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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열네살 희은에게…“네 잘못 아니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

by한겨레

[한겨레S] 살롱 드 여울

데뷔 51년차 가수 양희은

첫 책 ‘그러라 그래’ 걸출한 이야기꾼 면모

정확한 서울말 쓰고 항상 책 읽던 엄마 영향

억울함 토로 후배들에게도 “넌 너대로 살아”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삶을 살아왔어요”

한겨레

가수 양희은씨가 본인의 저서 <그러라 그래> 를 들고 웃고 있다. 사진 이승원 작가

아름다운 노래는 한동안 귓가를 집요하게 간지럽히다가 어느 순간 심장 깊숙한 곳을 찌른다.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살에는’이 그랬다. 엉뚱하게도 나는 이 노래를 베를린에서 들으며 눈물을 펑펑 쏟았다. 서른다섯, 어깨를 짓누르는 모든 부담으로부터 도망치듯 떠났던 베를린. 아직 양희은의 ‘내 나이 마흔살에는’보다는 김광석의 ‘서른즈음에’에 가까운 나이라고 믿던 그때. 오라는 사람도 없는데 불쑥 낯선 땅 베를린으로 도망쳐 두 달이나 꿋꿋이 버틴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귀국하면 아버지가 진 빚을 내가 대신 갚아야 했고, 기약 없는 만년 시간강사의 삶으로 돌아가야 했다. 돈도 없었지만 희망은 더욱 없었다. 가족을 버릴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귀국 직전,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올 용기가 도저히 샘솟지 않아서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수백 곡의 노래 중 아무거나 듣는 ‘셔플’ 기능을 켜고 한없이 걸었다. 그 순간 제일 먼저 튀어나온 노래가 바로 ‘내 나이 마흔살에는’이었다.

우리 중년들 위한 노래를 떠올렸죠

불현듯 이 노래가 예전과는 다른 울림으로 들려왔다. 내 몸은 아직 서른에 더 가까운 줄 알았는데, 내 마음은 이미 마흔을 훌쩍 뛰어넘어 조로해버린 것이다. 이 절망적인 상태로 진짜 마흔이 될까봐 더욱 두려웠던 나를, 이 노래가 온몸으로 끌어안아 주었다. 깃털이 아주 풍성한 날개가, 한없이 따스한 노래의 날개가 내 지친 어깨를 와락 안아주는 것만 같았다. “서른이 되고 싶었지.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이 힘겨운 하루하루를 어떻게 이겨나갈까. 무섭기만 했었지.” “다시 서른이 된다면, 정말 날개 달고 날고 싶어. 그 빛나는 젊음은 다시 올 수가 없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겠네. 우린 언제나 모든 걸, 떠난 뒤에야 아는 걸까.” 이 노래를 들으며 펑펑 울고 나니, 아무리 징글징글해도 역시 버릴 수 없는 내 삶으로 다시 돌아올 용기가 솟구쳤다. 이 가슴 찡한 노래의 주인공 양희은을 ‘살롱 드 여울’의 두 번째 초대손님으로 모셨다.


―‘내 나이 마흔살에는’을 듣고 있으면, 가수 양희은의 인생 이야기를 직접 옆에서 듣는 것 같아 더욱 다사로운 친밀감이 듭니다. 이 노래를 만들 때 어떤 느낌이셨는지요.


“열아홉에서 마흔넷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쓴 가사지요. 열아홉에는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지. 부모님 이혼하시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새어머니랑 살다가, 다시 엄마랑 합쳤는데 엄마의 가게가 홀랑 타버려서 그 모든 빚을 내가 떠안고, 그렇게 소처럼 일만 하며, 가족을 먹여 살리며 청춘을 다 보냈죠. 그때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투쟁이었으니, 서른쯤 되면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디디고 무게중심을 딱 잡은 채 살 수 있을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서른이 되었는데, 빚을 다 갚았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고 아무런 확신이 없는 거야. 눈부신 20대엔 그저 일만 하며 버티다가, 서른살 초봄에 훌쩍 떠났어요. 14개월이나 배낭여행을 했죠. 유럽과 미국 방방곡곡을 원 없이 돌아다녔는데도,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았어요. 왜 사는 걸까, 인생의 해답은 뭘까, 살아야 할 명분이 무얼까. 모든 것이 사라진 느낌이었어요. 식욕을 잃고 몸이 너무 아팠어요. 귀국해서 희경이를 따라 병원에 갔다가, 덜컥 말기암 진단을 받았지. 나이 서른에 말기암이라니. 석 달 시한부였어.(잠시 날카로운 침묵이 우리 사이를 쏜살같이 스쳐간다. 석 달 시한부, 그 말의 엄청난 무게감이 우리를 짓누른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내가 집에서 요양을 하는 동안 ‘양희은이 석 달 후면 죽는다’는 소문이 쫙 퍼졌어요. ‘양희은 암선고, 시한부 3개월’이라고 쓴 현수막을 걸고 청계천에서 내 앨범을 신나게 팔던 사람도 있었어요. 석 달 후에 내가 살아 있으니까,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지. 너 죽는다는 석 달 지나지 않았니. 살아 있으니 출근하라고. 음악프로 진행자를 맡아서 부지런히 출근했지요. 어떻게 암이 완치되었는지는 나는 몰라. 언론사에서는 ‘투병기’를 써보라고, 기적의 투병 인터뷰를 하겠다고 난리였지만, 난 차갑게 거절했지. 자기 가족이라면 그런 걸 시키겠어요?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결혼 후 7년간 미국에서 살았고, 다시 귀국하니까 내 나이 마흔넷이었어. 뭔가 새로운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그 곡이 나온 거죠.”


