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회사 그만두고 해녀가 된 까닭은

[비즈]by 한겨레

지자체 장기체류 프로그램 통해

서울 벗어나 내 삶을 찾는 사람들

‘한달살이’에 숙박·체험비 지원

“어디든 미리 살아보고 결정해야”

한겨레

경남 거제에서 해녀로 새 삶을 살고 있는 신호진씨를 2022년 5월17일 만났다.

“더 이상 서울까지 출퇴근에 몇 시간씩 허비하지 않아도 되니 기쁘다. 거제에서 물질할 수 있게 돼서 행복하다.”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 살던 신호진(36)씨는 최근 경남 거제에 정착했다. 2021년 8월 아이들과 함께 거제에서 ‘한달살이’를 한 뒤 거제의 매력에 푹 빠졌기 때문이다. 한 달 동안 거제시 옥포동 인근에 숙소를 잡고 아이들과 함께 주요 관광지를 구경했다. 만약 거제에서 산다면 어느 동네에 살지, 병원이나 학원 등은 어디에 많은지도 살폈다. “한 달 동안 아이들과 함께 살아보니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한 달 살아보니 정착해도 좋겠다 싶을 만큼 거제가 좋아졌다.”


신씨는 직업도 바꿨다. 10년간 다니던 정보기술(IT) 회사를 그만두고 해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바다를 좋아한다는 막연한 이유도 있었지만, 회사에서 여성으로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이유가 한몫했다. “회사에 내 또래 여성은 있었지만 선배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롤모델이 돼줄 여성 선배가 없다보니) 나도 곧 회사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퇴사 뒤 할 일을 찾다가 해녀는 70~80대까지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신씨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낯선 도시에 정착하기로 선뜻 마음먹었던 것은 ‘경남형 한달살이’ 프로그램으로 장기체류형 관광을 하며 거제의 ‘관계인구’가 될 수 있었던 덕분이다.


관계인구란 특정 지역에서 장기간 머물거나, 정기적으로 오가는 사람, 지역 상품의 꾸준한 구매자, 심리적 지지자 등을 말한다. 최근 지방소멸을 막으려면 정주인구만을 위한 주거비, 출산장려금 지원 등의 정책에서 벗어나 관계인구를 늘려야 한다는 제안이 나오면서 전국 지자체에서 장기체류 지원 프로그램을 앞다퉈 운영하고 있다.

일(Work)과 휴가(Vacation) 합친 ‘워케이션’

경남은 2020년 시범적으로 5개 시·군에서 ‘한달살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다가 인기가 많아지자 2022년 프로그램 운영 대상을 18개 모든 시·군으로 늘렸다. 프로그램 참가자에게는 팀별 최소 2박에서 최대 29박까지 하루 5만원의 숙박비와 1인당 5만∼8만원의 체험비를 1회에 한해 지원한다. 대신 참가자는 자신의 체류 경험을 본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해당 지역을 홍보해야 한다.


2020년 사업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5개 시·군을 찾은 참가자가 1년에 464명에 그쳤다. 하지만 2021년에는 1555명이 참가를 신청했다. 예산 문제로 829명만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참가자 가운데는 서울과 경기·인천 등 수도권 거주자가 60%가량을 차지했다. 참가자 나이는 20~30대가 60% 가까이(488명)나 됐다. 경남뿐 아니라 최근 경북 경주·영주, 충남 보령, 전북 순창에서도 한달살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대도시인 부산에서도 관계인구를 늘리려는 비슷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워케이션’에 집중한 점이 다른 지자체들과 다르다. 워케이션은 ‘일(Work)’과 ‘휴가(Vacation)’의 합성어로 교외에서 휴식과 업무를 함께 하는 재택근무 개념이다. 부산도시공사는 최근 ‘해운대 한 달 살기, 워케이션 패키지’를 출시했고 부산창조경제혁신센터와 지역 관광 스타트업 기업들 역시 업무협약 등을 통해 ‘부산 오래 살기’ 등의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한달살이 열풍은 2011년 나온 책 <제주도에서 아이들과 한 달 살기>로부터 시작됐다. 처음엔 제주도, 강원도 양양 같은 유명한 여행지에서 시작됐다면 지금은 전국 각지에서 체류형 관광을 하는 사람이 증가하는 추세다. 한달살이는 시간적·물질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길다면 긴 한 달 동안 거주지를 떠나 낯선 도시에서 지내는 이유는 뭘까. 한달살이 경험을 했거나 현재 한달살이 중인 이들을 2022년 5월16~18일 직접 만나거나 전화 인터뷰했다.

