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라이프 ]

캠핑 모닥불 피우는 그 이유를 알려드립니다

by한겨레

어린 시절 연탄 갈기는 내 몫

방과 후 불놀이했던 추억

하지만 더는 ‘불’ 볼 수 없는 도시

티브이·유튜브 불빛이 대신하지만

따스한 불의 정서적인 속성 복제 못 해

한겨레

괜스레 고생하면서 캠핑장을 찾는 이유엔 모닥불이 전하는 특유의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클립아트코리아

한겨레

얼마 전 이사 온 동네에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오래된 한옥이 꽤 많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창을 열면 매캐한 연탄가스 냄새가 풍겨온다. 아마도 연탄불로 난방하는 한옥이 많으리라. 덕분에 공기청정기가 바빠진다. 요즘도 연탄 때는 집이 이렇게 많구나.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연탄이라는 에너지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다. 몇 해 전 베이징에 출장 갔을 때 후통 지역에 숙소를 잡았는데, 그때 맡았던 공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약 30년 전, 어릴 적 살던 우리 집도 생각났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몇 가지 집안일을 도와야 했는데, 그중 하나가 연탄 갈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살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킨다는 게 좀 가혹하다는 느낌이 들지만, 어쨌든 나는 구들장이 식기 전 캄캄한 새벽에 일어나 샛별이 반짝거리는 마당을 돌아, 시커먼 ‘정지’(사투리인 줄 알았는데, 부엌을 뜻하는 몽골어라고 한다)에 들어가서, 하얗게 탄 아랫장을 들어내고, 구멍을 정확히 맞춰 윗장을 끼우는, 일상적 임무를 별 탈 없이 마치곤 했다. 때로 연탄끼리 들러붙으면 칼로 탁탁 쳐서 깨어지지 않게 떼기도 하고, 연탄 구멍을 돌려서 맞추고, 온돌 파이프와 연결된 주황색 플라스틱 통에 물을 보충하기도 했다. 그리곤 다시 방에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이 들었다.

한겨레

연탄불. 클립아트코리아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인간의 음식은 결국 불을 먹는 것이라고 했을 때 나는 어릴 적 연탄불 석쇠 위에서 익어가던 두꺼운 삼천포 쥐포를 떠올렸다. 바슐라르는 전자레인지 쥐포와 연탄불 쥐포의 맛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30년간 잊고 지냈다. 시골집 장작에서 도시의 연탄으로, 그리고 가스와 전기로 우리나라 주거의 에너지원이 점차 바뀌면서 우리는 조금씩 불의 경험, 직화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다.


직화란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열원이며, 복사열이다. 손바닥과 얼굴 피부에 직접 닿는 따뜻함이다. 겨울철에 일본 규슈 구마모토의 한 옛집에서 묵었을 때다. 주인이 넣어주었던 화롯대 위에 발그레한 불잉걸이 빛나고 있었다. 손님을 위해서 힘들게 숯을 피웠을 생각을 하니 그 정성이 귀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현대식으로 개조하지 않은 전통 다다미방은 무시무시하게 춥기 때문에 뜨끈한 탕 목욕과 압사될 듯 무거운 이불, 그리고 화롯대는 필수 조건이다. 그런데 온돌 바닥이 지글지글 끓는 한옥에서도 숯을 담은 화롯대가 왜 필요한 것인지 나는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웃풍이 심한 탓도 있겠지만, 살다 보니 복사열과 전도열의 질적 차이를 조금씩 느끼게 됐다. 나는 한옥에 묵을 때마다 뜨거운 바닥과 차가운 공기의 온도 차가 꽤 불편했다. 일단 코가 막히기 시작하면서 내내 잠을 설친 적도 있다. 옛날 사람들은 그 차이를 화롯대의 복사열로 보완했던 것이다. 복사열은 우리 몸이 수십만년 동안 가장 친숙하게 적응해 온 난방원, 다름 아닌 모닥불이다. 캠핑 의자에 앉아 탁탁 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꾸벅꾸벅 졸았던 사람은 이해할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온실가스와 미세 먼지 문제가 심각하다면서도, 굳이 비싼 나무 장작이나 차콜 태우며 시간을 보내는 이유다.