―‘아침이슬’의 양희은이 아닌, ‘내 나이 마흔살에는’과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에 어울리는 새로운 양희은의 탄생이었군요.


“그렇지. ‘우리 중년들을 위한 노래는 없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초등생들의 감성이 음반시장을 주도하고 있으니. 중장년을 위한 노랫말을 도대체 찾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내 나이 마흔살에는’이라는 가사, 내 삶의 이야기를 담은 노랫말을 쓰게 된 거예요.”


한겨레

사진 이승원 작가

그럴 수 있어! 넌 너대로 살아!

―양희은의 첫 번째 책 <그러라 그래>를 읽으며 무릎을 탁 치는 순간이 많았어요. 지금까지 남몰래 궁금해하던, ‘양희은의 미스터리’가 풀리는 느낌이었죠. 우리가 아는 가수 양희은과 예능프로그램의 유쾌한 방송인 양희은 사이엔 뭔가 이질감이 있거든요. ‘가수 양희은’이란 강물과 ‘방송인 양희은’이라는 강물이 완전히 따로 흐르다가, <그러라 그래>를 통해 비로소 하나의 거대한 강물로 합쳐지는 느낌이었어요. 원래 학창 시절 꿈은 가수가 아니라 방송인이었고, 지금도 포기 못 한 꿈은 ‘코미디언’이라는 고백에 깔깔 웃었습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대박 웃기는 게 소원”이라는 문장이 너무 신났어요. ‘노래에 모든 것을 걸지는 않았다’는 고백도 좋았습니다. 작사가이기도 한 양희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이 <그러라 그래>에서 비로소 빛을 발해요. 입말과 글말이 모두 유창한 이 걸출한 이야기꾼의 재능은 어디서 왔을까요.


“엄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엄마는 정확한 서울말을 쓰고, 이야기꾼의 재능이 있고, 항상 책을 읽고 있었거든요.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성악가가 꿈이었던 엄마.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뭔가를 맹렬히 배우고, 꿈꾸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처럼, 나도 호기심이 많고, 읽고 쓰는 습관이 어릴 때부터 있었어요.”


―동생 양희경씨와의 사이도 각별한 것 같아요. 달리는 차 안에서 무뚝뚝하게 ‘차디찬 주먹밥’을 나누어 먹는 자매의 모습이 짠해요. 세 자매의 맏이신데, 자매와의 우정은 나이 들수록 더 애틋하지 않은가요.


“자매들 없었으면 난 그렇게 열심히 노래 안 했을 거야. 내 별자리가 사자자리거든. 난 게으른 사자처럼 나무 그늘에서 쉬고만 싶었어. 난 사자처럼 배가 고파야만 사냥을 하거든.(웃음) 동생들만은 가난의 고통을 모르게 하고 싶었어요. 집안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워야 하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 노래를 해야 했지요. 나를 노래하게 만든 장본인들이지.”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가 수록된 앨범 <양희은 1991>이 가수 양희은의 커다란 전환점처럼 보였어요. 김민기의 영향을 뛰어넘어 ‘나, 양희은’으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었죠. 강아지 두 마리가 양희은씨 옆에서 새까만 눈을 반짝이는 앨범 표지도 사랑스럽고요.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랑의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 것, 사랑의 열정에 눈멀지 않는 좀 더 관조적인 사랑의 느낌이 그 앨범 속에 있어요. 전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앨범을 카세트테이프로 사서 늘어지도록 들으며 공부했죠. 분명 제가 겪어본 적이 없는 감정들인데, 곧바로 이해가 되었어요. 달콤한 기쁨보다는 처절한 쓸쓸함의 뒷맛을 남긴 사랑을 곱씹는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듣고 있으면,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그 처연한 감정이 완전한 내 것처럼 느껴졌지요. 양희은씨의 노래에는 사람을 잔뜩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그런데 <그러라 그래>는 뭔가 ‘놓아버림’의 정서가 있어요. ‘한 번 더 놓아버린, 더 많이 내려놓은 양희은’이 보여요. 그 멋진 놓아버림의 비결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놓아지는 나이, 65살이 되면 놓아져.(웃음) 후배들은 나에게 와서 방송가에서 있었던 여러 가지 부당한 일들, 억울한 일들을 이야기하죠. 그럼 저는 그래요. 그러라 그래! 넌 너대로 살아! 박미선과 송은이가 그 말에서 그렇게 위로를 받았대요. ‘그러라 그래’가 내 유행어가 되어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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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도중 환하게 미소 짓는 가수 양희은씨. 사진 이승원 작가