한겨레

2022년 5월17일 경남 김해에서 신동헌씨가 숲속 벤치에 앉아 노트북으로 일하고 있다.

저물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

학원 강사였던 조해성(35)씨는 일을 그만두고 카페 창업을 준비하면서 5월부터 경남 김해 한달살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MZ세대는 ‘뷰 맛집’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김해엔 강변을 따라 경치가 예쁜 카페가 많다고 들었다. 김해에서 카페 투어를 다니며 아이디어를 얻고 싶다.”


숙소는 김해시 봉황동 근처에 얻었다. “봉황동은 ‘봉리단길’이라고 불리는 김해의 핫플레이스다. 예전에 번화가였다가 쇠퇴한 곳인데 최근 몇 년 사이 젊은 사람이 모여들어서 뜨는 곳이라더라. 노포도 많고 신규 카페도 많아서 신구가 섞인 느낌이다.”


경남 양산에서 한달살이 중인 김영일(34)씨도 마찬가지다. 청소년 관련 사회복지사로 일했던 그는 일을 그만두고 교육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내년엔 임용 준비를 해야 해서 시간이 없는데 그 전에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가족과 분리돼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서울 한 대학교의 연구원인 이관호(49)씨에겐 계약이 종료돼 한 달가량 휴식 기간이 생겼다. 이씨는 4월부터 한 달간 충남 보령에서 지냈다. 아내와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서울에 살면서 주말마다 내려왔고 그 외엔 혼자 시간을 보냈다. “49년 만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본 것 같다. 동해 일출은 여행지에서 많이 봤지만 처음으로 서해의 일몰을 매일 봤다. 마침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을 읽고 있었는데 저무는 해를 보고 있자니 묘한 경험이었다. 저물어가는 것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낮에 관광하고 저녁엔 논문 쓰고

신동헌(38)씨는 워케이션을 위해 5월부터 김해 한달살이 프로그램에 참가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전자회사에 다니던 신씨는 2021년 자비연수를 떠났다. 룩셈부르크대학에서 경영학 석사 창업자 과정을 듣기 위함이었다. 1학기엔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고 2학기엔 논문을 써내야 했다. 자신이 최고경영자(CEO)라 생각하고 어떤 제품을 개발해 어떻게 판매할지 등을 작성해야 했다. 신씨는 자신을 화장품 회사 CEO라 가정하고 황칠나무로 보습크림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황칠나무는 한국에 많은 나무다. 담당 교수는 한국에 가서 논문을 작성하는 게 좋겠다 권했고, 2022년 신씨는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자신의 집인 서울 성수동에선 도무지 집중되지 않았다. “서울이 아닌 곳, 친구도 넷플릭스도 없는 곳에서 온전히 논문에만 집중하고 싶었는데 마침 김해시에서 한달살이 프로그램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지원해서 뽑혔다.”


새로운 환경은 신씨에게 좋은 자극이 됐다. 낮에는 연지공원, 수로왕릉비, 문화의전당, 구지봉 등 관광지를 돌아보고 저녁부터 밤 12시까지 논문을 썼다. 관광 중에도 쓰고 싶은 말이 생각나 그 자리에서 노트북을 펼치기도 했다. “서울에 있을 땐 논문을 쓰다가도 쓸 말이 없어서 웹서핑을 자주 하고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를 보다가 시간이 흘러가곤 했는데, 지금은 산을 바라보다가도 공원을 걷다가도 유적지를 구경하다가도 쓸 말이 생각나서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


