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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우리 한글 워드프로세서 하나 개발해볼까?

by한겨레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시간의 극장 - 제32화 한컴과 이찬진

한겨레

1988년 겨울. 서울대 기계공학과 85학번 이찬진, 전자공학과 86학번 김형집, 제어계측공학과 87학번 우원식은 “정말 쓸 만한 한글 워드프로세서 하나 개발해보자”고 결의한다. 이른바 서울대생들의 ‘하숙방 결의’다. 이후 셋은 집·하숙방·학교를 오가며 토론과 개발에 몰두한 끝에 1989년 4월 어느 날 이찬진의 컴퓨터 화면에 ‘한글’ 글자가 떠오르게 하는 데 성공한다. ‘보석글’과 ‘하나워드’ 등을 제치고, 나아가 미국 공룡 소프트웨어 회사 마이크로소프트(MS)의 ‘엠에스 워드’와 경쟁해 살아남은 세계 유일 토종 소프트웨어 ‘아래아 한글’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해설 김재섭


이찬진, 김형집, 우원식

서울대생 3인의 ‘하숙방 결의’

어느날 컴퓨터 화면에 한! 글!

윈도 등장 이후 휘청거리다

엠에스워드에 밀려 사라질 뻔

사용자들 뭉쳐 다시 살려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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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2월24일치 <한겨레> 의 이찬진 전 대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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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7월25일치 <한겨레> 에 실린 이찬진 전 대표의 사진. <한겨레> 에 보도된 첫 얼굴 사진이다. 안종주 기자가 취재하고 촬영했다.

컴퓨터·소프트웨어 분야를 취재하는 신문사·잡지사 기자들의 모임 ‘한국컴퓨터기자클럽’은 1989년 ‘올해의 인물’로 한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아래아 한글’(한글) 공동 개발자 이찬진(24) 등 4명을 선정했다. <한겨레> 1989년 12월24일치 8면에 실린 기사이다.


“1989년 4월24일 ‘한글 1.0’을 내놓은 이후 5년 동안 53만9천개가 팔렸다. 지난해(1993년) 한글 매출은 103억원이고, 올해 매출 목표는 130억원이다.”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이 1994년 <한겨레>와 인터뷰(5월2일치)를 하면서 밝힌 한글 매출 규모다. 한글이 문서편집 소프트웨어(당시는 ‘워드프로세서’라고 불렀다)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치들이다.


인천 제물포고 출신인 이찬진은 대입학력고사를 치른 뒤 아버지한테서 개인용컴퓨터(애플 8비트)를 선물받았다. 이를 계기로 컴퓨터·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찬진은 서울대에 입학해 ‘컴퓨터연구회’ 동아리에 들어가 김형집과 우원식을 만난다. 셋은 “편리한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자”는 데 의기투합해 한글을 탄생시킨다.


당시 개인용컴퓨터(PC) 운영체제(OS)는 ‘도스’(DOS)였다. 한글 문서편집 소프트웨어의 경우, 삼보컴퓨터가 외국 것을 한글화해 ‘보석글’이란 이름으로 보급하고 있었는데, 한글의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이를 보완한 한글은 시험판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위탁판매를 자청하는 기업이 줄을 섰다.


1990년 10월, 하숙방 결의 3인방은 한글 위탁판매 수익금 5천만원으로 ‘한글과컴퓨터’(대표 이찬진·이하 한컴)를 설립한다.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고안한 공병우 박사가 빌려준 4평짜리 사무실에서 직원 4명으로 출발했다. 이찬진 사장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회사 설립 이유에 대해 “밤잠 설치고 개발한 소프트웨어가 대기업 컴퓨터의 고객서비스 보조품 정도로 취급받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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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2월,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대표이사가 <한겨레21> 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변재성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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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3월23일치 <한겨레21> 에 실린 한글과컴퓨터의 첫 윈도용 워드프로세서 ‘한글 3.0’ 광고. 전국을 순회하며 ‘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공연을 곁들인 발표 행사를 열고 기존 사용자들에게 무료 교환 및 특별 할인 쿠폰을 제공하는 등 당시로서는 꽤 파격적인 마케팅 내용을 담고 있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한컴의 비전은 “컴퓨터를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컴퓨터를 쓰는 사람들이 지금보다 훨씬 큰 만족이나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1995년 <한겨레21> 인터뷰)이라고 밝혔다.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는 한국이 유리할 수 있다”는 ‘컴퓨터 세계의 신토불이론’도 폈다. 실제로 한컴은 1994년 260여명의 임직원이 151억원의 매출을 올려 30억원의 순이익을 내며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 점유율 1위 업체로 성장했다.


