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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현직 의사가 본 ‘슬의생’…판타지보단 본원적 메디컬 드라마

by한겨레

[황진미의 TV 새로고침]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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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티브이엔)의 시청률과 화제성이 놀랄 만치 높다. 시즌1이 남겨놓은 ‘연애의 떡밥’이 궁금한 영향도 있지만, 이상적인 치유의 공동체를 모두 반기기 때문이리라.


흔히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장르가 ‘메디컬’이 아니라 ‘판타지’라 말한다. 대학병원 교수 5명이 밴드를 한다거나, 그중의 두명은 ‘금수저’ 출신이란 점이 판타지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현직 의사이기도 한 내 관점에서 볼 때,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아주 본원적인 메디컬 드라마다. 의학적 상황과 처치에 대한 고증이 철저하다는 점도 언급할 만하지만, 그보다 의료의 본질이 ‘라포’(라포르: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친밀감과 신뢰관계)에 있다는 핵심을 짚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기존 의학 드라마들이 의사를 전쟁영웅처럼 그리거나 사내정치에 혈안이 된 인물들로 그리는 것과 궤를 달리한다. 단지 의사들끼리 경쟁도 갈등도 없는 수평적이고 친근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이익준(조정석)이 새벽 운동 길에 뇌졸중 환자를 발견하는 장면을 보자. 이익준은 구토를 하며 쓰러진 노인의 입을 벌려 기도를 확보하고 동공반사를 확인하며 119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온다. 자발 호흡이 있기에 심폐소생술은 하지 않았다. 신속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뿐, 막 올라타서 심폐소생술을 하거나 요란하게 응급실에 들이닥치는 액션을 연출하지 않는다. 수술실 장면에서도 피가 콸콸 쏟아지거나 눈을 번뜩이며 “메스”를 외치는 모습을 담지 않는다. 차분히 협업으로 수술하는 장면을 짧게 담으며, 수술 전후에 환자와 보호자에게 설명하는 장면을 훨씬 비중 있게 다룬다.


2007년 <하얀거탑>(문화방송) 이후 병원 내 권력을 다투는 의사들을 그린 드라마도 많았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흉부외과 과장을 아무도 맡지 않으려 한다는 대사 한마디로 그런 세계관을 일축한다. 보직수당 몇푼보다 빠른 퇴근을 원한다는 병원장의 말은 ‘워라밸’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에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권력’이나 ‘유명세’를 욕망하는 의사가 아예 안 나오는 것은 아니다. 민기준이나 천명태 같은 ‘빌런’도 존재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을 ‘후진’ 존재로 여기며, 그런 ‘꼰대의 벽’이 있음에도 ‘채송화(전미도)와 친구들’이 어떤 기지를 발휘해 환자를 위한 최선의 결정을 해내는지 보여준다. 의사인 입장에서 볼 때 배울 점이 많다.


‘채송화와 친구들’은 모두 실력이 출중하지만, 극적인 처치를 해내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들의 탁월함은 환자 및 보호자를 대하는 유연함이나, 전공의 등 다른 동료들을 대하는 태도로 입증된다. 사실 의사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환자와의 라포 형성과 동료 의료인과의 협업이다. 남편에 대한 배신감으로 치료를 거부하는 환자에게 이익준은 자신의 이혼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뇌수술로 진로를 급수정해야 하는 청년에게 안치홍(김준한)은 자신의 선례를 들려준다. 채송화가 전공의를 지도하고 보호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또 어떤가. 드라마는 의사가 ‘칼잡이’나 ‘권력자’가 아니라 ‘선생’임을 일깨운다. 변호사의 ‘사’가 벼슬을 뜻하는 ‘선비 사’(士)이고, 검사·판사·형사 등이 업무를 얘기하는 ‘일 사’(事)인 것과 달리, 의사는 교사·목사와 더불어 ‘스승 사’(師)를 쓴다. 의대 첫 수업에서 내가 들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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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입장에서 저렇게 착한 의사들이 어디 있냐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 보면 환자 ‘복’이 참 많구나 싶다. 어느 쪽에서 보든, 부러운 라포다. 임신 19주에 조기 양막 파수로 유산 위기를 맞은 산모에게 다른 의사는 임신 중단을 결정한다. 그러나 산모의 간곡한 요청으로 양석형(김대명)은 임신 유지를 결정한다. 여기서 임신이 끝까지 유지되는 것으로 그렸다면 양석형을 영웅적인 의사로 그리는 판타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임신 23주에 태아를 잃는 것으로 그린다. 결과가 나빴지만, 산모는 한달간 태동을 느낄 수 있어 행복했다며 고마움을 전한다. 현실에서라면 엄청난 원망을 들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의학적으로 임신 유지가 힘든 상태였는데, 무리하고 감정적인 의사의 결정으로 한달간 산모가 꼼짝없이 희망고문을 당하고 결국 위험에 빠졌으며 쓸데없는 의료 비용을 지출하게 했다며 비난받을 수 있다. 드라마가 이런 현실을 전혀 몰라서 아름답게 그리는 건 아니다. 추민하(안은진)가 양석형에게 묻는 대사에는 그런 염려가 담겨 있다.


드라마는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고도 방어적인 태도를 지닐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도 그린다. 소아병동에서 짧은 생을 마감한 아이의 엄마가 자꾸 병동에 찾아오자, 의료진은 혹시 고소를 준비 중인지 모른다며 경계한다. 하지만 아이 엄마는 그저 아이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을 뿐이다. 절망적인 상태를 버티는 소아병동의 엄마들이 서로 돕고 연대하는 장면과 더불어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장면이다.


드라마에는 ‘진상’ 환자와 보호자도 등장한다. 전공의에게 ‘갑질’ 하는 보호자,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 산모가 죽든 말든 자연분만을 고집하는 가족, 며느리에게 간 이식을 강요하는 ‘시월드’, 두번이나 딸의 간을 이식받고도 술을 끊지 못하는 아버지 등. 드라마는 이런 ‘진상’들을 ‘라포 천재’ 의사들이 어떻게 ‘슬기롭게’ 대하는지 보여준다. 스펙터클한 묘사나 극적인 연출 없이도 의료 윤리의 실례를 가르치는 효과가 ‘만렙’이다. 왜곡된 의료 시스템과 상호불신으로 얼룩진 의료 현장에서 의료진과 환자 및 보호자가 어떻게 라포를 회복하고 치유의 공동체를 만들어갈지 고민하게 만드는 의료 윤리의 참고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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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현직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