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여행 ]

[ESC] ‘동백 파마머리’ 벽화는 어떻게 ‘핫플’이 되었나

by한겨레

신안 암태도 문병일·손석심 부부 벽화


젊은 여성, 꼬마, 만화 캐릭터 그림 될 뻔


천사대교 개통 당일 낙서 에피소드도


기획·실무 주도한 김지안 작가 등 인터뷰

한겨레

지난달 4일 신안군 암태도 기동삼거리 ‘동백 파마머리’ 벽화 앞에 선 벽화 주인공이자 집주인 문병일씨. 김선식 기자

지난 2년간 지역 명소를 넘어 전국적인 여행지로 이름 날린 벽화가 있다. 전남 신안군 암태도 기동삼거리에 있는 문병일(79)·손석심(79) 부부 집 벽화다. 은은한 미소를 띤 부부의 얼굴이 담벼락을 가득 채우고 있다. 두 사람의 머리는 잎이 무성한 동백나무 모양이다. 담장 안쪽에 자라는 동백나무는 벽화 위로 풍성한 머리를 완성한다. 유쾌하고 우스꽝스러운 머리 모양에 사람들은 반했다. ‘동백 파마머리’ 벽화라는 별칭도 붙였다.


2019년 4월4일 신안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총 길이 7.22㎞ 천사대교가 개통했다. 덕분에 신안 중부권 섬 압해도, 암태도, 자은도, 팔금도, 안좌도 전역을 차로 갈 수 있게 됐다. 벽화가 있는 기동삼거리는 북쪽 자은도 방향과 남쪽 팔금도·안좌도 방향이 갈리는 길목이다. 천사대교를 건너 직진하면, 동백나무를 머리에 이고 웃고 있는 부부의 얼굴이 여행객들을 맞는다.

한겨레

지난달 4일, 다소 쌀쌀한 평일 대낮에도 기동삼거리는 벽화 사진을 찍는 여행객이 끊이지 않았다. 벽화 주인공이자 집주인 문병일씨는 그들을 바라보며 “전국에서 찾아와서 내 벽화 얼굴을 기념사진에 함께 담아주니 기분이 참 좋다”고 말했다. 여행객들에게 당부하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래도 대문 안으로는 들어오지 않으면 좋겠다. 누추한 거 보지 말고 좋은 것만 보고 가길 바란다.”

한겨레

신안 도초도 ‘도초 수국공원’ 돌담을 그대로 살린 벽화. 김지안 작가가 기획했다. 사진 김지안 제공

일약 ‘핫 플레이스’(명소)로 떠오른 ‘동백 파마머리’ 벽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당시 신안군청 도시재생팀장이던 기혁(47) 경제에너지과장이 벽화 작업을 처음 제안했다고 전해진다. 먼저 그에게 아이디어가 떠오른 계기를 물었다.


―벽화는 왜 제안했나?


“천사대교 개통을 두 달쯤 앞둔 2019년 2월께 신안 중부권 섬들을 차로 한 바퀴 돌았다. 너무 볼거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기동삼거리에서 스마트폰으로 담장 위 동백꽃을 촬영하는 한 여성을 봤다. 이곳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여행객에겐 새로운 경험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그 동백나무를 배경으로 벽화를 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백나무로 머리를 형상화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왔나?


“갑자기 머릿속에서 튀어나온 건 아니다. 2주일간 인터넷으로 국내외 ‘나무 벽화’ 이미지를 검색했다. 다른 벽화나 팝아트 등을 보면서 힌트를 얻었다. 바로 작가를 수소문했다. 신안 고향에 내려와 사는 김지안 작가를 알게 됐다.”

한겨레

신안 자은도 유각마을 들머리 케이티(KT) 건물 벽화 앞에 선 김지안 작가. 사진 김지안 제공

조경 디자인 업체 ‘컬러’ 대표인 김지안(47) 작가는 ‘동백 파마머리’ 벽화 기획과 실무를 주도했다. 현장 벽화 작업은 그의 동갑내기 남편 등 3명과 함께했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조소를 전공한 조각가다. 결혼 후 경기도 고양시, 남양주시 등에서 미술 작업을 했다. 주로 성당 예수상과 마리아상을 만들거나 부조 벽화 작업을 했다고 한다. 지난 2017년께 타지 생활 약 20년 만에 신안군 지도읍으로 귀향했다. “건강 생각 안 하고 미술 작업에만 몰두하다가 어느 날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몸이 축났다. 말년을 고향에서 편하게 보내자는 마음으로 남편, 아들과 함께 귀향했다.”

