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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2000여년 전 경산벌 다스린 20대 청년의 정체는…

by한겨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경산 양지리 목관묘가 증명한 고대 한반도의 기상

국립대구박물관 ‘떴다! 지배자’ 테마전에서 선보여



한겨레

국립대구박물관 테마전에 나온 오수전 박힌 꺾창집. 기원 전후 시기로 추정되는 경산 양지리의 지배자 목관묘 요갱에서 출토된 작품이다. 26개의 오수전이 옻칠한 표면 위에 박혀 있는 독창적 디자인은 선례를 찾을 수 없다. 오수전은 중국 전한, 후한대의 고대 동전이다. 당대 지배자가 중국 등 국외세력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재력을 쌓았음을 과시하는 의도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2000여년 전 한반도 남부를 호령한 권력자는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 선물을 안겨주었다. 중견 고고학자인 박광열 성림문화재연구원장은 3년 전인 2017년 12월 마지막 주 벌였던 조사를 잊지 못한다. 당시 그는 대구에서 경주로 가는 길목인 경북 경산시 하양읍 양지리의 계곡 분지에서 기원 전후 시기 목관묘 바닥을 훑고 있었다.


앞서 그해 11월 연구원이 조사한 목관묘에서 중국 한나라 거울 등 호화 용품과 청동 칼, 옻칠 된 칼집 등 금속무기가 대거 발견됐다. 기원 전후 삼한시대 진한의 권력자 무덤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박 원장의 관심은 온통 목관묘 바닥에 쏠려 있었다. 고대 권력자들은 목관묘를 쓰면서 주검의 허리춤 아래 바닥에 조그만 허리 구덩이인 ‘요갱’을 팠다. 거기에 귀중한 유물들을 신에게 바치는 봉납물로 묻는 관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탄 연휴도 잊고 바닥 발굴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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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양지리 목관 주검 자리 허리춤의 부장품 구덩이(요갱)에서 막 발견됐을 당시의 옻칠한 투겁창집과 오수전이 박힌 꺾창집 모습. 막 칠한 것처럼 생생한 광택을 내고 있다.

요갱 발굴에 착수한 다음날인 12월19일. 바닥 흙을 발굴삽으로 천천히 파냈더니 시커먼 선이 하나 나타났다. 유물을 감싼 나무 바구니가 탄화된 흔적이었다. 주변 흙을 걷어내자 어제 칠한 것처럼 반짝이는 검은빛 덩어리가 잇따라 나타났다. 크고 작은 두개의 청동제 투겁창 꽂은 창집. 그것도 정성스럽게 여러번 옻을 칠해 정연한 광택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창집 사이를 들춰보니 철제 꺾창을 끼운 꺾창집이 드러났다. 이상한 건 표면에 까만 옻칠이 돼 있긴 한데, 둥그런 철녹이 곳곳에 피어 있었다. 의문은 출토품을 수습해 올리면서 풀렸다. 옛 중국 전한시대 동전인 오수전 스물여섯개를 옻칠한 창집 곳곳에 붙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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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리 1호 널무덤의 추정 복원도. 파놓은 자리에 통나무 목관을 들인 뒤 무덤 주인을 안치하고 칼 등의 무기류를 주인의 오른쪽에, 망자의 영혼을 하늘로 보내기 위한 상징인 깃털 부채는 주인의 배와 가슴, 얼굴을 덮게 해놓았다.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요갱의 유물이 가리키는 바는 분명했다. 당대 지배자가 희귀한 재료인 옻을 대량 구매해 정교한 장인의 손길을 빌려 위세품 재료로 아낌없이 썼으며, 오수전을 무기집에 붙이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그 권위를 과시했다는 사실이었다. 박 원장은 “땅 위에 올라온 뒤 검은빛이 빛을 받아 반짝거리던 순간, 시간이 2000여년 전 진한 시대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고 떠올렸다.


양지리 목관묘의 발굴 성과를 알려주는 문화재 전시 마당이 새해 눈길을 끈다. ‘떴다! 지배자’란 제목 아래 국립대구박물관에서 지난해 12월18일부터 열리고 있는 테마전이다. ‘새로 찾은 2000년 전 경산 양지리 널무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전시는 2000여년 전 한반도 남쪽 대구 근교의 경산벌을 다스린 진한의 젊은 지배자의 삶과 옛 중국 동전 오수전이 박힌 꺾창집, 청동창, 투겁창 창집 등 국보급 부장품을 소개하는 자리다. 국립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센터가 2년 넘는 후속 작업을 통해 출토품 세부에 품은 역사적 정보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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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리 널무덤에서 나온 호랑이 모양 청동제 허리띠 장식(호형대구). 영남권에서 출토된 고대시기의 다른 호형대구와는 이미지가 다소 달라 보인다.

중국 동전인 오수전을 창집에 점점이 박아 재력을 자랑하고, 완벽하게 옻칠된 창과 창 자루 등 최고급 유물을 쓰면서 위세를 떨친 이는 과연 누구였을까. 전문가들이 조사한 결과, 그 주인공은 놀랍게도 20대 청년이었다. 목관묘에서 발견된 인골 치아 분석을 통해 무덤 주인은 20대 청년이고, 안에 흩어진 각종 어류의 뼈와 씨앗을 분석한 결과 바다에서 잡은 숭어 머리를 제수로 썼으며, 복숭아와 참외도 제상에 올린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 중요한 것은 목관묘와 요갱에 들어간 금속기의 출처였다. 철기는 상당수가 중국 북부지방 납을 포함하고 있었고, 아름다운 칠기집을 쓴 투겁창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됐다. 이런 분석 결과는 원삼국시대로 통칭하는 기원 전후 한반도 남부 세력이 이미 동아시아 문명권의 일원으로 국제화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은 이 땅의 고대 하면 대개 고조선이나 삼국시대만 떠올린다. 하지만 삼국시대보다 더 아득한 옛적 이 땅은 학계에서 삼한시대라고 뭉뚱그려 일컫는 소국의 시대였다. 양지리 목관묘 유물만 해도 학계에서 <삼국사기>에 거명된 경산 일대 압독국 지배자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지만, 압독국은 훨씬 후대인 기원후 2~3세기의 소국인데다 실체도 명확하지 않아 설득력이 떨어진다. 기원 전후 우리가 모르는 선조들의 소국이 읍락 단위로 경주, 대구, 경산, 창원 등에 웅거하면서 문명 경쟁을 벌였다는 것을 양지리 목관묘의 화려한 칠기 창집과 부장품은 말해준다. 중국, 일본, 북방 세력과의 교류상이 드러나는 목관묘와 요갱의 출토 유물이 진열된 테마 전시실을 둘러 보면, 세계와 진취적으로 만나 적응한 한류의 유전자가 선조들에게 이미 뿌리 깊게 박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국립대구박물관·성림문화재연구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