 관계자들과 협의를 지속하면서 대웅전을 중심으로 사찰 전각과 내부 불상 등의 문화유산 관리에 신경을 곤두세우며 순찰을 거듭했다.


지난 13일 오전 취재진과 함께 눈 덮인 미황사 부도밭을 돌아본 스님은 “여기 오면 항상 놀이터에 온 듯한 기분이 된다”며 즐거워했다. 살아 움직이는 사찰 공동체 속에서 모두가 참여하는 문화유산 활용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 스님은 새 모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1994년 종단개혁 운동에 참여할 때 사찰문화유산의 새 운영 틀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한국 불교는 최고의 장점이 천년 넘게 내려오는 산중수행사찰이 많다는 점이지요. 사찰의 수행 내용을 일반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게 중요한데 사찰이 품은 문화재는 이를 위한 가장 좋은 연결고리입니다. 디지털 매체 등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춰 유연한 문화재 재활용 프로그램을 계속 만들려는 노력이 결실을 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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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 겨울 한문학당 프로그램을 벌일 당시 참가한 학생들과 부도밭 가는 길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금강 스님은 이달 중 결정되는 중앙승가대 교수직 공모에 신청서를 낸 상태라고 했다. 불교 상담심리학과 포교 등이 주된 전공으로 임용이 결정되면 강단에서 교육자의 삶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문화유산 지킴이로서의 행보 또한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눈 덮인 부도밭을 걸어가면서 그는 대중 참여 프로그램을 앞장서 가꿔온 문화유산 관리자의 경험과 식견을 어떤 방식으로든 전승하고 공유하는 길 또한 폭넓게 찾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해남/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미황사 종무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