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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설산과 은사시나무의 길…팬데믹 틈새 ‘조지아’에서 만난 평화

by한겨레

거칠고 냉혹한 코카서스 험준한 산맥을 따라 걷는 길

소박한 자연식과 와인…함께 ‘견디는’ 삶 속에 평화 깃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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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티아에서 자베쉬 마을로 가는 첫날의 풍경. 멀어져가는 가을 안의 겨울이었고, 서둘러 온 겨울 안의 가을이었다. 사진 김남희 제공

각국의 백신 접종이 확대되고 코로나로 폐쇄되었던 국경의 문이 차츰 열리던 10월, 김남희 여행작가는 약 한달 동안 서아시아와 동유럽 흑해 연안에 있는 조지아 여행길에 올랐다. 코로나 이전 세계적 트레킹 코스로 막 떠오르던 그곳의 생생한 이야기를 싣고자 ESC는 현지의 그에게 여행기를 청탁했다. 한달이 지난 지금 코로나19의 신종 변이 ‘오미크론’이 등장하면서 여행길은 또다시 막히고 있다. 이미 많은 나라가 입국 제한 등 강력한 조처에 들어갔다. 다시 막힌 여행길이지만, 김 작가의 글로 독자 여러분의 여행 갈증이 풀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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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이 어우러진 풍경. 사진 김남희 제공

여행이라니. 코로나는 여전했고, 엄마는 투병 중이었다. 얌전히 포기의 미덕을 착실히 쌓고 있었다. 체념의 탑은 조지아 입국 제한이 풀렸다는 소식에 바로 무너졌다. 조지아를 향한 내 호기심은 러시아 여행에서 시작되었다. 모스크바의 맛있는 식당은 전부 조지아 식당이었고, 가성비 좋은 와인도 죄다 조지아 와인이었고, 심지어 독재자 스탈린조차 조지아 출신이었다. 무엇보다 코카서스(캅카스)산맥 아래서 오래된 삶의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그곳은 10월이면 눈으로 길이 끊어져 다음해 6월에야 열린다고 했다. 2년 전, 카자흐스탄에서 시작해 육로로 ‘~스탄’의 나라를 하나씩 통과해갈 때 조지아가 최종 목적지였다. 그 여정은 시간 부족으로 두달 만에 우즈베키스탄에서 끝이 났다.


내년 봄에 이어서 가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는데, 다음해 역병이 창궐했다. 1년8개월이나 여행을 떠나지 못한 건 스물세살 이후 처음이었다. 한반도 바깥이기만 하다면 어디라도 좋은데, 조지아가 문을 열다니! 애만 태우다가 슬쩍 운을 뗐는데 엄마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등을 떠밀었다. 여행이 직업인데 어서 다녀오라면서. 어쩌다 보니 6명의 용감한 여인들이 함께 가겠다며 손을 들었다. 내 에스엔에스(SNS) 아이디는 스카이웨이워커(skywaywalker, 하늘길 걷는 사람). 그들이 하늘길 여행사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그렇게 ‘우중하하’(우아한 중년의 하늘길 트레킹) 팀이 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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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물든 은사시나무들이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안개가 산허리를 감아 돌 때마다 설산이 몸을 드러내고 감추기를 반복했다. 사진 김남희 제공