한겨레

옛날 한옥. 클립아트코리아

복사열과 전도열의 차이는 단지 전달 방식에 그치지 않는다. 탄 음식이 건강에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직화구이와 바비큐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 이쯤 되면 불은 연료나 에너지원 이상으로 무언가 정신 건강의 측면과 연관되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영어에서 화덕을 의미하는 허스(hearth)는 ‘가슴’을 뜻하는 하트(heart)와 비슷하다. 어원학상으로 전혀 다른 유래라지만 실제 허스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가슴 역할을 했다. 식사와 대화를 통해 마음을 전하는 수단이다. 화덕에서 타는 불이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화염과 색을 갖춘 구체적인 형체다. 단순히 밥을 짓고, 난방을 하는 이상으로 불은 시각적이고도, 정서적인 존재였다. 수십만년 동안 인간의 뇌리에 박히도록 마음과 정을 나누는 매개체였다. 우리는 불맛, 스모크향을 통해서 영장류적 유대감을 추억한다.

한겨레

경북 청송군에 있는 조선시대 가옥 송소 고택(국가민속문화재 제250호). 솔가지를 때우면 솔 향기가 방에 은은하게 퍼진다. 최이규 제공

그런데 사람들은 더 이상 집 안에서 시뻘건 불을 보지 않게 됐다. 벽난로가 보급되기 전까지, 서양의 집은 방 한가운데 화덕을 두고 요리와 난방을 겸했다. 동북아에서는 일찍부터 온돌이라는 전도성 난방 체계가 발전했지만, 여전히 부뚜막을 통해 일상적으로 직화를 사용하고 있었다. 불이 벽 속으로, 무쇠 난로 속으로, 스토브 속으로, 보일러와 열선 속으로 점점 더 모습을 숨기면서 연기의 괴로움은 줄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깜박깜박하는 붉고 노란빛의 리듬, 그리고 불가에 앉아 나누는 대화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됐다.


무엇보다 진정으로 휴식하기가 힘들어졌다. 불이 잠들 수 없을 만큼 적절히 긴장된 쉼을 주는 반면, 정적과 어둠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찾은 불의 대체 수단은 방송 같은 영상 매체였다. 습관적으로 티브이나 유튜브를 켠다. 굳이 보려는 것도 아니다. 그저 깜박거리는 불빛과 웅얼거리는 소음이 우리 디엔에이 속 모닥불의 추억을 상기시키며 위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상은 여전히 불의 따뜻함이라는 속성을 복제하지 못했다. 안전하고 쾌적해졌지만, 차갑고 지루하다.

한겨레

불은 공간의 정서적 요소다. 근래 지어진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모조 모닥불. 최이규 제공

요즘 다시 유행하고 있는 소극적인 대안은 촛불이다. 어떤 브랜드는 장작이 빠직거리듯 소리 내며 타들어 가는 심지를 삽입하기도 한다. 인간은 모닥불과 연기를 복제하기 위해 담배라는 휴대용 미니 장작도 만들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불의 모조품일 뿐이다. 권태로움을 달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불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집과 도시를 벗어나야 한다. 괜스레 고생해가며 캠핑이라는 불편함을 구매한다. 모기에 뜯기고, 땀 냄새에 절고, 북풍한설에 오들오들 떨면서도 그깟 불 피우고 모여앉아 히죽거리며 시간을 죽이는 재미에 상당한 돈과 정성을 들인다.


생각해보면 예전 아이들은 불을 가지고 노는 데 익숙했다. 방과 후에 놀러 가면, 내 친구는 썰렁한 부엌에서 성냥을 착 그어 석유풍로를 켜고, 마가린과 조미료 맛이 능숙하게 배어든 계란볶음밥을 후다닥 만들곤 했다. 겨울이면 밖으로 천지 사방을 뛰어다니다가도 마무리는 으레 동네 공터 한 귀퉁이에서 불을 피우는 것으로 귀결됐다. 나무 조각, 마른 잡초, 쓰레기 등 태울 것은 주위에 널려있었다. 딱히 추워서도 아니었고, 꼭 무언가를 익혀 먹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은 그저 타닥타닥 타는 불 주위에 모여 앉아 말없이 온기를 쬐는 인류의 오랜 습관을 반복한다.


예전의 도시에는 그런 허술한 공간이 많았고, 불장난하는 아이들을 말리는 어른은 없었다. 지상부의 땅이 한 뙈기 여유도 없이 용도 별로 배분된 도시에 사는 요즘 아이들은 안전할지는 몰라도, 참 불쌍하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놀이 중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다. 물론 집은 예전보다 훨씬 따뜻하고 밝고 안전하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불이라는 감각적 매체와 복사열에 대한 경험을 상실했다. 정서의 차원이 빠져버렸다. 현재 우리는 불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집에 살고 있다. 불이 주었던 유대감과 정서적 토대, 재미는 과연 다시 채워질 수 있을까?


최이규(계명대학교 도시학부 생태조경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