―우리를 괴롭히는 그 사람들은 그렇게 계속 지독하게 살고, 우리는 그럼에도 우아하게, 꿋꿋하게, 나답게 살자, 이런 느낌도 들어요.


“그래요. ‘그럴 수 있어!’ ‘그러라 그래!’ ‘너 이름이 뭐니?’ 이 세 가지가 나의 유행어야.”


―유행어를 자그마치 세 개나 히트시키시다니, ‘코미디언의 꿈’을 절반은 이루셨네요.(웃음) 그런데 ‘가수’ 양희은은 여전히 톱스타이지만 ‘연예인’이라는 머나먼 이질감을 주지 않아서 좋은 것 같아요. <그러라 그래>에서 ‘목욕탕 신’을 보고 배꼽을 잡았어요. 일주일에 한 번씩 대중탕에 가서 사우나를 즐기신다고. 사람들이 막 반갑다는 핑계로 목욕탕에서 ‘물볼기’를 때리는 장면이었어요. 대중탕에서도 전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모습이 참 좋아요.


“그러게, 목욕탕에서 양희은 만나서 반갑다고 꼭 그렇게 철썩 때리시더라고. 물에 닿은 맨살이 어찌나 아프던지. 자기들도 한번 맞아 보라고.(웃음) 나도 질 수 없으니까, 같이 물볼기를 찰싹찰싹 때려줘.(웃음) 나에게 목욕탕의 휴식은 빼앗길 수 없는 인생의 낙이니까, 코로나 시대에도 아쿠아로빅용 마스크 쓰고 가요. 우리 통기타 가수들은 자기가 연예인이라고 특별하다는 생각 안 해. 통기타 가수들은 ‘스타연’하지 않아요. 대중탕도 스스럼없이 가고, 패키지여행도 다녀. 오히려 나 때문에 사람들이 놀라.(웃음) 양희은씨 맞냐고. 나는 전혀 개의치 않고 내 삶을 살아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여 있어야, 그 살아 있는 이야기가 노래도 되고 하는 것이지. 어떤 기획과 콘셉트에 의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생활이나 일거수일투족 모두가 기획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요즘 연예인들은 그런 ‘기획’으로, 너무 지독한 훈련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지니까 고충이 심하죠. 우린 우두머리도 없고, 기획도 없고, 모든 게 자연스러워서 좋았어요. 그런 자유가 없으면 음악 할 맛이 안 나요.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정말 싫어요.”

열네살 희은에게, 네 잘못이 아니야

―선생님의 인생을 보면, ‘이게 과연 될까’ 싶은 순간에도 용기를 내어 타인에게 말걸기 하는 장면들이 뭉클했어요. 처음 가수로 데뷔하게 된 것도, 송창식 선배님께 ‘노래하게 해달라’고 대뜸 부탁한 것이었잖아요. 그때 그 어리지만 당찬 희은이의 눈빛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져요. 어떻게 그런 용기와 강인함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전 먼저 나서서 ‘내가 이걸 하겠다’는 용기가 없었어요.


“난 별로 강하지 않아요. 상처받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로, 강한 척했지. 하지만 송창식 형한테 노래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때는, ‘이게 될까’라는 의구심 같은 건 없었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망설임이 없었어. 무조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평소에는 대체로 여리고 소심해요. 남들은 내가 아주 대범한 O형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극소심 A형이에요.(웃음)”


―여리고 상처받기 쉬운 면도 있지만, 확실히 남다른 당참과 기개가 느껴지세요. 일단 목소리 자체에 카리스마가 넘치고, 좌중을 압도하는 스토리텔링 능력이 있으시잖아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특별한 강인함, 인생의 수많은 역경에도 결코 자존감을 잃지 않는 꼿꼿함이 보이세요. 한마디로, 당당하고 멋지세요.


