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리랜드’ 임채무 “아이들 웃음이 좋은데 어쩌겠어요”

[연예]by 한겨레

[쉼톡⑩] 두리랜드로 즐거운 인생-임채무

1973년 술판 옆 노는 아이들 보고

안전한 놀이터 만들어주겠다 결심

버는 족족 놀이동산에…“돈은 가치 있는 데 쓰자”

“왜 사서 고생이냐는데 이 자체가 즐겁고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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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임채무는 1973년 경기 양주 장흥면의 한 계곡에서 위험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놀이동산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지난달 6일 그 꿈의 결실인 장흥면 두리랜드에서 ‘두리랜드 아저씨’ 임채무를 만났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아이들도 있는데, 어른들이 술이나 마시고 고성방가까지….” 1973년께 경기도 양주 장흥면의 한 사극 촬영 현장. 종일 자신의 촬영 순서를 기다리던 한 무명 배우는 인근 계곡에서 놀던 가족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문득 이런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래! 아이들이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터를 만드는 거야!” 그로부터 십여년이 지난 1990년 5월1일. 장흥면 그때 그곳에 놀이동산이 들어섰다. 규모는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다’는 두리랜드다. 한 무명 배우가 품은 꿈이 현실이 된 곳이다. 지난달 6일 “어린이들에게 꿈과 동화의 세계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이젠 유명 배우이자 두리랜드 대표인 임채무(73)를 만났다.


배우 임채무가 놀이동산을 운영한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졌지만, 이곳이 올해로 개장 33년째라는 점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갓 태어난 아이가 30대 중반이 됐을 세월이다. 임채무는 “어렸을 때 부모 손을 잡고 두리랜드를 찾은 아이가 이제는 어른이 돼서 자신의 아이를 데리고 온다. 예전에 여기서 찍은 사진을 들고 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기분이 묘해요. 신기하죠. 벌써 이렇게들 컸나 싶고. 한편으론 내가 늙었구나 싶고.(웃음).” 임채무는 “두리랜드에는 내 삶이 묻어있다”고 말했다.


‘두리랜드 아저씨’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니 가슴이 저릿해 오는데, 문득 이런 궁금증도 생긴다. ‘그는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두리랜드에는 임채무의 삶뿐만 아니라 ‘돈’까지 묻어있기 때문이다.


임채무는 돈을 벌기 시작한 1970년대 말부터 땅을 조금씩 사들이며 두리랜드를 넓혀왔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1984년 <사랑과 진실>(문화방송·MBC)로 스타가 되자 기절할 정도로” 돈이 모였다. 1500평으로 시작해 현재 1만6000평이다. 돈이 부족할 때는 가진 것을 팔았다. 2020년에는 마지막 남은 자산인 서울 아파트를 팔고, 두리랜드 안에 거주지를 마련했다. 야외 놀이동산을 실내 테마파크로 바꾸면서 자금이 부족해서였다. 그는 “지금껏 두리랜드에 들어간 돈만 약 250억원이고, 그 중 150억원이 은행빚”이라고 말하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었다.


“이거(두리랜드) 팔아서 건물이라도 사놓지, 왜 애들한테 시달리냐고 말해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럴 땐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네 생활 스타일이고, 이건 내 삶이다’라고 말해요.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웃고 있어요. 눈을 마주치면 서로 인사를 해요. 또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게 (단체로 온) 아이들이 싸온 김밥이에요. 할아버지 하나 달라고 하고 맛을 봐요. 안 주는 애들도 있지만.(웃음) 그 웃음과 그 맛이 좋은데 어쩌겠어요.” 그는 “남들은 날 보고 ‘왜 그렇게 사니’, ‘사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데, 나는 이 자체가 즐겁다.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하다는 그에게 이젠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느냐”라고 묻자. 지난 세월, 내부공사를 하거나 자연재해로 멈춘 날을 빼고는, 두리랜드는 계속 문을 열었다. 먹고 사는 일 외에 ‘내가 즐겁고 행복감을 느끼는 일’에 도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것을 지키려고 모든 것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임채무가 33년 동안 두리랜드를 지켜온 삶을 들여다보면, 도전도 어렵지만 포기는 더 빠른 이 시대에, 잔잔한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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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 기자