한겨레

신안군 지도읍 작업실에서 아트 타일 벽화 작업 중인 김지안 작가. 사진 김지안 제공

김 작가도 기 과장 생각과 같았다. 그도 담장 위로 올라온 동백나무를 보자마자 ‘사람 머리’를 떠올렸다. ‘누구의 머리냐’를 두곤 의견이 갈렸다. 기 과장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나 꼬마, 또는 만화 <은하철도 999> 캐릭터 ‘메텔’ 등을 그리자고 했다. 김 작가는 “이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어르신들”이라며 “어머님(손석심씨)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벽화 시안을 6개 그렸다. 그중 마지막 시안이 ‘어머님’이었다. 기 과장이 시안을 들고 박우량 신안군수를 찾아갔다. “군수님이 마지막 시안을 보곤 누군지 물으셔서 집주인이라고 했더니 너무 좋다며 그걸로 하자고 하셨다.” 김 작가는 “군수님이 군청에서 가장 감이 좋으신 것 같다”며 웃었다. 그가 초지일관 ‘어머님’ 벽화를 고집한 까닭이 궁금했다.

한겨레

바둑기사 이세돌의 어머니 박양례씨 얼굴 벽화. 박씨의 도초도 친정집 벽에 그렸다. 사진 김지안 제공

―왜 어머님을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나?


“사실 ‘메텔’ 캐릭터 그림 그리는 게 훨씬 쉽다. 하루 만에 그릴 수도 있다. 실제 초상 얼굴은 그리기 어렵다. 빨리 작업한 편인데도 붓질 시작해서 꼬박 일주일 걸렸다. 난 신안 출신이라 신안에 오면 엄마, 아빠 생각이 먼저 난다. 천사대교가 개통해서 이곳을 찾는 이들도, 아무 조건 없이 묵묵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기다려주는 부모님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벽화를 보고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즈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셔서 집 밖으로 못 나갈 만큼 상심과 그리움이 큰 상태였다. 이듬해 봄에 아버지와 여행가기로 약속했던 곳이 바로 벽화가 그려진 암태도와 그 주변 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장소가 더 각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한겨레

‘도초 수국공원’ 돌담 벽화 앞에 선 김지안 작가. 사진 김지안 제공

―여행객들은 ‘동백 파마머리’를 재밌어한다. 작가로서 표현하려고 한 건 무엇이었나?


“난 처음부터 끝까지 동백나무의 주인공이 어머님이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 하얀 눈 속에서 피어나는 동백꽃을 보고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있다. 신안에서 다른 나무들은 해풍을 맞아 곧잘 죽는데 동백나무는 자생력이 강해 꿋꿋이 살아낸다. 그런 동백은 뭐든 끈기 있게 기다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거기서 피어나는 꽃은 어머니가 키워낸 자식들처럼 느껴졌다.”


―아버님(문병일씨) 그림도 그리자고 먼저 제안한 이유는?


“어머님 얼굴 벽화만으로는 내 마음에 차지 않아서 자청했다. 돈을 더 받는 것도 아니었다. 전체 작업을 통틀어서 함께 일한 분들 인건비와 재료비를 제하면 나와 남편의 인건비는 거의 남지 않았다. 애초 내 고향 신안에 재능 기부한다고 생각하고 참여했다. 아버님 설득은 오래 걸렸다. 어머니 그림이 완성될 무렵에야 승낙하셨다.”

한겨레

‘동백 파마머리’ 벽화 담장 안쪽에 동백나무가 한 그루만 있던 당시의 모습. 사진 김지안 제공

원래 문병일·손석심 부부 집 담장 안쪽에 동백나무는 한 그루뿐이었다. 아버님 벽화를 그리고 나서 담장 안쪽에 한 그루 더 심었다. 김 작가는 “박우량 군수님은 주민이 직접 전화를 걸어 건의하면 잘 들어주는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며 “아버님과 상의해 아버님이 직접 군수님께 전화했고 바로 군청에서 제주 동백나무를 구해다 심어줬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앞서 그린 아버님 벽화 크기에 맞추려고 나무뿌리 깊이, 줄기 길이와 폭 등을 직접 재서 군청에 전달했다고 한다.

한겨레

‘도초 수국공원’ 화장실에 아트 타일 벽화를 제작 중인 김지안 작가. 사진 김지안 제공

―그림보다 설득 시간이 더 길었을 것 같다.


