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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 [한겨레S] 인터뷰

“춤과 신촌블루스 좋아하는 영희, 현실 속 내 모습과 똑같아요”

by한겨레

‘우리들의 블루스’ 정은혜

8년째 캐리커처 그린 현역 화가

다운증후군 장애인역 직접 연기

전문배우들 못잖은 연기로 화제

“극 중 춤요? 원래 춤 좋아해요~”

한겨레

<우리들의 블루스> 다운증후군 영희로 화제를 모은 정은혜는 2014년부터 활동한 화가다. 2016년 캐리커처 작가로 유명해졌다. 두물머리픽처스 제공

그에게 줄 선물로 붉은색 립글로스를 선택할 줄이야! 이게 다 방영 중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티브이엔) 영향이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지난 14·15회에서 다운증후군 장애인 ‘영희’ 이야기를 다뤘다. 극 중 정준(김우빈)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운 적 없던 우리는 이 드라마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외모에 관심이 많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는구나’처럼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것들. 영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날의 그 선택은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그 선물을 받은 ‘현실의 영희’도 장애인에 대해 잘 몰랐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난 5월30일 늦은 오후 경기 양평으로 달려가 영희를 연기한 정은혜를 만났다. 그는 붉은색 립글로스를 즉석에서 바른 뒤, 입술을 내밀어 섹시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웃.’ “하여튼 못 말려. 근데 은혜야, 너무 잘 어울린다”는 곁에 있던 엄마의 말에 정은혜의 입술은 두번 더 나왔다가 들어갔다. ‘우~웃’, ‘우우~웃.’


<우리들의 블루스>는 다운증후군 정은혜가 다운증후군 영희를 연기해 화제를 모았다. 인기 미니시리즈에서 주조연급으로 등장한 장애인 역할을 장애인이 직접 연기한 것은 처음이다. 낯선 광경이기도 했지만 정은혜가 연기를 잘했다. 정은혜는 극중 동생 영옥(한지민)의 남자친구 정준이 자신을 처음 만나 당황하자 “쟤 만나지 마, 나빠”라면서 짜증도 내고, 술 마시고, 흥에 겨워 춤도 추고, 동생의 야속한 말에 혼자 몰래 눈물도 흘리는 등 다채로운 감정을 곧잘 표현했다. 그는 2005년 15살 때 국가인권위원회가 지원한 옴니버스 인권 영화 <다섯개의 시선> 중 한편인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에 출연했지만, 전문 배우는 아니다. 2014년부터 캐리커처를 그려온 현역 화가다.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작가로, 양평의 문호리 리버마켓에서 2016년부터 초상화 그려주기를 했고, 지금껏 노희경 작가를 포함해 4000여명의 얼굴을 그려 전시한 작가로 유명해졌다. 시청자들은 전문 배우도 아닌데 한지민, 김우빈, 이정은 심지어 김혜자, 고두심과 한데 어우러지는 모습에 놀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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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물머리픽처스 제공

현장 요구대로 OK, 혹시 연기 천재?

―연기를 잘해서 놀랐어요. 연습 많이 했나 봐요?


“아니요.”


―그럼 현장에서 그냥 바로 연기?


“네.”(정은혜)


“어머, 네가 연기 천재인 줄 알겠다. 숙소에서 아빠와 대본 외우고 그랬으면서. 어머머머!”(엄마)


“에이 참,(웃음) 집에서 혼자서도 대본 읽고 숙소에서 아빠와도 읽고 외우고 그랬어요.”(은혜)


왠지, 딸의 재치를 눈치채지 못한 엄마 때문에 뭔가 망친 듯한 분위기다. 정은혜의 입에서 “에이 참”이 한번 더 나왔다. 악수를 청하면 손등에 뽀뽀를 하고, “예쁘다”란 말로 상대를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정은혜의 재치를 이젠 엄마도 못 따라가는 듯하다. 그의 엄마 장차현실도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를 그린 작가다. 그런 엄마한테 노희경 작가가 전화를 한 건 2020년 10월의 어느 날이었다.


“깜짝 놀랐어요.”(엄마) 노 작가는 처음에는 다운증후군 취재 차원에서 정은혜와 만났고, 그러다가 출연까지 제안했다. 아빠인 서동일 다큐멘터리 감독은 “드라마 제안이 기쁘면서도 걱정됐다”고 한다. “<언니가 이해하셔야 돼요>를 촬영할 때 은혜는 15살이었어요. 그때는 감정 기복이 심해서 스태프들이 온전히 은혜 기분을 맞춰줬어요.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 감독님한테 촬영을 한두번에 끝낼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반복해서 하면 오히려 잘 안될 수도 있다고 부탁드렸죠.” 그랬는데? “막상 슛 들어가니까, 은혜가 현장의 모든 걸 다 받아들이더라고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그건 정말 의외였어요.”