고비를 넘고 설산을 넘고

철 지난 제품만 모아놓은 떨이 매장처럼 한적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18시간 후에 도착한 트빌리시(조지아의 수도)는 한 나라의 수도치고는 소박했다. 작가 쇼타 루스타벨리의 이름을 딴 대로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포도송이가 늘어진 식당의 정원은 와인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이들로 왁자지껄했다. 그 풍경이 너무 평온해서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다음날은 트레킹을 하러 메스티아로 떠나는 날이었다. 메스티아행 19인승 경비행기는 예약이 어렵기로 악명 높았다. 조승우 뮤지컬 티케팅하는 각오로 광클릭을 해 항공권 7장을 사둔 터였다. 오랜만의 여행이라 감이 떨어진 건가. 공항행 셔틀버스 출발 시각을 착각하는 바람에 셔틀을 놓치고 말았다. 전생에 쌓아둔 선업 덕분에 위기의 순간이면 꼭 등장하는 귀인. 호텔 매니저님이 머리에 후광을 두른 채 나타나 체크아웃부터 택시 호출까지 모든 일을 진두지휘했다. 중앙선을 거침없이 넘나드는 호방한 운전으로 유명한 조지아인답게 택시 기사는 양손을 무릎에 올려놓는 ‘자율 주행’ 주법으로 40분 거리를 25분 만에 주파했다. 겨우 공항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날씨가 나빠 비행기가 뜰 확률이 50%란다. 초조한 기다림 끝에 탑승이 시작됐다. 그사이 ‘언니들’은 “하늘길 여행사 오픈도 하기 전에 폐업신고 하는 줄 알았네” “이참에 여행 콘셉트 바꿔. 스릴 앤드 서스펜스 투어 위드 남희로” 등등 무자비하게 나를 놀려댔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코카서스산맥은 거칠고 냉혹해 보였다. 이토록 험준한 산맥의 발치에서도 면면히 삶을 이어오는 이들이 있다. 훼손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는 강력한 자연의 힘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늘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스스로를 단련하며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어디서부터 체념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지를 묻게 되니.


비행기에서 내린 날 오후에 찰라디 빙하까지 왕복 3시간 트레킹으로 몸을 풀었다. 다음날, 메스티아에서 우슈굴리 마을로 향하는 3박4일 55㎞ 트레킹을 시작했다. 날마다 산을 하나 넘어 계곡 아래의 마을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또 산을 넘어 마을을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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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쉬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을 건너고 있다. 사진 김남희 제공

첫날 아침, 가는 빗줄기가 흩뿌렸다. 판초를 꺼내 입고 걷기 시작했다. 노랗게 물든 은사시나무들이 몸을 떨며 서 있었다. 안개가 산허리를 감아 돌 때마다 설산이 몸을 드러내고 감추기를 반복했다. 멀어져가는 가을 안의 겨울이었고, 서둘러 온 겨울 안의 가을이었다. 설산과 단풍이 어우러진 한 폭의 장엄한 수묵화가 그려지고 있었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신설을 밟으며 고갯마루를 넘고, 아디시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개울을 맨발로 건너며 몸서리를 치기도 했다.


가을빛이 찬연하던 아래쪽에 비해 위로 올라갈수록 겨울빛이 차가웠다. 풍경은 압도적이었고, 산에는 우리뿐이었다. 눈이 내리면 겨울 왕국의 풍경에 기뻐하고, 햇살이 비치면 따사로움에 고마워하고, 비가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걷는 사람들이었다. 전원 50대 중반을 넘긴 중년의 언니들이 아무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매 순간 감격하고, 서로를 다정하게 보듬어 안았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먹는 그들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도 해발 2730m의 츠쿤데리 패스(치훈데리 페레발)를 넘을 때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초보 트레커들과 야간 산행을 하게 될까 두려웠다. 꼬박 9시간 반을 걸어 어두워지기 직전에야 마을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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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 셋째날 아디쉬 마을에서 이프라리 마을로 가는 길 풍경. 사진 김남희 제공

대자연이 바꾼 조지아의 운명

산 아랫마을은 어디나 낡고 나지막하고 허름했다. 이런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 먹고살아왔을까 아득했다. 마을마다 서 있는 탑 코슈키는 그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했다. 강대국 사이에 끼여 외세의 침탈을 끝없이 겪었던 이들은 침략이 시작되면 저 높은 돌탑 안으로 식량을 챙겨 숨어들었다. 사다리를 걷으면 돌탑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침입할 수 없는 구조의 탑에서 마른 빵과 감자로 연명하며 적들이 물러가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마을에는 7세기에 세운 돌탑도 남아 있었다.