시장 환경은 급변했다. 엠에스가 윈도 운영체제를 내놨다. 컴퓨터 사용법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동시에 ‘우루과이라운드’ 영향이 본격화했다. 엠에스 등 미국 글로벌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국내 시장으로 몰려왔다. 국내 대기업 삼성전자는 ‘훈민정음’으로 윈도용 한글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뛰어들었다. 게다가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사용이 기승을 부렸다.


변화를 따라잡거나 앞장서면 살아남고, 그러지 못하면 도태됐다. 기술·자금력에서 글로벌 업체에 밀리는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가 바람 앞의 등불 처지로 몰렸다. 도스용 워드프로세서 시장에 집중하던 한컴도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글로벌 업체와 손을 잡기도 했다. 외국 업체를 끌어들인다는 비판은 들리지 않았다.


이찬진 사장은 1994년 5월 <한겨레> 인터뷰에서 “오는 6월 열리는 컴퓨터·소프트웨어 전시회에서 윈도용 한글(3.0)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듬해 3월18일 한컴은 윈도용 한글을 내놓는다. “‘엠에스 워드’와 달리 조합형 한글 표기 방식을 채택해 옛 글자를 포함해 모든 한글을 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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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14일치 <한겨레> 12면에 실린 나눔기술과 한글과컴퓨터의 젊은 개발자들 모습.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진홍 기자 촬영.

“한컴이 공중분해되고, 한국의 빌 게이츠로 일컬어지던 이찬진 신화도 깨질 가능성이 높다.” 1997년 11월4일치 <한겨레> 기사다. <한겨레>는 한컴이 이런 처지로 몰린 이유로 “벤처 정신이 희석된 점”을 꼽았다. “시장을 정확하게 예측해 그에 맞는 제품을 발빠르게 내놓는 것으로 승부를 걸기보다, ‘이찬진’과 ‘아래아한글’의 유명세에 의존하는 안이한 자세를 지녀 이런 결과를 불렀다. … 업계에선 한컴의 위기를 자금 위기가 아니라 벤처 정신의 위기로 풀이하는 견해가 많다.”


이찬진의 ‘외도’를 비판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나라당 전국구 의원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린 상태였다. 이회창 한나라당 명예총재의 대선 출마를 위한 의원직 사퇴에 따라 1997년 12월20일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되지만, 5개월도 안 돼 “어려워진 회사 경영에 전념하겠다”는 이유를 들어 의원직을 사직한다.


“한글 개발을 전면 중지하고, 1년 안에 판매도 중단한다.” 1998년 6월15일, 한컴은 한국엠에스와 공동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엠에스가 한컴에 1천만~2천만달러(약 140억~280억원)를 투자하고, 한컴은 워드프로세서 개발을 중단하는 대신 인터넷 사업 개발에 집중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찬진 사장은 “불법복제가 횡행하는 상황에서 더이상 워드프로세서 시장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맞서 승부를 걸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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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15일,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왼쪽)과 김재만 한국마이크로소프트 사장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기에 앞서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날 둘은 ‘마이크로소프트가 한컴에 최대 240억원가량을 투자하는 대신 한컴은 아래아한글의 개발과 판매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정우 기자가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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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웨어 불법복제는 이찬진 전 대표에게도 고민거리였다. 소프트웨어 유통질서 확립 궐기대회 모습. 1996년 4월3일 <한겨레21> 이혜정 기자가 촬영했다. 공개되지 않았던 비컷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언론도 이 소식을 앞다퉈 보도했다. ‘한글’ 살리기 운동도 일었다. 한글을 ‘국민 공개소프트웨어’로 만들자는 주장도 나왔다. “사람들은 한컴의 몰락 원인으로 불법복제 관행을 지적하며 반성하기도 하고, 경영진의 무분별한 사업 확장을 성토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아래아한글만은 살려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정품 사주기에서 국민주 모금까지 아래아한글 살리기 방법에 대한 제안도 풍성하다.”(<한겨레21> 1998년 7월2일치)


