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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초췌한 안중근 사진은 과연 일제가 그를 비하하려 연출했나

by한겨레

[노형석의 시사문화재]


의사 안중근 유명하게 만든 ‘단지’ 드러낸 사진

일부선 “일제가 안 의사 비하용으로 연출” 주장

도진순 교수 “민중들 감명받아 기념용 구입” 반박

14일, 안 의사 사형선고 받은지 111년 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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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 일제 당국이 최초로 공개한 안중근의 사진을 바탕으로 일본인 업자가 만든 사진엽서. 쇠사슬에 묶인 채 꿇어앉은 모습이다. 국내 학계 일부 연구자들은 이 사진엽서가 안 의사를 비하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사 안중근(1879~1910)이 독립지사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일반에 각인된 데는 사진 매체의 위력이 컸다. 1909년 10월 거사를 치른 뒤 한달도 안 돼 그 용모를 담은 사진이 신문과 엽서로 대량 유포됐고, 대중이 이를 열광적으로 사들이는 전례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삽시간에 한국과 일본 전역에 그의 얼굴이 알려졌다.


후대 한국인에게 그는 10종이 넘는 다양한 사진 이미지로 기억된다. 약지 첫 마디를 자른 ‘단지’의 흔적이 보이는 왼손을 코트 위에 올린 모습이나 흰 한복을 입은 사형 집행일의 모습 등은 애국선열의 대표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러일전쟁 전후 일본에서 유행한 사진 매체의 전파력 덕분이었다. 업자들은 각지에 대리점을 만들고 사진을 간편한 크기의 엽서 형식으로 인쇄해 신속하게 유통했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고 엽서로 배포한 일제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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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1월28일치 <오사카마이니치신문> 에 실린 안중근의 사진을 토대로 제작된 사진엽서. 무명지 잘린 왼손을 가슴에 대고 부각한 포즈가 눈에 띄는 이 사진엽서는 일제가 안 의사의 비하용으로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역사학자인 도진순 창원대 교수가 관련 논의에 불을 지폈다. 지난 연말 역사학회 기관지 <역사학보> 248호에 ‘안중근 사진엽서와 국제연대: 비하와 찬양, 그리고 전용·전유’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면서다. 도 교수가 겨냥한 건 지상파의 안중근 관련 다큐멘터리들이다. 이들 프로그램은 일제강점기 대량 보급된 사진엽서가 안 의사를 비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산됐다는 비판을 해왔다.


2014년 8·15 특집 다큐 <안중근 105년, 끝나지 않은 전쟁>(문화방송)은 일제가 배포한 사진엽서 2장에 안 의사가 쇠사슬로 묶여 꿇어앉은 초췌한 모습으로 연출됐다고 주장했다. 일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1871~1911)가 엽서에 안중근 찬양 한시를 추가한 새 판본을 제작하면서 기존 엽서의 비하 시도를 좌절시켰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도 교수는 이를 국수적 민족주의의 과장·왜곡이라고 반박한다. 사진 원본은 안 의사의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수사 자료 성격인데, 일반에 유포되면서 기념물 성격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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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무정부주의 사상가 고토쿠 슈스이가 갖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사진엽서 견본. <오사카마이니치신문> 의 사진을 쓴 기존 엽서의 설명을 영역한 설명으로 바꾸고 사진에 안 의사를 찬양하는 자신의 한시를 써넣었다. ‘목숨 버려 의로움을 취하고 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루었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신문에 안 의사 사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거사 보름 뒤인 1909년 11월9~10일께였다. 안 의사가 중국 뤼순에 압송돼 심문을 당하기 직전이다. 범인의 본명이 안중근이라는 사실과 함께 두 종류의 사진이 일본과 한국의 신문에 실렸다. 쇠사슬에 묶이고 족쇄가 채워진 채 문 앞에 선 안 의사의 전신 사진과 무릎 꿇은 사진이다.


<경성신보>는 그해 11월10일치에 ‘흉한 안응칠(안중근) 사진’이란 제목 아래 사진의 내력을 기술했다. 경시청을 비롯한 각 도 경찰서에 연루자 검거를 위해 배포한 것이란 설명이다. 수사용 사진을 보도용으로 내놓은 셈인데, 업자들이 엽서 소재로 활용하면서 조선 민중의 관심과 숭배를 가속화했다. 국내 학계 일부에선 쇠사슬에 묶인 안중근의 모습을 담은 엽서가 비하 의도였다고 단정했지만, 실제 유통·구매 양상은 달랐다. 사진 속 안 의사의 눈빛과 풍모에 감명을 받은 대중이 앞다퉈 엽서를 구매하자 당황한 당국이 판매를 엄금하는 조처를 내렸다는 기사가 무수히 남아 있다.


1909년 11월28일치 <오사카마이니치(매일)신문>이 안 의사 사진을 엮어 만든 엽서도 마찬가지다. 무명지 잘린 왼손을 가슴에 댄 자세가 눈에 띄는 이 엽서는 2015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광복 70주년 기념 특별전: 울림, 안중근을 만나다’에서도 ‘범죄자 안중근을 부각하려는 의도로 발행된 사진엽서’라고 소개됐다. ‘이토 공을 암살한 안중근’이란 제목 아래 ‘한인은 고래로부터 암살의 맹약으로 무명지를 절단하는 관습이 있는데, 그 손을 촬영한 것’이란 설명이 붙었다. 일본에선 암살도 복수의 하나로 정당화하거나 찬양하는 경우가 있기에 이 문구를 놓고 비하 의도라고 단정하기엔 근거가 빈약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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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샌프란시스코 교민사회의 신문 <신한민보> 의 1910년 3월30일치 논설에 실린 고토쿠 슈스이의 찬양 한시가 붙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 고토쿠가 갖고 있다가 미국의 동지들에게 영문 설명을 받기 위해 보내준 안 의사 사진엽서 견본을 그대로 싣고 제목을 ‘만고 의사 안중근 공’이라고 표기한 것이 눈에 띈다. 당시 안중근 의거로 한국과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촉발된 아시아 평화운동의 연대를 보여주는 희귀한 사료다.


이 엽서는 20세기 초 일본 무정부주의자 고토쿠 슈스이가 안중근을 찬양하는 한시를 쓰면서 각색됐다. 미국의 동료 운동가에게 보내져 영문 해설도 붙었다. 이 과정에서 한인단체 국민회의 북미지역 총회 기관지 <신한민보>가 엽서를 입수했고, 안 의사 순국 직후인 1910년 3월30일치에 추모 논설과 함께 소개됐다고 한다.


고토쿠는 1910년 6월 ‘대역사건’으로 체포돼 처형을 당해 그의 한시 엽서가 인쇄되진 못했지만, 미국 동포신문이 사진엽서 이미지를 실으면서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이다. 도 교수는 “안 의사의 사진엽서가 미국에 건너가 지식인의 평화연대를 촉발하며 전파된 것은 안중근 거사의 세계적 의미를 보여주는 일화”라며 “닫힌 민족주의에 기대 엽서를 비하의 산물로만 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 마침 설 연휴 마지막 날인 14일은 안 의사가 111년 전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도진순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