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안데스에는 도시에 없는 무지개, 은하수, 웃음이 있었다

[여행]by 한겨레

남반구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 안데스


페루 우아라스에서 걷기 시작했는데…


안내인 마르가리타의 환대에 감동


무지개, 야생화, 은하수에 또 감동

한겨레

안데스에서 으뜸으로 꼽는 블랑카 산군에 속하는 페루의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 사진 노동효 제공

한겨레

‘안데스’의 어원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가장 유력한 설은 ‘동쪽’을 가리키는 케추아어 ‘안티’(Anti)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잉카제국 당시 영토가 서쪽은 바다고, 동쪽으로 갈수록 산이 많았기에 ‘높은 산마루’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추정한다. 안데스는 지구 남반구에서 가장 거대한 산맥이다. 평균 높이에선 히말라야에 못 미치지만, 길이에선 히말라야산맥(2400㎞)의 3배인 7200㎞, 지구 둘레의 6분의 1에 이른다.


안데스에서 가장 대중적인 트레킹 코스로는 토레스델파이네, 피츠로이, 산타크루스 코스가 있다. 토레스델파이네 코스는 ‘신들의 정원’을 걷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한다. 피츠로이 코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를 보는 것 자체가 최고의 맛이다. 산타크루스 코스는 ‘압도적 규모’가 여행자의 심장을 뒤흔든다. 안데스에서 으뜸으로 꼽히는 블랑카 산군, 우아스카란(해발 6768m)을 비롯해 6000m 이상 봉우리만 15좌에 달하는 산악지대다. 여정은 페루 우아라스에서 시작된다.

한겨레

페루의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 사진 노동효 제공

우아라스로 가는 길은 멀었다. 통상 여행자들은 리마에서 해안선 따라 북상하다가 다시 내륙 산악도시인 우아라스로 향한다. 나는 해안 길 대신 산맥을 타는 길을 택했다. 해발 2000~4000m를 넘나들며 아야쿠초, 우앙카요, 우아누코를 지나는 길을 여행자들은 꺼렸다. 최근까지 반군이 활동했던 탓이다. 나는 오랜 여행으로 살갗이 까맣게 탄데다 기운 자국투성이 복장, 털어봐야 털 것도 없는 히피 꼴을 한 채 현지인 사이에 파묻혀 흘러 흘러 갔다.


우아라스 도심에 숙소를 잡고 여행사를 찾아 나섰다. 야영 장비를 대여하는 곳도 있었지만, 가이드 없이 낯선 산길을 가는 건 무리일 듯했다. 가장 합리적인 비용을 제시하는 여행사를 선택했다. “아침 7시 숙소로 픽업 차가 갈 겁니다.” 다음날 등산용 스틱을 챙겨 숙소를 나서자 곧 카샤팜파로 향하는 차가 왔다.

한겨레

페루의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 사진 노동효 제공

산타크루스 트레킹은 우아스카란 국립공원 내 ‘카샤팜파’와 ‘바케리아’, 두 지점을 3박4일에 걸쳐 걷는 코스다. 여정을 이끌 안내자는 젊은 여인이었다. 그을린 피부, 까만 눈동자, 작은 키에 당당한 케추아족 여인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의 이름은 마르가리타. 우리, 그러니까 함께 트레킹을 할 친구들 국적은 다양했다. 프랑스, 네덜란드, 독일, 스페인, 영국. 나를 제외하면 모두 유럽인이었다.


“하루 15㎞ 정도 걸어. 첫째, 둘째 날은 쉽고 셋째 날만 힘들어. 도시락, 물만 챙기고 나머지 짐은 여기 다 모아 줘.”


배낭을 내려놓자 짐꾼이 당나귀들 등에 실었다. 다른 당나귀들 등엔 텐트, 침낭 등 야영 장비가 실렸다. 트레킹 코스엔 숙소가 없었다. 마부가 당나귀 등에 짐 싣고 야영지로 가서 텐트 치고 식사를 준비하면 저물녘 도착한 여행자들이 먹고 자는 식이었다.

“마르가리타는 얼마 만에 이 길을 가?”


“오늘 카샤팜파에 도착해서 다시 되돌아가는 거야.”


“쉬지 않고 바로 떠나면 힘들지 않아?”


“아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해.”


“남편은?”


“없어. 혼자 키워. 산이 집처럼 편해서 피곤하진 않아.”


“아들은 몇 살인데?”


“이제 중학교 들어갔어.”

한겨레

숙소가 따로 없기에 당나귀 등에 야영 장비를 싣고 다니며 캠핑을 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파란 하늘. 뜨거운 햇살. 눈 녹은 물이 흐르는 유(U)자형 계곡 사이 오르막을 올랐다. 다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직 설산이 보이진 않았지만 자연의 품 깊숙이 들어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숫가에 이르러 도시락을 꺼냈다. 샌드위치, 바나나, 초콜릿, 오렌지주스가 들어 있었다. 마부 출로와 호세가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 “야영지까진 완만해. 텐트가 보이면 오늘 걷는 건 끝이야!” 출로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우리는 저마다의 속도로 오솔길을 즐겼다. 야생화에 마음을 뺏긴 나는 황혼 무렵에야 야영지에 닿았다. 해발 3650m. 각자 텐트에 짐을 내려놓고 공동 텐트에 모여 식사를 했다. 유럽인 친구들은 서먹서먹해서 말수가 적었다. 이럴 때 입을 열게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질문만 던지면 된다. “유럽에서 어느 나라 음식이 가장 맛있니?”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전이 벌어졌다. “프랑스 음식이 가장 맛있어.” “무슨 소리, 스페인 음식이 제일 맛있어!” “몰라서 그렇지 정말 맛있는 게 영국 음식이야!” “피시앤칩스가 맛있어 봐야 피시앤칩스지. 그게 음식 축에나 드니?” “맥주 안 마시는 나라 있니! 그거 독일에서 만든 거야!” 나중엔 귀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워서 괜한 질문을 했다고 후회할 정도였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채 열 올리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같이 웃던 마르가리타가 말했다.


