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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롤렉스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을까

by한겨레

찾는 사람 많은데 생산 한정적


중고가 계속 올라 자산 가치 상승


코로나19 ‘보복 소비’ 현상도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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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에게 모두 인기 있는 ‘데이트저스트’ 36㎜. 롤렉스 제공

“선배, 롤렉스 어떻게 사?”


친한 후배가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물었다. 어떤 모델을 사고 싶냐고 되물었다. “36㎜ 데이트저스트 모델. 콤비 말고.” 그래서 필자는 웃돈 주고 사는 방법 이외엔 쉽지 않을 거라고 답했다. 백화점 오픈 시간에 맞춰 줄을 서도(흔히 ‘오픈런’이라고 한다)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니 매장에 가는 건 꿈도 꾸지 말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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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일 오후 1시쯤 롤렉스 매장의 대기 인원을 앱으로 확인했다. 롯데백화점 에비뉴엘의 롤렉스 매장 대기 인원이 78팀, 현대백화점 본점의 대기 인원이 56팀이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 롤렉스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한 인원이 수백명에 달한다는 뜻이다. 필자는 어릴 때 “돈이 없지 물건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는데, 롤렉스 때문에 이 말도 더는 못하겠다.


도대체 왜 이렇게 사기 어려운 걸까?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롤렉스의 국내 판매법인인 한국 롤렉스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20% 줄어든 2328억원이다. 매입액 역시 1700억원 수준으로 그 전년도 2300억원 대비 26%나 감소했다. 물건이 있으면서 안 판 게 아니라(이런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정말 없어서 못 팔았다는 뜻이다. 게다가 서두에 말한 후배처럼 여성들도 점차 큰 사이즈의 롤렉스를 찾고 있다. 크기로 남성용과 여성용을 나누던 과거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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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의 신제품 ‘익스플로러 옐로 롤레조’. 롤렉스 제공

특히 ‘오이스터 퍼페추얼’이나 ‘데이트저스트’ 같은 단순한 디자인의 34~36㎜의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를 많이 찾는데, 한국 남자들이 선호하는 시계 케이스 지름인 36~40㎜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한국 갤럽에 따르면 25~34세의 여성이 가장 좋아하는 시계 브랜드로 롤렉스가 꼽혔다. 까르띠에와 애플보다도 선호도가 높다. 롤렉스의 공급은 줄었고 수요는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자)의 명품 사랑이 대단하다. 신세계백화점은 작년 명품 매출에서 20대와 30대가 차지한 비중이 각각 10.9%와 39.8%에 달했다고 한다. 롯데백화점에서도 2030세대의 명품 매출 비중은 2018년 38.1%에서 지난해엔 46%로 크게 늘었다. 실제로 롤렉스 매장의 대기 인원을 보면 30대 전후로 보이는 이들이 꽤 많다. “2030세대가 무슨 돈이 있다고…” 같은 말을 하면 꼰대 소리 듣기 딱 좋은 시대다. 소비에 대한 개념이 과거와 많이 달라졌으니까. 게다가 롤렉스는 명품 중에서도 환금성이 유독 높아 ‘되팔아도 손해는 안 본다’는 인식이 강하다.


지인 중 한 명이 롤렉스 GMT 마스터 2(서로 다른 두 가지 시간대를 표시하는 롤렉스의 모델명)를 작년에 중고로 1250만원에 샀다. 일 년이 지난 지금 되팔면 1350만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 했다. 롤렉스는 여름이 성수기라 그때 팔면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실제로 시계 관련 카페들을 방문하면 ‘요즘 롤렉스의 P(프리미엄)가 얼마 붙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또 한국 매장에서 산 모델을 신라 시대 골품제 최상위 신분인 ‘성골’이라고 칭하며 더 비싼 값에 사고팔기도 한다. 국내 매장에서 새제품을 살 수만 있다면 수 백만원을 더 받고 팔 수 있는 셈이다. 당연히 투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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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폴 뉴먼은 생전에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를 즐겨 착용했다. 롤렉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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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세라토나’라고 불리는 ‘코스모그래프 데이토나’. 롤렉스 제공

어떤 재화에 투자 가치가 생기면 당연히 투자자가 몰린다. 주식, 금, 암호 화폐 모두 등락이 있지만, 롤렉스는 호가와 실거래가가 꾸준히 우상향이라 안전자산으로 대접받는다. 주식과 채권처럼 가치가 ‘0’이 될 일도 없고, 단순히 투자 가치만 있는 것이 아닌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소비재라는 점도 매력이다. 마치 강남 집값처럼 중고인데도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 보복 소비가 확산한 것도 롤렉스를 사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다. 다시 말해 롤렉스뿐 아니라 고가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전반적으로 증가했다는 뜻이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3월 유통업체 매출 동향’을 보면 지난 3월 백화점 매출이 1년 전보다 77%가량 늘었다. 아동·스포츠 부문이 109.8%로 가장 많이 올랐고, 명품이 포함된 해외 유명 브랜드 부문이 89%로 뒤를 이었다.


얼마 전 한 일간지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처럼 ‘명품 3대장’인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만 매출이 오른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들이 전체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면세 매출이 줄면서 전체 매출이 감소한 브랜드도 있지만 말이다.


얼마 전 만난 모 시계 브랜드 홍보 담당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롤렉스뿐 아니라 고가의 시계 브랜드 매출이 대부분 좋아요. 특히 롤렉스 매장에 헛걸음한 것이 화가 난 건지 우리 브랜드 매장으로 건너와 시계를 사 가는 분들도 있어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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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렉스를 대표하는 스포츠 모델 ‘서브마리너’. 롤렉스 제공

언제부터 이런 대란이 벌어졌을까. 온라인 시계 전문지 ‘타임 포럼’의 장종균 기자에게 물었다. “5~6년 된 거 같아요. 그전에도 롤렉스 모델들의 환금성이 좋았지만, 지금처럼 스틸 모델의 씨가 마르진 않았어요. 600~800만원대 입문용 모델들은 매장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죠. 세라토나(베젤에 세라믹 소재를 사용한 데이토나 모델로 중고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의 중고가가 치솟더니 서브마리너를 비롯한 다른 모델들도 가격이 오르더라고요. 특히 단종된다는 소문이 돌면 그 모델은 중고가가 더 치솟았어요.”


소비는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무엇을 샀는지, 어떻게 샀는지, 얼마나 샀는지 등은 그 사람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엑스레이 필름이다. 소중한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는지보다 그 사람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행위가 또 있을까? 롤렉스는 기술적으로 심미적으로 탁월한 시계를 만든다. 생산량을 무리하게 늘리지 않는 고집스러운 경영 방식도 배울 점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시계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그 시계를 가질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떤 물건이 좋은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건 소비자 개개인의 고유한 권리니까. 그게 설령 롤렉스라고 할지라도.


임건(<에스콰이어> 디지털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