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비즈 ] ESC

26년전 단종된 엘란트라, 미국에서는 아직도 팔린다?

by한겨레

두 개의 이름 가진 자동차들의 ‘웃픈’ 속사정


기아 K9의 미국 이름은 K900


쌍용 티볼리 중국 이름은 티볼란


문화적 상황 등에 따라 달라진


여러 이름 자동차들의 브랜드 전략

한겨레

북미에서 엘란트라로 불리는 현대 아반떼. 현대자동차 제공

한겨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이 쓴 ‘꽃’의 시작 구절이다.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던 무언가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여할 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얻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만큼 이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도, 자동차에도.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를 기획하고 개발, 출시하기까지 어느 것 하나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을 거다. 하나하나 주목해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이목이 가장 집중되는 건 따로 있다. 이름과 디자인이다. 자동차의 이름은 익숙한 단어부터 휴양지 이름, 영어와 숫자의 조합까지 자동차 브랜드별로 이름을 짓는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브랜드는 새롭게 내놓을 자동차의 이름을 정하면 국내든 해외든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게 보통이다. 브랜드 네이밍 전략의 통일성도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차체에 붙이는 배지 또한 달라져야 하니 부수적인 비용이 더 들기 때문이다.

한겨레

쌍용 티볼리의 중국 이름은 티볼란. 쌍용자동차 제공

하지만 간혹 자동차를 해외 시장으로 수출할 때 현지 규정에 따라 사양이나 외관을 변경하는 것처럼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자동차의 이름을 바꾸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자동차의 이름이 판매되는 국가에서 부정적인 뜻을 가졌을 경우다. 현대 코나는 서핑과 커피로 유명한 하와이의 지명에서 이름을 따왔다. 여느 나라에서는 ‘코나’라는 이름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포르투갈에서는 다르다. 포르투갈에서 ‘코나’는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비속어와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차는 포르투갈에서만 코나 대신 하와이의 이웃 섬인 ‘카우아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한겨레

미국에서 K900으로 불리는 기아 K9. 기아자동차 제공

기아 케이나인(K9)의 미국 이름도 특이하다. 합성어나 지역의 이름이 아닌 숫자 ‘0’ 두 개를 더해 이름 끝에 헌드레드(hundred)를 붙였다. 미국 공식명은 ‘케이 나인헌드레드’다. 숫자 ‘0’을 두 개 더한 이유는 코나와 마찬가지로 유사한 발음의 다른 단어 때문이다. 개를 뜻하는 ‘케이나인’(canine)과 비슷하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꾼 것이다. K9은 K900 이전에도 다른 이름으로 수출된 적이 있다. 그때는 유럽과 중동지역을 노리고 쿠오리스(Quoris)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과 중국 합작 기업인 코로스(QOROS)가 이름과 발음이 비슷하다면서 독일 법원에 소송을 제기, 결국 패소하면서 유럽에서 사용이 불가능해졌다.


옛날 차의 이름을 쓰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현대 엘란트라다. 아반떼의 이전 모델명으로, 열정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엘랑’(élan)과 운송을 의미하는 영어 ‘트랜스포트’(transport)가 결합한 이름이다. 국내에서는 엘란트라에서 아반떼로 바뀌며 그 이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북미에서는 아반떼를 아반떼라 부르지 않고, 여전히 엘란트라를 사용한다. 북미 소비자들에게는 엘란트라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고, 현대 역시 그동안 다져놓은 엘란트라의 입지를 그대로 가져가기 위한 전략이다. 유럽에서는 로터스 엘란과의 상표권 문제로 한때 일부 국가에서 란트라로 판매되기도 했다.


상표권 문제가 있을 때도 이름을 바꾼다. 국내 소형 에스유브이(SUV) 흥행의 견인차 구실을 했던 쌍용 티볼리는 중국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데, 마지막 글자만 살짝 다른 티볼란이다. 티볼리(Tivoli) 끝에 있는 아이(i)를 빼고 에이엔(an)으로 바꿨다. 쌍용차는 티볼리를 출시하면서 100여 개 국가에 상표권을 등록했지만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고 볼 수 있는 중국에서 상표권을 등록하지 못했다. 중국에선 경쟁 회사인 지엠(GM)이 티볼리 상표권을 갖고 있었다. 오랜 고민 끝에 쌍용차는 지엠(GM)에 로열티를 주는 대신 중국에서만 티볼란이란 이름을 사용하기로 했다.


특정 국가의 문화적인 상황에 맞춘 마케팅 전략에 따라 이름이 붙여지기도 한다. 세계에서 럭셔리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은 어디일까. 중국이다. 그래서 많은 자동차 제조사는 중국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쓴다. 그중 하나가 중국만을 위한 특별한 네이밍이다. 메르세데스 마이바흐는 S 650를 중국에 출시할 때 650이 아닌 680를 달았다. 왜 하필 ‘8’일까? 숫자 8은 ‘돈을 벌다’라는 뜻의 중국어 ‘발’(發)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취향에 맞춰 이름을 바꾼 것이다. 참고로 2014년 자동차 번호 경매에서 ‘粤(월)B8888R’, 8이 네 개나 있는 번호가 172만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약 3억 원에 낙찰됐다. 중국인들의 숫자 8 사랑은 정말 유별나다.

한겨레

중국에서 S 680으로 불리는 메르세데스 마이바흐의 S 650.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제공

르노삼성은 2016년 탈리스만 출시를 준비하면서 기존에 있던 SM3, SM5, SM7 같은 라인업과의 병행 판매를 고려해 SM6로 모델명을 확정했다. 르노삼성은 로컬 네이밍을 하는 경향이 잦다. 르노 콜레오스는 국내에서는 QM6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러한 분위기도 조금 완화될 것으로 예상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QM3로 판매됐던 1세대 캡처가 2세대 신형으로 출시되면서 본명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토요타의 경우는 르노삼성과는 반대다. 토요타는 자국에서 아쿠아를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아쿠아는 우리에게 조금 생소하다. 우리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국 사람들에게도 아쿠아는 낯설다. 아쿠아는 오직 일본에서 사용하는 이름으로 일본을 제외한 나라에선 프리우스 C로 판매된다. 토요타가 자국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놔두고 프리우스 C로 수출하게 된 건 이미 성공한 프리우스 시리즈의 하나로 판매하는 게 브랜드 전략에서 더 유리하다고 판단해서다. 역시 마케팅의 토요타다.


마지막으로 현지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일 경우, 이름이 바뀌기도 한다. 현대 그랜저는 1986년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쭉 같은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 진출했을 땐 다른 이름을 썼다. 바로 아제라다. 아제라는 하늘색을 의미하는 ‘아주어’(azure)와 시대를 뜻하는 ‘에라’(era)의 합성어로, 하늘빛 시대라는 뜻이다. 그랜저(grandeur)는 영어로 ‘장엄하다’는 뜻인데, 미국인들이 실생활에서 거의 쓰지 않는 단어다. 그래서 그들이 발음하기 편한 아제라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참고로 현대차는 2017년 북미 시장에서 그랜저 HG를 끝으로 더는 판매하지 않는다.


김선관〈모터트렌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