감자 농사를 짓고, 말을 키우며 수백년을 가난하게 살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건, 조지아의 장대한 자연이 조명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외국인 트레커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하나둘 낡은 집을 보수하고, 이제 좀 살아 보나 하던 차에 팬데믹이 찾아왔다. 묵묵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견뎌야 하는 고난의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환대를 받았다. 살림살이는 빈한했지만 뜨거운 물로 씻을 수 있었고, 부엌에는 무쇠 난로가 있어서 몸을 데우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영어는 통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보디랭귀지’가 있었고, 단어 몇개만으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장작 난로에서 갓 구운 빵 푸리는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치즈를 넣고 구운 빵 하차푸리, 고기나 채소를 넣고 찐 만두 힌칼리, 매끼 빠짐없이 등장하는 토마토와 오이샐러드…. 식단은 소박했지만 음식은 맛있었다. 몇백년을 이어온 음식이었고, 몇백년을 건너온 삶의 방식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었다. 최선을 다해 차려준 그 밥상을 받을 때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르곤 했다.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생계 자체가 위태로웠던 내 삶과 그들의 삶이 겹쳐지면서, 우리 모두가 견뎌온 시간이 떠올랐다. 배부르게 저녁을 먹고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일 때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기에, 머나먼 이 산골까지 찾아와 걷고, 남이 차려준 밥을 먹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는 그 시간의 평화가 눈물겨웠다. 한쪽에서 영어 단어를 옮겨 적으며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흘깃흘깃 우리를 훔쳐보던 민박집의 아이들, 손짓 발짓으로 내일 아침은 몇시에 먹겠느냐고, 도시락은 어떻게 할까를 묻던 젊은 안주인. 세계의 다른 끝에서 어떻게든 생을 부여잡고 여기까지 건너온 뜨거운 생명의 온기가 내게로 전해지고 있었다. 당신도, 나도 견디고 있었군요. 모두에게 힘겨운 시간이었는데, 우리 끝내 버텨서 여기에서 이렇게 만났네요. 여행이라는 기적이 건네는 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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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서스 산맥의 설산. 사진 김남희 제공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조지아인

몇개의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트빌리시로 돌아온 후 영어가 가능한 조지아인 가이드를 구했다. 조지아인이 직접 들려주는 조지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우리가 트빌리시 투어를 한 날, 거리에는 차가 다니지 않았다. 집권당이 선거를 앞두고 전국에서 지지자를 끌어모아 대규모 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세상에 이런 나라는 조지아밖에 없을 거야. 이 코비드 시국에 집권당이 시위를 조직하다니. 조지아가 어떤 상황인지 알겠지?” 젊은 가이드 초네는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우리가 메스티아의 찰라디 빙하 트레킹을 할 때 “꺼져라, 러시아!” “러시아 점령자들!” 같은 선동 문구가 적힌 바위들이 있었는데, 초네가 썼다고 했다. 조지아는 페르시아, 오스만제국, 러시아 등 외세의 침탈을 수도 없이 겪었다. 조지아와 러시아의 비극적인 관계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지아는 2008년 러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영토의 20%를 빼앗겼고, 조지아인 40만명이 집과 땅을 잃고 쫓겨나 난민이 되었다. 초네가 바위에 반러시아 문구를 적은 이유는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데도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 마을에서는 스탈린 기념관을 크게 지어놓고 그를 찬양하고 있으니 아이러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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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트빌리시의 집들. 사진 김남희 제공

올드 트빌리시 지역에는 무너져내린 담벼락에, 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이 많았다. 세월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지 싶은데, 마당에서는 꽃을 가꾸고 힘닿는 대로 집 안을 고치며 살아들 가고 있었다. 유럽의 도시처럼 단정하고 우아하지는 않지만, 조지아에는 어떤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은 강인함이 스며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생을 향한 의지가 어디에나 보였다. 혼란과 좌절과 상처 속에서도 살아내는 일이 인간의 운명이자 의무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트빌리시의 거리에 터키 이스탄불과 콜롬비아 메데인, 홍콩이나 미얀마의 양곤 같은 곳들이 겹쳐 보였다. 견디는 시간을 보내는 공간은 서로 닮아가는 걸까. 저마다 고난의 시기를 건너온 나와 ‘우중하하’ 멤버의 얼굴이 서로 닮아 있듯이.


김남희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저자,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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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희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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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천 년 와인 역사를 자랑하는 조지아 와인. 와이너리의 가이드가 레드 와인의 색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김남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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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만두 힌깔리. 사진 김남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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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의 전형적인 아침 식사. 토마토 오이 샐러드, 화덕에서 구운 빵과 카스테라, 집에서 만든 치즈와 계란 등으로 구성된다. 사진 김남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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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박집의 무쇠난로에 조지아 전통 빵 푸리 (puri)를 굽고 있는 모습. 사진 김남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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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용 탑 코슈키가 서 있는 자베시 마을 입구. 사진 김남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