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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지옥 알고 보면 인간적인 곳?

by한겨레

김태권의 지옥여행

한겨레

김태권 그림

“도도도 미∼시 라∼솔∼, 도레미 도∼(높은)도 솔∼.” 귀에 익은 가락이다. 푸치니의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 나오는 노래 ‘아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다.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은 “푸치니의 쟁쟁한 오페라 아리아 중 독보적인 지명도를 가지고 영화음악·광고음악·국악과 팝 등 크로스오버(심지어 남자 성악가들도 부름)로 자주 등장하는 아름다운 아리아”라고 소개한다.


제목과 선율만 듣고 ‘아버지에 대한 딸의 애틋한 효심의 노래인가’ 짐작하기도 하지만, 알고 보면 노랫말이 ‘막장’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아빠, 난 그이가 좋아요. 잘생겼잖아요. 그이와 결혼 못 하면 나는 아르노강에 빠져 죽을 거야!” 정도의 협박이랄까.


줄거리는 한술 더 뜬다. 배경은 중세 피렌체. 부잣집 도나티 집안에서 잔니 스키키에게 껄끄러운 일을 부탁한다. 돈 많은 친척 영감이 죽으며 전 재산을 수도원에 기증하려고 하니, 유언을 위조해달라는 것이다. 잔니 스키키는 내키지 않지만 일을 맡는다. 딸 라우레타가 도나티 가문의 리누초라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요약하니 어두운 범죄물 같지만 “푸치니의 열두 작품 중 유일한 희극”(백재은), 유쾌한 단막극이다. 잔니 스키키는 죽은 사람으로 변장한 채 공증인 앞에서 유언을 한다. 반전이 있다. 도나티 집안사람들에게는 약속과 달리 시시한 물품을 넘기고 “친구 잔니 스키키에게” 큰 재산과 값나가는 노새를 남긴다고 했다.


결혼도 하게 되고 (재산도 한몫 챙긴) 라우레타와 리누초 커플을 바라보며 잔니 스키키는 관객에게 노래도 없이 말을 건다. “관객 여러분, 도나티 집안의 돈이 이보다 잘 쓰일 수 있을까요? 이 일 때문에 나는 지옥에 갑니다. 그러라고 하죠. 하지만 여러분도 이 공연이 즐거우셨다면, 거룩한 단테 선생도 허락할 테지만, 정상참작 좀 해주세요.” 이 칼럼에 단골로 나오던 단테의 이름이 오페라에도 등장한다.


사연은 이렇다. <신곡>의 옛날 주석가들에 따르면 잔니 스키키 데 카발칸티는 13세기 피렌체에 살았던 역사 속 실제 인물이다. 먹고살 만한 기사 신분의 사람이었지만, 도나티 가문의 유언 위조 사건에 끼어들었다. 죽은 사람으로 변장한 채 공증인 앞에서 거짓 유언을 남기고 자기 몫으로 (노새가 아니라) 값나가는 명마를 챙겼다고 전한다.


잊힐 뻔한 엽기 사건인데, 도나티 집안이 단테의 처가였다는 사실이 문제다. 단테는 관대한 편도 아니었고, 처가 덕도 보던 사람이다. (시를 쓸 때면 첫사랑 베아트리체 타령을 했지만 말이다.) 사건에 연루된 도나티 집안사람들은 내버려둔 채, 단테는 잔니 스키키를 <신곡>에서 지옥 제8원의 제10구덩이에 집어넣었다. 가벼운 죄인은 제1원에, 나라 팔아먹고 가족을 죽인 흉악범은 제9원에 있으니, 제8원이면 중죄인이다. 그곳 구덩이 열개 중 열번째.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잔니 스키키는 지옥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발광했고, 거기서 영원히 미쳐 날뛰는 중이라고 한다(제30곡).


이 오싹한 이야기를 비틀어 푸치니가 아름다운 음악을 지었다. 알고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콩가루 부잣집 남자와 결혼할 나를 위해 아빠가 지옥에 가주세요”라는 아리아가 아닌가. 그래도 자기는 지옥에 가지만 딸이 사랑(과 돈)을 얻었으니 잔니 스키키는 행복했을 것 같다. 지옥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끝>


김태권(지옥에 관심 많은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