“벽화 그리기 전에 마을 둘러보고 경로당 가서 어르신들 얘기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전체적인 마을 분위기를 느껴야 작업 구상을 할 수 있다. 어머님과 아버님께 벽화 그림 그리자고 설득하려고 2~3일에 한 번씩 배 타고 찾아갔다. 아버님까지 설득하는 데 한 달 정도 걸렸다. 특별한 방법은 없었다. 우리 엄마, 아빠라고 생각하고 진심으로 대하고 얘기했다.”


―어머님 벽화 처음 그렸을 때 많이 혼났다고?


“어머님은 얼굴 벽화 그린다고 하니 실제 얼굴 크기로 그리는 줄 아셨던 것 같다. 내가 그린 걸 보시곤 ‘무슨 사람 얼굴을 저렇게 크고 무섭게 귀신처럼 그려놨냐’며 당장 지우라고 엄청 혼내셨다. 얼굴 주름 그린 것도 속상해하셨다. 난 어머님 주름이 훈장이고 그 얼굴이 가장 자랑스러운 거라고 말씀드렸다. 결국 주름을 좀 더 펴서 예쁘게 고쳐드리겠다고 하고 다시 작업했다. 한 달만 지켜봐 주시고 그때도 마음에 안 드시면 지우겠다고 말씀드렸다.”

한겨레

신안 자은도 유각마을 들머리 벽화. 사진 김지안 제공

어머님과 아버님 벽화가 모두 완성된 뒤에도 우여곡절은 계속됐다. 천사대교 개통식이 예정된 2019년 4월4일, 김 작가는 아침 8시께 군청 전화를 받았다. ‘누군가가 아버님 벽화에 낙서를 했다’는 것이었다. 천사대교 개통에 맞춰 중심 길목에 꾸민 벽화였기에 군청도 김 작가도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어떤 낙서였나?


“누군가가 아버님 치아를 까맣게 칠해 놨다. 천사대교 개통 전이라 남편이랑 바로 배 타고 가서 부랴부랴 정신없이 낙서 지우고 수정했다. 오후에 수정 작업 마치고 천사대교 개통하자마자 나랑 남편이 압해도 쪽으로 가는 천사대교를 1호로 건넜다. 이제 와서 보면 엄청난 행운이고 추억이다.”

한겨레

이세돌의 어머니 박양례씨 얼굴 벽화. 사진 김지안 제공

―천사대교 개통 이후 벽화가 금세 명소가 됐는데 실감했나?


“벽화 완성하고 경로당에 모인 마을 주민 10여명이 다들 자기 얼굴도 그려달라고 했다. 내 손을 잡고 본인 집 마당으로 데려간 분도 있었고 서울에서 운동선수로 성공한 자기 자식을 그려달라는 분도 있었다. 그런 모습에 감동받았다. 한 달도 지나기 전에 옆 동네에서도 그려달라고 연락이 왔다. 군청 관계자, 기자, 여행객 등이 줄지어 벽화를 보러 왔다. 그때 이미 어머님, 아버님은 동네 스타가 되어 있었다.”


‘동백 파마머리’ 벽화 이후 김 작가는 신안군 다른 섬 벽화도 제안받아 기획했다. 같은 해 6월께 도초도 춘경 마을엔 바둑기사 이세돌의 어머니 박양례(73)씨 얼굴 벽화를 동료들과 함께 작업했다. 박씨가 결혼해 비금도로 이주하기 전 살았던 친정집 한쪽 벽을 채웠다. 벽화 속 박씨는 머리를 수국으로 꾸미고 ‘도초 수국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해 12월엔 자은도 유각마을 들머리 케이티(KT) 건물에 벽화를 그렸다. 마을에 사는 94~97살 주민 5명 얼굴을 그렸다가, 지난 설 이후 3명으로 줄여 수정 작업을 마쳤다. 이 벽화 속 주민들도 배롱나무꽃, 홍매화, 감 머리를 하고 있다.

한겨레

자은도 유각마을 들머리 벽화. 사진 김지안 제공

―벽화가 이렇게 인기를 얻을 줄 알았나?


“처음엔 인기가 있을 거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단지 내가 느낀 부모님에 대한 감정이 잘 전달되길 바랐을 뿐이었다. 가끔 벽화 현장에서 사람들이 ‘우리 엄마랑 아빠 같다’고 말하는 걸 들으면 감동적이고 흐뭇하다. 한번은 부산에서 온 10명이 퍼플섬(안좌면 박지도와 반월도)에 놀러 갔다가 그 반대 방향인 자은도 유각마을에 벽화를 보러 일부러 들렀다는 얘길 듣고는 정말 놀랐고 감사했다.”


한겨레
김선식 기자 ks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