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아이유’ 장덕, 곁에 없지만…“사랑했던 마음은 남아있어요”

[컬처]by 한겨레

[100도/싱어송라이터 장덕을 그리는 사람들]


‘소녀와 가로등’ 만든 10대부터

‘나 너 좋아해’ ‘님 떠난 후’ 등

싱어송라이터로 수많은 히트곡

“진솔한 감정으로 대중 위로해”

“돌아오는 생일엔 추모행사 열길”

조카 장원·팬클럽 회원 뜻 모아

유해 잠든 남이섬에 노래비 건립

리메이크·영화·복각작업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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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유족 제공

매서운 바람이 물러간 날이었다. 먼 산 위로 펼쳐진 하늘은 파랗게 빛났고, 눈 덮인 땅 위로는 오후의 햇살이 고루 퍼졌다. 장원(42)씨는 배에 오르기에 앞서, 자신 앞에 펼쳐진 강을 오래도록 바라봤다. “고모가 잠든 곳이에요.” 그의 시선이 머문 강 곳곳에는 하얀 얼음 조각들이 둥둥 떠 있었다. 배는 이물에 부딪히는 언 강 조각들을 밀어내며 천천히 나아갔다. 운항은 길지 않았다. 5분여 만에 다다른 섬은 이틀 전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지난 20일 장씨는 강원도 춘천 남이섬을 찾았다. 그의 고모는 1970~80년대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손꼽힌 가수 장덕이고, 그의 아버지는 장덕과 남매 듀오 ‘현이와 덕이’로 활동한 가수 장현이다. 장씨의 발길이 닿은 남이섬 노래박물관 앞 정원에는 ‘장덕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고모가 많은 이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한 분들이 많아요.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이뤄져서….” 그가 비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장덕의 팬클럽(장덕 우리와 함께) 회장인 김상은(35)씨와 영화 제작사 미로비젼의 채희승 대표도 함께 자리했다. 지난달 노래비가 남이섬에 뿌리를 내린 뒤, 유족이나 팬클럽이 이곳을 찾은 것은 이날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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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천재 싱어송라이터 장덕 30주기를 맞아 다양한 추모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20일 오후 강원 춘천시 남이섬 ‘장덕 노래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장덕의 유해가 뿌려진 남이섬에는 지난달 노래비가 세워졌다. 왼쪽부터 채희승 미로비젼 대표이사, 장덕 조카 장원, 김상은 장덕 팬클럽 회장. 춘천/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노래비 건립은 장덕 팬클럽이 7년 전부터 추진해왔다. “묘역 등이 따로 없어서, 우리의 ‘스타’를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공간이나 기념비가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김씨가 말했다. 오랫동안 팬들이 추진해온 일이 급물살을 탄 것은 지난해 봄부터다. 2019년 남이섬 쪽과 인도문화축제를 함께 한 채 대표도 가세해 팬들의 마음을 섬 쪽에 전했다.


민경혁 남이섬 부사장은 “1980~90년대 ‘강변가요제’ 개최지이자, 노래박물관이 자리한 남이섬은 ‘노래의 섬’”이라며 “천재 싱어송라이터로 한국 대중음악사에 빛나는 유산을 남긴 장덕을 기념할 수 있는 노래비를 세우는 것은 섬 성격에도 맞는다고 생각해 팬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남이섬 쪽은 섬에 있는 돌 가운데, 비석에 쓸 적합한 돌을 골라 글씨를 새기고 동판을 만들었다. 섬 안에서 노래비를 자체 제작한 것이다.


지난해는 장덕 30주기였다. 애초 지난달 노래비가 완성됐을 때, 유족과 팬을 비롯해 동시대에 활동한 동료 가수 등이 소규모로 모여 제막식을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발목을 잡았다. 이 전염병이 재확산하면서 행사를 장덕 기일인 오는 2월4일로 미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람들이 모일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족과 팬들은 코로나19가 안정돼 장덕의 생일인 4월21일에는 관련 추모 행사를 열 수 있기를 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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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장현 남매가 듀오로 활동한 ‘현이와 덕이’의 앨범 표지 사진.장덕 팬클럽 제공

30대 이하 젊은층한테 장덕은 그리 익숙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는 당대 독보적인 존재였다.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흔치 않은 1970년대에 벼락처럼 가요계에 등장해, ‘소녀와 가로등’ ‘너 나 좋아해 나 너 좋아해’ ‘님 떠난 후’ ‘뒤늦은 후회’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이은하의 대표곡이자 수많은 가수가 리메이크한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도 그가 만든 노래다. 오빠 장현과 ‘현이와 덕이’로도 활동하며 한국의 카펜터스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가수로서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에서 주연을 맡아 연기자로서도 인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당시 장덕의 위상을 오늘날의 아이유에 견줘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서경민 남이섬 노래박물관 책임큐레이터는 “10대 때 데뷔해 음악 활동뿐만 아니라 연기 활동에서도 두각을 보인 장덕은 쉽게 말해 ‘1980년대 아이유’”라며 “여성 싱어송라이터가 드문 시절 그는 천재적인 재능을 꽃피웠다”고 말했다.