‘아래아한글’이 엠에스 워드와 다른 강점도 다시 조명받았다.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은 한글 1만1172자를 모두 표현할 수 있고, 옛글자도 키보드에서 곧바로 입력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프로그램이라는 점 때문이다. 한글이 퇴장할 경우 워드프로세서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큰 엠에스 워드가 표현할 수 있는 한글 글자수는 2850자에 불과하다.”(<한겨레21> 1998년 7월2일치 ‘한글 1만1천여자 불구로 만들 건가’)


<한겨레>의 목울음 섞인 기사와 칼럼은 독자와 한글 사용자들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한글을 되살려냈다. 한컴은 7월20일 기자회견을 열어 “‘아래아한글 지키기 운동본부’가 한컴 인수를 공개 제의해왔다”며 엠에스와 한 합의를 번복한다고 밝혔다. 광복절(8월15일)에 맞춰 ‘한글 8·15판’을 내놔 ‘소프트웨어판 금 모으기’ 상황을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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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7월20일, 이찬진 한글과컴퓨터 사장(오른쪽 둘째)이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아래아한글 지키기 운동본부’(본부장 이민화 벤처기업협회장·왼쪽 둘째)가 공개 제안한 투자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손홍주 기자가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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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8월16일 서울 용산전자상가에서 한글과컴퓨터가 내놓은 1만원짜리 ‘아래아한글 8·15 특별판’을 사용자들이 고르고 있다. 아래아한글을 벼랑 끝에서 되살린 제품이다. 고 이종근 <한겨레> 사진기자가 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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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9월3일치 <한겨레21> 에 실린 한글지키기운동본부와 한글과컴퓨터 공동 광고. 한글과컴퓨터가 미국 공룡 소프트웨어 회사 마이크로소프트(MS)의 ‘포로’가 될 뻔했다가 한글지키기운동본부 덕에 살아난 뒤 내놓은 ‘한글 8·15 특별판’을 애정어린 눈으로 봐달라고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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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과컴퓨터를 ‘아래아한글 지키기 운동본부’로 넘긴 뒤 1999년 5월 회사를 떠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 ‘드림위즈’를 창업한 이찬진씨가 ‘스마트폰 전도사’를 자처하던 2010년 모습.

1999년 5월, 하숙방 결의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회사에 남아 있던 이찬진이 마지막으로 한컴을 떠났다. 그는 회사를 떠나며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단속과 아래아한글 8·15판에 대한 국민들의 호응에 힘입어 회사 경영이 좋아지고 있다. 회사를 방만하게 경영해 어려움에 빠지게 했던 것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고, 새 경영진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후 한컴은 팔리고 팔리기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한컴그룹’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한글과컴퓨터가 보여주었던 도전의 역사는 지금도 기억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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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자인 김재섭 선임기자는 1994년 한겨레 기자로 입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방송통신위원회 등 통신·아이티(IT) 정책 부처와 관련 업계를 주로 담당해왔습니다. 정보통신 산업·기술 흐름에 더해 정보인권 및 이용자 권익 보호에 특별히 관심이 많습니다. 정보통신 전문기자와 산업팀장을 지냈고, ‘김재섭의 뒤집어보기’를 장기 연재 중입니다. 2019년 4월부터 사람과디지털연구소장을 겸직하며, ‘김재섭의 따뜻한 디지털’ 칼럼을 운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