“그게 내 능력은 아니에요. 물려받은 건지도 모르겠다. 여자들이 밖에 나가서 사회생활을 하고 자신감을 갖고 언제든지 자신의 의견을 어필할 수 있는 근거는 어린 날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이야. 나는 아버지에게 끔찍이도 사랑받은 큰딸이거든. 남자애들을 패고 다녀도 무조건 자랑스러워해주셨지.(웃음) 그때 받은 그 조건 없는 사랑이 여전히 날 지켜주는 것 같아. 염치가 있으면 죽어서라도 날 밀어줘야지.(웃음) 이제 ‘난 아버지가 없다’는 결핍보다는, 내 유전자 속에, 내 마음속에 함께 살고 있다고 느껴. 곁에 안 계시지만 우린 함께 사는 거야.”


한겨레

여전히 손글씨로 글을 쓴다. 사진 이승원 작가

―마흔 즈음에 ‘하얀 목련’을 다시 들으니, 이 노래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더라고요. 삶의 모든 열정이 휩쓸고 지나간 쓰라린 폐허를 응시하는 느낌, 너무 처연해서 가슴이 아팠어요. 많이 아프실 때 쓰신 가사지요?


“내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을 때, 친구의 편지를 받았어요. 오늘 너와 똑같은 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여자의 장례식에 다녀왔어. 너는 잘 싸우고 있니. 잘 이겨내고 있니. 봄비 맞아 공원에선 목련 꽃잎이 툭툭 진다. 이런 글이었지. 그제야 ‘하얀 목련’ 가사가 떠올랐지. 그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나야. ‘슬픈 그대 뒷모습’도 나고, ‘혼자서 걷는 외로운 나’도 나고. 남인 것 같지만 사실 모두 ‘나’였어. 슬픈 사랑이야기가 아니고, 그 모두가 다 나였지.”


동생 양희경씨와 함께 차디찬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달리는 차 안에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점심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못내 짠했다. 부디 찬밥은 드시지 말라고 보온도시락통을 선물로 드렸더니, 소녀처럼 해맑은 미소가 피어난다. 이제 양희은에게 묻고 싶은 마지막 질문이 남아 있었다.


―다시 열네살이 된다면, 그때 그 시절의 어린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으세요?


“왜 하필 열네살이야?”


―우리의 내면아이와 성인자아가 갈라지는 시기랄까요. 심청과 신데렐라, 바리데기와 라푼젤 모두 그 정도 나이였거든요. 우리가 상처 입은 내면아이를 가슴에 묻는 나이 같아요.


“그럼 열네살 양희은에게, 이야기할래. 네 잘못이 아니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


나는 그 순간 열네살 소녀 희은이 짊어져야 했을 온갖 고통과 외로움이 떠올라 가슴이 시렸다.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멍들었던 어린 가슴,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의 죽음, 이혼 자체가 드물었던 당시 사회에서 감내해야 했던 주변의 따가운 시선. 그 순간 열네살 소녀 양희은은 아주 잠시지만 너무도 강렬한 존재감으로 그 자리에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자기 잘못이 아닌 일 때문에 어깨를 움츠렸을지도 모를, 열네살 희은은 이제 환하게 미소 지으며 지난날의 아픔조차 보듬어 안았다. 동시에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미움마저 더 큰 사랑으로 끌어안은 양희은이 그녀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와 아름다운 작별을 마쳤음을 깨달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 고개 빳빳이 들고 다녀!” ‘빳빳이’라는 부사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녀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꽉 채웠다. 그 울림은 노래 같기도 하고, 선언 같기도 했으며, 어쩌면 지난날의 상처 입은 어린 소녀를 향한 기운찬 위로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우리 모두의 열네살 내면아이에게도, 이런 기운찬 응원의 말을 들려주면 어떨까. 지금 어디선가 남몰래 상처받고 있는 모든 아이들도, 이 모든 것을 노래와 유머와 사랑의 힘으로 이겨낸 양희은의 목소리로 위로받길 바란다. 나는 이렇게 우리 모두의 아직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싶다. 우리 모두의 상처 입은 내면아이야, 그 모든 상처는 결코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 너는 분명 이 상처를 이겨내고 눈부시게 날아오를 거야. 우리 삶은 승리나 성취의 힘이 아니라 치유와 공감의 손길로 버텨지는 기적이란다.


한겨레

사진 이승원 작가

글 정여울 작가, 사진 이승원 작가

개성 넘치는 존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꿈과 일상과 배움의 열정을 나누는 곳, 그곳이 바로 살롱이지요. 작가 정여울이 이 시대의 빛나는 사람들을 초대하여 속 깊은 정담을 나누는 코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