15살에서 32살이 되는 사이 정은혜도 성장했다. 부모는 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 “15살 때 그렇게 고생했는데도 드라마 제안이 왔을 때 은혜한테 물으니 ‘그럼요, 잘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아빠 서동일 감독이 정은혜의 반응을 전하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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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연기 하면서 진짜 눈물을 펑펑 쏟은 장면 갈무리

노희경 작가가 평소 정은혜의 모습을 영희에게 투영한 것이 연기를 편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됐다. 뜨개질을 하고, 춤을 추고, 신촌블루스를 좋아하는 것도 정은혜의 모습이다. 주량도 영희처럼 캔맥주 대용량으로 한캔이다. 정은혜의 직업을 살려 영희가 외로울 때마다, 동생이 보고 싶을 때마다 그림을 그리는 설정으로 빚었다. 드라마에서 영희가 그린 그림은 정은혜가 촬영 중에 직접 그렸다. 이를 모르는 시청자들은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리는 걸 신기하게 보았다. 연기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은혜의 소셜미디어에는 “저는 문화 속에 빠질 거예요. 공부도 하고 재미있는 만화도 보고 가수 김광석 선배님과 김현식 선배님 책을 열심히 볼 겁니다” 같은 다짐의 글이 많다. 록블루스 밴드 신촌블루스의 공연을 보러 간 사진도 있다.


―극 중에서 춤도 추던데, 원래 잘 춰요?


“춤추는 거 좋아해요.”


―진짜요? 배웠어요?


“집에서 음악 틀어놓고, 엄마도 같이 출 때도 있고.”(은혜)


“어머, 너 구민회관에서 나이트(클럽) 댄스 배웠잖아.(웃음)”(엄마)


“아이 참.”(은혜)


―나이트 댄스요?


“은혜가 학교 그만두고 홈스쿨링 할 때 가르치던 선생님이 풍물 하던 분이셨어요. 그분한테 장구도 배우고 춤사위도 배웠는데, 그분이 가장 잘하던 게 나이트 댄스여서 같이 배웠죠. 선생님이 그만두고 난 뒤에 춤은 계속 추고 싶은데 마땅한 곳이 없어서 구민회관에 갔죠.”(엄마)


―지금도 배워요?


“지금은 안 배워요.”(은혜)


―신촌블루스는 어떻게 좋아하게 됐어요?


“가수 김현식 다큐를 몇번 봤는데 신촌블루스 노래가 나와서 듣고 좋아하게 됐어요. 제가 신촌블루스 공식 홈페이지 회원이에요.”


―신촌블루스를 모르는 이들에게 곡을 추천한다면?


“‘골목길’과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


―그럼 노래방 가서도 가장 먼저 신촌블루스 곡을 불러요?


“아니요. 나훈아의 ‘사랑’ 불러요. 박상철의 ‘황진이’ ‘자옥아’, 오승근의 ‘내 나이가 어때서’, 김자옥의 ‘공주는 외로워’ 불러요. 그리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도 불러요. 제가 이선희도 좋아하고, 김수희, 현이와 덕이도 좋아해요.”


―모바일 사진첩에 꽃 사진이 많아요.


“봄여름가을겨울 밴드도 좋아해서요. 보세요. 이 꽃은 봄 그리고 이건 여름, 가을, 겨울. 봄여름가을겨울이에요. 꽃 사진도 그려볼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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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노희경 작가가 정은혜 개인전을 찾았다. 장차현실 작가 제공

사랑스러운 영희 혹은 정은혜

봄여름가을겨울 밴드를 보면서 계절별 꽃을 떠올리는 이가 몇이나 될까. <우리들의 블루스> 메이킹 영상을 보면 정은혜는 한지민한테 웨이브 춤 시범을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한지민한테 “지렁이처럼 이렇게~” 하라고 말한다. 시청자도 출연진도 ‘다운증후군 장애인’이 웨이브 춤을 잘 출까? 하고 편견을 가졌을 수 있다. 또 다른 영상에서 정은혜는 김우빈이 “누나, 오늘 머리 예쁘게 했네”라고 말하며 빤히 쳐다보자 “왜 이래”라며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린다. ‘다운증후군 정은혜’의 화제성이 지속되는 데는 이렇듯 정은혜라는 사람이 주는 호감도도 영향을 미친다. 누리꾼들은 “사랑스럽다” “귀엽다” “목소리가 매력 있다”며 관심을 표현한다. 서동일 감독은 “은혜 소식을 전하는 유튜브의 구독자가 드라마 방영 전에는 500명이었는데, 방영 뒤 1만7천명이 되었다”며 관심에 놀라워했다.