“나 한국 음식 먹어본 적 있어.” “어떤 음식?” “닭고기수프 같은 거. 닭, 마늘 넣고 끓여.” “닭백숙이구나.” “닥빽쑥?” “응. 한국에 갔었니?” “한국인 단체여행객을 데리고 트레킹 한 적 있어. 닭, 마늘, 양파, 한국 술 잔뜩 갖고 왔어. 당나귀가 힘들어했어. 요리사에게 닥빽쑥? 만드는 법 가르쳐주고…. 줄곧 한국 요리만 해 먹었어.”


“한국 사람은 다 그러니?” 엿듣던 프랑스 친구가 끼어들었다. 젠장, 이번엔 내 얼굴이 달아오를 차례였다. “음… 나이 드신 분은 젊은이와 달리 외국 음식에 적응되지 않아서, 그런 분이 있긴 해”라고 얼버무렸지만 실은 히말라야에서도 숱하게 보고 들은 모습이었다. 아 참, “유럽에서 어느 나라 음식이 가장 맛있냐?”는 질문에 친구들이 내린 결론은 스페인 음식이었다.

한겨레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에서 만난 자연 풍경. 쪽빛 호수는 마음에 평화를 선물한다. 사진 노동효 제공

한겨레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에서 만난 자연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아침 식사를 하고 길을 나섰다. 출로, 호세가 텐트를 걷고 뒤따라오기로 했는데, 따라오는 이가 한명 더 있었다. 한명이 아니라 한마리라고 해야겠구나. 여행자를 따라다니는 개라고 마르가리타가 알려주었다. 머릴 쓰다듬으면 좋아했고, 사라졌다가 나타나곤 했다. 도시락을 까먹을 땐 곁에 앉아 나눠 먹었다. 반려견도, 들개도 아닌 ‘경계’에 있는 개였고, 하툰코차 호수를 지나자 사라졌다. 갈림길이 나오고 마르가리타가 말했다.


“왼쪽으로 올라가면 알파마요 전망대, 직진하면 야영지. 길 잃을 염려는 없으니 각자 가고 싶은 데로 갔다가 야영지에서 모이면 돼.”


종종 ‘파라마운트사 로고’가 알파마요(해발 5947m)를 그린 거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니다. 흡사한 모습 때문에 붙은 별칭일 뿐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멋진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것들은 느긋하게 즐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 봄꽃이 그렇고, 청춘이 그렇듯…. 일행은 서둘러 야영지로 향했고, 나는 나무 아래서 비가 그치길 기다리며 길을 돌아보았다. 여우비 아래 청옥빛 호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는데 앞을 보자 황홀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지개였다. 무지개로 만든 돔 같았다. 돔 안쪽은 빛으로 가득했다. 저 아래서 잠들겠구나!

한겨레

첫날 밤 묵은 야영지 풍경. 사진 노동효 제공

야영지에 도착하자 비바람이 거세졌다. 우리는 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텐트로 돌아갔다. 빗소릴 뚫고 다른 팀 가이드들과 마르가리타가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웃음소린 금방 구분할 수 있었다. 아기 웃음 같았으니까. 들은 바에 의하면, 갓난아기는 하루 평균 400번 웃고 나이가 들면서 횟수가 주는데, 한국 성인 여자는 하루 3번, 한국 성인 남자는 0.1회 웃는다던가? 잠들기 전까지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릴 들으며 도시인을 떠올렸다. 더 많은 것을 가졌지만 더 적은 웃음을 가진 사람들을.


비 그친 아침,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고도가 높아지자 네덜란드 출신 안나가 고산병 증세를 보이며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쓰던 등산용 스틱을 건넸다. 마침내 안나도 푼타우니온 고개에 올라섰다. 해발 4750m에서 바라보는 360도 파노라마. 에메랄드빛 호수와 설산, 압도적 풍경 앞에서 다들 입을 허 벌렸다.

한겨레

페루의 산타크루스 트레킹 코스. 사진 노동효 제공

야영지에선 목도리, 팔찌, 맥주를 파는 아낙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밤이자 산행 시작 이래 첫 음주였다. 우리는 고생한 스태프들에게 전해줄 팁을 모으기로 했다. “근데 얼마씩 내지?” 나는 공동 텐트 가운데 기둥에 주머니를 매달았다. “내일 아침 떠나기 전까지 각자 여유대로 넣는 게 어때?” “그거 좋은 생각이다!” 잠들기 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은하수가 남아메리카의 하얀 등뼈 위를 지나고 있었다.


다음날 우아라스행 미니버스가 기다리는 바케리아로 내려갔다. 우리는 떠나고 마르가리타는 남았다. 또 다른 팀을 데리고 되돌아간다고 했다. 안데스산맥을 누비며 눈뜨고 잠드는 여인, 작별의 포옹을 하는데 그에게서 안데스의 냄새가 났다. 설산, 에메랄드빛 호수, 연둣빛 풀숲, 맑은 시냇물, 야생화와 무지개를 원료로 만든 향기 같았다. 우리를 향해 마르가리타가 손을 흔들었다.


노동효(<남미 히피 로드> 저자·여행작가)

한겨레
2021.03.05원문링크 바로가기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이런 분야는 어때요?

ESTaid footer image

Copyright © ESTaid Corp.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