지난달 6일 찾은 두리랜드는 입구부터 분주했다. 인근 초등학교 아이들을 위한 ‘무인 버스 문구점’을 만드는 중이었다. “근처에 초등학교 두 곳이 있는데, 가까운 곳에 문구점이 없어요. 아이들이 준비물 사기가 힘들다고 해요. 그래서 중소기업과 직접 연계해서 학용품을 더 저렴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했어요.” 지인의 얘기를 듣고 임채무가 아이디어를 내 일을 벌였다. 


입구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직접 유튜브 영상을 만들어 볼 수 있는 부스도 마련돼 있었다. “두리랜드 맞은편 건물은 교육문화관으로 운영하려고 했어요. 세계민속 토속인형전시회를 준비 중이었는데 기증자 사정으로 아직 개관은 못 했어요.” 임채무의 머릿속에는 놀이동산에 이어 가족을 위한 문화공간까지 들어서 있다. 그는 “필요한 게 있으면 바로 진행한다. 돌다리는 두들기면서 건너야 한다는 게 생활신조다. 뭐든 일단 시작해보고 조금씩 고쳐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 촬영이 없는 날이면 오전 일찍부터 두리랜드에 나와 종일 곳곳을 돌아다닌다고 했다. 놀이기구가 이상은 없는지, 교체해야 하는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등을 살핀다. “제가 어느 한 장소에 멈춰서 한참을 멍하게 있으면 직원들은 생각해요. ‘아 저 인간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구나’(웃음)”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무인 버스 문구점이고 유튜브 부스이고 바로 이 놀이동산이다. 


놀이기구도 전문가 조언을 받아가며 공부하면서 그가 하나씩 들여왔다고 한다. 자그마한 ‘귀신의 집’은 인부를 고용해서 만들었다. “이 지역에 물난리가 났을 때도 인근 군부대 도움을 안 받고 한 달 동안 문 닫고 직원들과 직접 다 정리했어요. 도움은 고마운데 혹시나 기구가 망가지면 어쩌나 걱정되더라고요. 놀이기구는 안전상 세심하게 관리해야 해서 조심하며 닦아야 하거든요. 더디더라도 우리가 직접 하자고 생각했죠.” 그는 “두리랜드에 내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다”고 말했다.


임채무에 따르면 국내에서 개인이 놀이동산을 운영하는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인이 부지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타고난 부지런함은 임채무를 배우로도, 두리랜드 아저씨로도 만들어 줬다. 그는 매일 밤 9~10시에 잠들고 다음 날 새벽 1~2시에 일어난다. 그때부터 3~4시간 정도 전날 한 일을 정리하고, 오늘 할 일을 떠올려 메모한다. 새벽 4~5시 즈음에 잠깐 다시 눈을 붙였다가 그날 하루를 시작한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조기 축구를 하면서 새벽에 일어나던 것이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고 말했다. “드라마 녹화 때도 늘 30분에서 1시간 정도 먼저 도착했고, ‘임채무는 뭐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신뢰가 쌓이면서, 배우 생활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할 일을 챙기고, 약속을 지키고, 생각한 것은 행동으로 옮겨온 임채무. 그의 휴대폰에는 2000년도부터 매일 일정이 빼곡했다.


그는 “어릴 때는 놀이동산 같은 건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처음 두리랜드가 개장했을 때는 신나서 밤마다 놀이기구를 탔다고 한다. “스스로도 신기해서 직원들 다 퇴근하고 나면 소주 한병 사 들고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는 ‘임채무 너 대단하다’, ‘내가 이렇게 대단한 걸 만들었구나’ 혼자서 감격해 했죠.(웃음) 이것저것 놀이기구도 다 타보고.” 드라마처럼 놀이동산 불 다 켜놓고 아내와 데이트한 적도 있느냐니 “그거 전기 엄청 먹는다”며 현실의 어른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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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 기자

두리랜드는 그에게 즐거운 일이자, 가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술을 좋아하는데 소주 마시고 취하나, 양주 마시고 취하나 속 쓰리고 취하는 건 매한가지”라며 “그 돈을 가치 있는 데 쓰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임채무는 여러 얼굴로 기억되고 있다. 50~60대 이상 어른 세대에게는 ‘멜로의 왕자’이고, 30~40대 중간 세대에게는 ‘모레노 심판’ ‘황금어장’, 그리고 10~20대에게는 두리랜드 아저씨?