서울 토박이인 신씨에게 김해는 낯선 도시였다. 김해뿐 아니라 지방 소도시에 살아볼 엄두조차 내본 적 없는 그였다. “김해는 인구 50만 명의 소도시지만 없는 게 없다. 근처에 공항도 있고 전철로 부산까지 연결돼서 대중교통도 편한데다 마트, 병원, 대학도 있다. 또 가야 유적지가 잘 보존된 곳이어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논문을 제출하고 한달살이가 끝나면 서울로 돌아가겠지만 신씨는 언젠가 김해에 살아보고 싶다. 이미 지난 2년간 재택근무에 익숙해진 상황이다. “풀타임 원격근무가 가능해지면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서울에서 수원까지 매일 출퇴근했는데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가능해지면서 그렇게도 일할 수 있음을 알았다. 정착이 어렵다면 김해에서 또 워케이션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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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양산 통도사 들머리에서 김훈(왼쪽)씨와 친구 김영일씨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정착 아닌 체류형 관광도 좋아

물론 한 도시에 한 달 이상 살았다 해서 모든 사람이 정착을 생각하진 않는다. 일자리나 주거지 등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김훈(34)씨는 친구 김영일씨와 함께 양산에서 한달살이 중이다. 4월엔 경남 함안에서 한 달 동안 지냈다. 광주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김씨는 청와대 경호처에서 5년간 일하다 최근 퇴사했다. 양산에 온 것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의 마지막을 배웅하지 못하고 퇴사해서 아쉬웠다. 그래서 그의 사저가 있는 양산에 와보고 싶었다.”


김씨에게 한달살이는 여행이자 일상이다. 그는 낮엔 관광하고 저녁엔 자격증 공부를 했다. “내일 부산에 가서 자격증 시험을 칠 것이다. 체류형 관광을 하면 이렇게 공부도 하고 일상적인 일도 해결할 수 있어 좋다.”


김씨는 한달살이 이후 고향 광주로 돌아가 다른 진로를 찾아볼 예정이다. “함안도 양산도 너무나 매력적인 도시지만, 일자리나 주거지 등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정착을 생각해보진 않았다. 물론 지자체에서 숙박비 지원을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달살이 이전엔 이름도 생소했던 도시들인데 이제는 홍보대사가 될 것 같다.”


신호진씨도 해녀라는 일자리를 구했기 때문에 거제로 이주할 수 있었다. 신씨는 2021년 거제의 해녀학교에서 3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수업을 들었다. 해녀가 되는 방법을 배운다고 해서 모두가 해녀로 살아가진 않는다. 신씨의 해녀학교 동기는 25명인데 8명이 해녀가 됐다. 그러나 현재까지 해녀 활동을 하는 사람은 신씨를 포함해 2명이다. “뱃멀미가 없는 체질인데도 처음 일주일 동안은 바다 위에서 멀미했다. 한 달 만에 20㎏이 빠졌다. 코와 귀에서 피가 나기도 했다.”

물질 잘하면 해삼 30㎏, 소라 70㎏

해녀는 상군·중군·하군으로 나뉜다. 상군은 최대 15m 정도까지 잠수하고 나머지는 그보다 얕은 물에서 작업한다. 신씨는 실력 차이가 아니라고 말했다. “하군은 얕은 곳에 자주 들어가서 작은 물건을 여러 번 채취해 오고 상군은 깊게 들어가서 큰 물건을 한 번에 가져온다. 아직은 배우는 단계라 깊은 곳에도 들어가보고 얕은 곳에도 들어가본다. 나는 발견하지 못한 것을 찾아내 오는 선배들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보다 수입은 훨씬 줄어들었다. 아직은 초보 해녀라 해산물을 많이 잡진 못한다. 날씨나 바람에 따라 작업량도 다르다. “오늘은 해삼 5㎏, 멍게 10㎏ 잡았지만 잘 잡히는 날엔 해삼 30㎏, 소라 70㎏도 잡는다. 우리 배에는 해녀 7명이 있는데 각자 자신의 작업량을 기록하고 선주가 유통업체에 넘긴 다음 수익을 배분해준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때보다 수입은 줄었지만 20∼30년 뒤에도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걱정되진 않는다.”


신씨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없는 거제의 삶이 만족스럽다. 하지만 무작정 이주부터 생각하기보다는 미리 살아보기를 조언했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닐 땐 내일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출퇴근에도 왕복 세 시간 넘게 걸렸다. 거제에선 몸은 힘이 들어도 스트레스가 없다. 물질하다가 돌고래나 수달을 볼 수 있는 것도 기쁨이다. 다만 어디에 살든 꼭 미리 살아보고 결정하면 좋겠다.”


거제·김해·양산=글 신지민 기자 godjimin@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2022.06.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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