<우리들의 블루스>가 우리에겐 감동을 주고 변화의 계기가 됐지만, 정작 정은혜에겐 어땠을까. 자신을 빼닮은 영희를 보면서 혼란스럽지는 않았을까? 드라마를 보면서 그의 상처가 걱정되기도 했다. 장차현실 작가는 “다행히 은혜는 드라마와 현실을, 영희와 자신을 분리하고 있더라”고 했다. 정은혜는 자신과 영희는 분리했지만, 영희의 아픔에는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엄마가 물었다. “영희 보면서 네 생각도 났느냐”고. 정은혜는 “상처 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드라마니까”라고 말했다.


―드라마 보고 울었다면서요?


“울었죠. 내용이 슬프잖아요. 12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재앙이 온 거죠, 영희한테.”


―그래도 영희한테는 영옥이 같은 동생이 있잖아요.


“…영옥이 싫어요. 어렸을 때 이모 집에서 착하게 살다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했으니까. 그렇게 하니까 이모부가 갑자기 성질을 내고.”(영옥은 부모를 잃은 뒤 언니 영희를 데리고 이모집에서 1년 정도 살게 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눈치가 보이면서 시설로 간다.)


―영희는 영옥이가 자신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그 마음을 다 알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지하철에서도 영희를 버리고 가고. 그런 거 때문에 마음이 좀 아파요.”


―영희가 마당에서 그림 그리면서 우는 장면은 정말 울었던 거죠? 영옥한테 심한 말 들은 영희 때문에 마음이 아팠던 거예요?


“마음도 아팠지만,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이니까.”(은혜)


“제가 은혜한테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다고 생각해봐’라고 했더니 바로 엉엉 울더라고요.”(아빠)


촬영이 끝나고도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그가 떠올린 소중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정은혜는 미술을 전공한 엄마의 영향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정은혜의 동생도 돌볼 겸 동생의 학교 앞에 화실을 차렸다. 정은혜한테 청소 아르바이트를 시킨 뒤 자리가 비면 그림을 배우게 했다. 엄마가 “깜짝 놀랄 정도”로 정은혜의 실력이 빠르게 늘었다. “그림을 배우면서 조현병 증상, 시선 강박 등이 없어졌고, 사회 속 존재로 살아가게 됐다”고 한다.


지금은 멋진 작가이지만 정은혜한테도 드라마 속 영옥처럼 가족만 알 수 있는 힘든 모습이 있었다. “은혜도 스무살이 되어서 갈 곳이 없어져, 집에만 있으면서 조현병 증세가 나타났어요. 어느 날 은혜가 방에서 혼자 소리치고 폭발해버린 적이 있죠. 멈춰보려고 문을 여는 순간 은혜가 바닥에 앉아서 다른 눈빛을 하고 있는데, 그 눈빛이 나한테 그만하자고, 엄마 우리 열심히 살았으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쟤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럴까.’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때부터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놨어요. 은혜가 뭔가를 해낼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것에 집중해보자. 그런 바람이 통한 것인지 이후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던 거예요.” 엄마는 몇번이나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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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현실 작가는 정은혜가 어릴 때 장애를 가진 아이를 키우는 부모 이야기를 만화로 그렸다. 이정용 선임기자

안아주는 게 좋아서 ‘포옹전시회’

사람을 안아주는 게 좋다”는 정은혜는 8월23일부터 29일까지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포옹전시회를 연다. 6월23일에는 서동일 감독이 3년간 촬영해서 완성한 다큐멘터리 영화 <니 얼굴>도 개봉한다. 캐리커처 작가로서 정은혜의 성장과 매력을 기록했다. 2020년 25회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이고, 지난해 서울환경영화제 우수상을 받아 일찌감치 기대를 모았다.


서동일 감독은 “<우리들의 블루스>가 다운증후군의 존재에 관심을 갖게 해줬고, 그들을 중심에 서게 해줬다”고 고마워하며 딸 은혜에 대한 특별한 마음도 전했다. “은혜는 그런 존재인 것 같아요. 내가 비록 어딘가에도 속할 곳 없는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지만, 아무도 나를 초대해주지 않지만, 내가 가진 그림이라는 도구로 나의 경계를 확장하면서 내가 너희를 초대하겠다고 말하는 존재. 자기가 가서 중심에 서는 그런 존재.”


정은혜한테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물었더니 그는 사진을 보여줬다. 영옥과 영희가 시설에서 헤어지는 장면이었다. 시설의 장 선생님(양희경)이 두 사람의 가운데 서 있다. “이 장면이 왜?”라고 되묻고는 답을 기다리는 몇초가 몇시간처럼 느껴졌다. ‘바보같은 질문을 해서 상처를 줬구나’ ‘동생과 헤어지니 당연히 슬프지.’ 그러나 정은혜는 늘 예상을 뛰어넘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이래서 사람들이 정은혜를 좋아한다. “양희경 선생님과 같이 연기해서 너무 좋았어요. 제가 양희경 선생님을 좋아하거든요.”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우리는 끝없이 없애야 한다.


양평/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