이날 두리랜드에는 가족 방문객이 많았는데, 아이와 함께 온 어머니들이 임채무를 보며 특히 반가워했다. 임채무는 1970년대 한진희, 노주현, 이영하와 함께 당대 ‘멜로 장인’으로 꼽히던 배우였다. 임채무는 무려 8년 동안 멜로드라마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한지붕 세 가족>(문화방송, 1986년)을 하기 전까진 그랬던 것 같아요.”


멜로드라마를 오래 하다 보니, 젊었을 때는 자신을 가둔 적도 있었다. “한창 인기 있을 때는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고 소곤거리고, 그런 게 신경쓰여서인지 대인기피증 비슷한 게 생겨버렸어요. 옛날에는 배가 고파도 혼자 식당에서 밥을 못 먹었어요.” 여행은 물론이고 사람들이 많은 바닷가도 못 갔다고 했다. 이제는 그런 속박에서 벗어났지만, 두리랜드가 마음에 걸린다. “아이들 안전과 관련되어 있으니 오래 비우면 마음이 편치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 짧게라도 제주도에 다녀오려고 해요. 어제 아내가 제 앞에서 여행 가방을 끌고 왔다 갔다 하더라고요. (웃음)”


그가 놀이동산을 운영한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평소 임채무의 근엄한 이미지 때문에 놀랐다. “제가 원래 좀 무뚝뚝했어요. 옛날 제 별명이 독일 병정이었어요.” 그러나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다정한 ‘두리랜드 아저씨’를 예상할 수 있는 시절이 있다. 그는 한 티브이(TV)광고에서 ‘2002 한일월드컵’ 화제의 인물인 ‘모레노 심판’을 패러디한 코믹한 모습으로 등장해 관심을 모았다. 


그 인기 덕분에 <문화방송>(MBC) 예능프로그램 <황금어장>에도 출연하며 젊은 세대와 소통했다. 그는 “광고를 안 찍겠다고 버티다가 했는데, 보름 동안 연구해서 모레노 심판 분장을 직접 했다. 그걸 보고 <황금어장>에서 한회만 출연해달라는 제안이 왔다. 이 역시 안 한다고 버티다가 했는데 반응이 좋았고, 그렇게 4회만 더, 8회만 더 하다가 7개월동안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다. 광고 섭외도 쏟아졌는데 그는 “시청자들이 광고를 정말 많이 사랑해줘서 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잊힐 때까지 광고를 찍지 않았다. 그게 3년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이엔에이(ENA) 채널>에서 방영한 <임채무의 낭만닥터>에 출연했다. 병원에 가기 힘든 시골에 찾아가 봉사를 하는 프로그램이다. “의료봉사를 하는 것을 마흔살 때 꿈꿨다. 그래서 출연료를 안 받았다”고 했다. “그동안 많은 혜택을 받았잖아요. 내년에 (우리나이로) 일흔다섯이에요. 그때까지 모든 걸 만끽하고 그 이후 인생을 계획해 놨어요.” 다 괜찮은데, 두리랜드는 걱정이다. 그는 “내가 없어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계속 남아줬으면 좋겠는데, 일평생 가꾼 이것을 누가 넘겨받아도 팔아버릴 것 같다”며 웃었다. 하지만 그때까진 아이들과 함께 웃고 지낼 것이다. 나이를 듣고 놀랐다니 그가 말했다. “아이들과 매일 웃어보세요 안 늙지. 안 늙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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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 기자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2022.11.0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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