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중앙이었던 중앙동, 종일 걸어도 질리지 않아

[여행]by 한겨레

[커버 스토리] 부산 레트로 투어

부산 여행 해볼만큼 해본 이들이 찾는 ‘레벨3’ 여행지

항만 따라 번성했던 원도심의 흔적, 특유의 고즈넉함

50년 이상 한자리서 신념 지켜온 노포 투어도 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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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코모도호텔.

매미 소리를 따라 계속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 흰색 문은 잠겨 있었다. 흰색 문 옆집에서 키우는 개가 계속 짖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리니 흰색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눈앞에 수십개의 계단이 더 있었다. 계단을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부산의 원도심이 눈 밑에 있었다. 계단 끝 경비실에서 마르고 엄격한 인상의 남자가 나와 눈인사를 건넸다. 한국 기상의 역사적 장소인 부산기상관측소에 올라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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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기상관측소.

부산기상관측소는 한국의 숨겨진 기상유적이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근대식 기상관측소가 생긴 곳이 부산이다. 1884년 간이 기상관측을 시작해 1934년 대청동에 청사를 새로 짓고 광복 뒤 국립중앙관상대(현 기상청) 부산측후소로 이름을 바꿨다. 2002년 부산지방기상청이 이전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부산지방기상청으로 쓰였다. 부산기상관측소는 역사성을 인정받아 2017년 세계기상기구(WMO)가 지정한 100년 관측소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시아의 100년 관측소는 6개뿐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이 계단을 올라도 상관없다. 건물도 멋지고 전망도 훌륭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레트로’ 건물 그 자체다. 이런 근대 건축이나 초기 근대 도시의 흔적을 좋아한다면 부산 중구는 하루종일 걸어도 질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산기상관측소에서 5분만 걸어가면 1958년에 짓고 아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주택이 나온다. 일제 때부터 주택지로 쓰이던 곳에 동방유량 회장 신덕균이 지은 주택이 2021년 부산중구문화원으로 개장했다. 1958년에 지은 주택의 디테일이 여전하다.


건물을 넘어 이 동네의 골목길 구성 자체가 역사의 흔적이다. 부산기상관측소와 부산중구문화원이 있는 곳은 부산 중구의 복병산과 용두산 일대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전 17세기부터 조선과 일본이 무역을 하던 창구인 초량왜관 터다. 초량왜관은 1876년 폐관했으나, 초량왜관종합안내도에 따르면 이때의 도로와 항만 등 기반시설이 부산 원도심의 기본 틀이 되었다. 그 골목길을 따라 오늘날까지 특유의 분위기를 내는 부산 원도심이 형성됐다. ‘복병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왜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감시하려 조선군 복병을 주둔시킨 산이라 붙은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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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중구문화원 입구.

전에는 이곳이 부산의 중심이었다. 서울이 그렇듯 부산역 근처에 부산시청이 있었다. 부산시청과 부산항 근처에 해운회사들도 자리잡았다. 부산 문화방송과 법원도 근처에 있었으니 이름처럼 이곳이 부산의 중앙이었다. 


부산 중앙동에서 1956년부터 자리잡은 국숫집 ‘중앙모밀’을 운영하는 2대 사장 강명진은 “4층에서 내려다보면 골목이 (사람들이 많아) 새까맸어요” 라고 회상했다. 부산시청과 법원과 문화방송 등 대형 행정시설과 회사가 중구를 떠나며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금은 해운과 선박, 금융 등 일부 산업이 남아 있으나 이곳을 부산의 중심이라고 하기는 애매하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자주 오던 일본인 관광객까지 줄어 지금은 빈 사무실도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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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모밀의 모밀국수.

2022년 버전 중앙동은 오히려 그래서인지 옛날 도시 모습이 많이 남아 있다. 옛날 사무 건물들도 상당 부분 그대로, 비즈니스맨들이 머물던 옛날 호텔도 그 모습 그대로, 그 사람들이 찾아가던 식당 중에도 아직 그때 그대로 운영되는 곳들이 있다. 1980년대 부산 최고의 호텔이었던 코모도호텔(1979년 개관)은 아직도 컬트적인 옛날 모습이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건축가 조지 프루가 한옥의 디테일을 자기 방식대로 서양식 호텔 건축에 이식했는데, 이 호텔은 지금 봐도 처음 보면 뭔가 싶을 만큼 이색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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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도호텔의 창문.

당시 서양인이 해석한 한국 미감을 뭐라 판단하든 이 건물의 실내외 디테일에 공예적 완성도가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객실마다 오리지널 디자인의 스탠드가 있다거나, 한지로 마무리한 창문마다 나뭇잎을 넣어둔 식이다. 이런 부분은 오늘날에도 볼 수 없는 고급 인테리어 디테일이다. 인터넷을 보면 오히려 일부 서양인들이 이 건물의 기묘한 디테일에 열광하기도 한다. 장준오 코모도호텔 세일즈팀장은 “고객의 수요에 따라 리모델링을 많이 진행했으나 전체 310여개 객실 중 100여개는 옛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시간의 흐름이 지난 곳에 사람들의 고집이 남았다. 1959년 문을 연 백구당 대표 조재붕은 아직도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새벽 4시에 출근한다.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분점은 내지 않는다. 맛이 일정하지 않다는 이유로 분점을 내지 않는 건 중앙모밀도 마찬가지다. 중앙모밀은 개점 이후 방송에는 나가본 적도 없다. “방송에 나오면 괜히 단골들 불편해진다”는 이유다. 중앙모밀 대표 역시 새벽부터 출근한다. 그런 성실함 때문인지 백구당의 대표 빵 크로이즌은 오전 11시면 다 나가고 중앙모밀은 주말엔 점심시간 넘어서까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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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원도심 여행 지도

“중구와 남포동이 부산 여행 레벨3쯤 됩니다.” 섭외를 하러 찾았다가 섭외는 못 하고 술만 마신 어느 술집에서 만난 옆자리 손님이 이야기해주었다. “처음 부산을 찾은 분들은 해운대에 가죠. 조금 더 다니다 보면 광안리에 가고, 더 즐길 걸 찾는 분들은 중구 남포동의 원도심으로 오죠.” 이 가게를 굳이 소개하지 않는 이유도 사장님의 고집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취재를 하러 온 걸 모르는 채 어딘가에 잠깐 언급만 되었는데도 사람이 가득해서 단골들이 불편해하더라고 말했다. 그런 말까지 듣고 굳이 섭외를 청할 수는 없었다. 엘피(LP)로 가득한 작은 술집은 그 자체로도 여유롭고 평화로워 보였다. 서울에도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어디 갔는지 도통 알 수 없는, 가게 하나에 자신들의 고집과 신념을 심던 사람들이 아직 부산 원도심에는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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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구당의 빵.

도시의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언젠가는 중앙동도 변할 것이다. 부산 원도심은 북항 개발과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로 들썩이는 분위기다. 코모도호텔도 계속 리모델링을 진행할 예정이고, 주변의 또 다른 오랜 역사의 동네 영주동도 재개발추진위원회 펼침막이 붙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때 그 옛날 대도시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올여름 부산 원도심을 찾아보면 어떨까. ‘레트로’한 뭔가를 좋아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도, 옛날 도시 분위기를 느끼고픈 어른들에게도 좋을 것 같다. 그때 그 옛날 도시의 모습과 옛날 사람들의 고집이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는 여기에 있으니, 수고스러워도 여기 한번 와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백구당 조재붕 대표가 말했다. 이 말이 이 원고의 맺음말이구나 싶었다.


글·사진 박찬용 칼럼니스트

2022.08.2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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