장덕이 음악적으로 처음 이름을 알린 것은 1977년 제1회 서울가요제를 통해서다. 그는 당시 가수 진미령이 부른 ‘소녀와 가로등’ 작사·작곡자로 무대에 올라 당차게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모습으로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의 나이 16살 때다. 더욱이 그가 이 곡을 중학교 2학년 때 만들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재 소녀’란 수식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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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앨범. 팬클럽 제공

그의 화려한 음악적 성과와 달리, 가정사는 순탄치 않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의 이혼으로 그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만 했다. “그런 외로움이 한편으론 고모 음악의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장원씨가 말했다. ‘소녀와 가로등’이 바로 그런 노래다. 자신과 어머니를 오랜만에 찾은 오빠가 오래도록 함께 있지 못하고 야간통행금지 시간 전에 서둘러 아버지에게 돌아가자, 중학교 2학년 소녀는 창밖의 가로등을 보며 노래로 외로움을 달랬다.


“조용한 밤이었어요/ 너무나 조용했어요/ 창가에 소녀 혼자서/ 외로이 서 있었지요/ 밤하늘 바라보았죠/ 별 하나 없는 하늘을/ 그리곤 울어버렸죠/ 아무도 모르게요/ 창밖에 가로등 불은/ 내 맘을 알고 있을까/ 괜시리 슬퍼지는 이 밤에/ 창백한 가로등만이/ 소녀를 달래주네요/ 조용한 이 밤에/ 슬픔에 지친 소녀를/ 살며시 달래주네요.”


장덕은 29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90년 2월5일치 신문을 보면, 그의 부고를 확인할 수 있다. <경향신문>은 이날 “4일 장덕씨가 다량의 감기몸살약과 수면제, 기관지확장제를 먹고 신음 중인 것을 함께 사는 장씨의 의상 담당 문아무개씨가 발견, 병원으로 옮기던 중 숨졌다”며 “경찰은 감기 증세와 과로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보도했다. 더욱이 그의 죽음 이후 오빠 장현도 혀암으로 6개월 뒤 숨을 거두면서, 남매가 같은 해 나란히 세상을 떠나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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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팬클럽 제공

장덕의 유해는 남이섬 강물에 뿌려졌다. 당시 암 투병 중이던 장현은 동생을 어느 한곳에 가두지 않고, 동생이 마지막으로 머물렀고 좋은 기억을 안고 있는 대자연 속으로 그를 놓아줬다. 장덕은 세상을 떠나기 전, <한국방송> 신년 특집 드라마 <구리반지>를 남이섬에서 찍었다. 유족과 팬들이 해마다 그의 기일에 남이섬을 찾아 추모하고, 이곳에 노래비를 세운 이유다.


장덕을 기억하고 재조명하는 작업은 이뿐만이 아니다. 후배 가수들은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장덕 트리뷰트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가수 모트는 지난 14일 ‘소녀와 가로등’과 ‘점점 더 가까워져요’를 자신만의 색깔로 재해석해 발표했다. 이에 앞서 지난달 ‘님 떠난 후’를 리메이크해 공개한 여성 듀오 레인보우노트는 다음달 10일 ‘얘얘’를 새롭게 내놓을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규영 루비레코드 대표(한국음악레이블산업협회장)는 “시대를 앞선 장덕의 작품과 창작력을 다시 한번 기리고 재조명하고 싶었다”며 “협회 차원에서도 올해의 아티스트로 장덕을 선정해 그와 관련한 아카이브 작업을 벌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를 추억하는 다큐멘터리와 그의 삶과 음악을 소재로 한 음악영화도 준비 중이다.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1960년)를 2010년 리메이크한 영화제작사 미로비젼은 각각 내년 개봉과 2023년 개봉을 목표로 극장용 다큐멘터리와 음악영화를 제작하고 있다. 채희승 미로비젼 대표는 “1970~80년대 ‘여성이 무슨 작곡이냐’는 식의 사회적 억압이 지배하던 시대에 장덕은 자신만의 색깔과 언어로 거침없이 삶을 노래했다”며 “짧은 생을 살다 간 ‘비운의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당대 새로운 여성상을 선보이며 재능을 빛낸 장덕이란 인물은 충분히 영화적”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을 다시 내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1985년에 출시된 ‘현이와 덕이’ 2집 앨범은 최근 엘피(LP)로 재발매됐으며, 장덕의 옛 앨범도 리마스터링(복각) 작업이 진행 중이다. 유족과 팬클럽은 더 많은 이들이 장덕의 노래를 쉽게 부르고 기억할 수 있도록 그의 노래 악보와 미공개 사진 등을 책으로 엮어, 오는 4월께 내놓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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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 유족 제공

이처럼 최근 들어 장덕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는 “장덕은 당시 한국 대중음악이 잘 쓰지 않은 화성을 선보이며, 진솔하고 순수한 노랫말과 멜로디로 사랑을 받았다”며 “최근 레트로(복고) 열풍으로 1980~90년대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그의 음악이 가진 따뜻한 감성과 위로의 메시지가 대중의 정서를 자극한 결과”라고 짚었다. 박 평론가는 이어 “동시대에 세상을 떠난 김현식, 유재하 등 남성 가수들과 달리 그동안 장덕의 음악적 성과는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며 “30년이란 세월을 넘어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여러 방면에서 이뤄지는 것 같아 반갑다”고 덧붙였다.


춘천/김경욱 기자 dash@hani.co.kr

2021.01.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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