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앞에서 위태로운…‘MZ세대 세 자매’의 여정

[컬처]by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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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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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작은 아씨들>(티브이엔·tvN)은 시작한 지 10분 만에 시청을 포기하게 만드는 불편함이 있다. 하지만 제발 참고 보시길 바란다. 이 고비만 넘기면 드라마의 장르가 가난을 전시하는 가족극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전개와 방대한 스케일을 지닌 사회극임을 알게 된다. 못 믿겠으면 작가의 이름을 보라. 영화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박찬욱 감독과 공동 작업한 시나리오로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작가이자, 영화 <비밀은 없다> <독전>에서 소수자적 정서로 장르를 비튼 작가이자, 드라마 <마더>를 통해 여성들의 용기와 연대를 세심하면서도 담대하게 펼쳐 보였던 작가 정서경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의 탐미적인 화면과 김고은의 열연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드라마는 고전 소설에서 제목만 따온 게 아니다. 자매들의 캐릭터, 부자 고모할머니와 부자 이웃 청년, 아버지의 부재, 하다못해 막내의 코에 대한 불평까지 따왔다. 정서경 작가는 원작의 자매들을 현대 한국으로 옮겨 온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전과 정확하게 선을 긋는 대목이 있다. 바로 부모와의 관계다. 원작에서 아버지의 참전은 대의를 위한 일이었고, 어머니는 품위가 있었다. 딸들은 부모를 존경했다. 부상당한 아버지에게 가려는 엄마의 여비를 마련하느라 둘째 딸이 머리를 자를 정도로. 그러나 정서경 작가는 시작 5분 만에 이런 관계를 전면 부인한다. 그러고는 부모 자식 관계에 깊은 칼집을 쑤셔 넣는다. 이 점이 현대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는 정서의 살풍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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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데 착한 부모가 어딨어? 무능한 거 자체가 나쁜 건데.” “세상 그 어떤 것도 돈보다 신성하지 않다.” “사랑은 돈으로 하는 거야.” 부자 악역이 내뱉는 독설이 아니다. 절박한 주인공과 신념에 찬 조력자의 입에서 나오는 진실한 대사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


이 가족은 외환위기 때 망해서 비닐하우스를 전전하다 셋째 딸이 죽었다. 이 경험은 자매들에게 다르게 녹아든다. 첫째 ‘오인주’(김고은)에게는 ‘가난하면 죽는다’는 공포의식을 심었다. 그에게 돈은 가족의 안전과 안녕이다. 그래서 돈에 매달리고 갈망한다. 돈 가방을 매고 밧줄을 타거나, 돈 앞에서 자진해 매를 맞는 장면은 돈을 향한 인주의 절박함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둘째 ‘오인경’(남지현)에게 동생의 죽음은 무의식적 억압에 의해 망각되었다. 하지만 방송기자로 슬픈 뉴스를 전할 때마다 목이 멘다. 이를 감추느라 알코올의존성이 되었다. 인경은 한동안 고모할머니의 집에서 자랐다. 부유함을 누리고, 주식 투자로 숫자 놀음을 경험한 그는 “단돈 20억에”라 말할 만치 돈에 대해 초연하다. 돈보다는 사회적 불평등과 정의에 관심을 쏟는다. 어쩌면 정의감은 인경이 선뜻 사는 비싼 아이스크림이나 테킬라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난과 죽음의 기억이 아로새겨진 인주로선 너무 멀게 느껴지는.


막내 ‘오인혜’(박지후)에게 언니의 죽음은 영아기에 엄마의 자장가를 통해 불어넣어진 악몽이다. 유전병을 지닌 인혜는 가족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언니처럼 죽을 거란 공포에 시달린다. 인혜는 가족을 환멸하며, 재능을 팔아 부자 가족의 하녀가 되기를 자청한다. 그는 인정욕구가 강하지만, 예술가로서 자아를 팔 만큼 자존감이 결여되어 있다. 어쩌면 인혜가 ‘박재상’(엄기준)을 롤 모델 삼아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파내는 신공을 발휘할지도 모른다. 혹은 드라마 <밀회> <돈꽃> 등에서 보았듯이, 재벌가의 온갖 추잡한 일을 대신하며 영혼을 갉아먹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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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자매가 돈 앞에서 벌이는 행동은 안쓰럽고 위태롭다. 그러나 저마다 이해가 된다. 외환위기 이후 자본의 전일적 지배를 겪으며 자라난 한국의 엠제트(MZ)세대에게, 특히 여성들에게 이보다 쩌릿한 공감과 교훈을 안기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스스로 부자가 되길 원했던 ‘(진)화영 언니’(추자현)와 고모할머니(김미숙)까지 참조할 점이 많다. 경리로서 완벽한 일 처리와 자기 계발의 이중생활을 했던 화영 언니와 재혼 대신 부자가 되길 택한 후 리스크를 감수하며 냉철한 투자를 이어가는 고모할머니는 흔한 로맨스물에선 찾아보기 힘든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다. 세 자매가 이들을 지표 삼아 어떻게 성장해나갈지,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대중문화평론가

2022.09.23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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